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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도의 끝에 담은 협의와 영혼
[김경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도의 끝에 담은 협의와 영혼
  • 김경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06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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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분의 일초〉(2023), 김성환
출처-다음 영화

검도를 소재로 한만분의 일초는 흔한 스포츠 영화와는 다르다. 스포츠 영화는 흔히들 마지막에 이르러 라이벌이 경기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승패를 겨루기 마련이다. 영화 관객은 플레이어인 두 사람의 사연을 공유한다. 정작 그 경기를 보는 관중은 둘의 사연을 모른다. 관중은 둘의 사연을 모르는 채로, 둘의 사연이 몸짓이 되고 점수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고 경탄하고 환호한다. 플레이어와 관중이 교차로 등장할 때, 관객은 인물의 사연이 관중에게도 각인되는 듯한 착시에 반응한다. 흔히들 스포츠 영화를 이야기할 때 쓰는 수식인 뜨겁다는 내면의 감정과 관객의 반응 둘 다에 적용되는 말이다. 김성환 감독의 만분의 일초는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는 관중이 없다. 또한 공식적인 경기도 없다. 되려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위해서 선수촌에서 단련하는 여러 검도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다. 이 영화는 스포츠를 다룬다는 데에서는 스포츠 영화로 분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이기고 성장하는 어두운 성장 영화이자, 무협 영화로도 보인다.

영화는 재우(주종혁)의 악몽으로 시작된다. 칠흑같은 어둠 한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와 대련하지만, 재우가 휘두르는 죽도는 헛나갈 뿐이다. 재우는 상대의 죽도가 파고드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윽고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 선율이 흐르고 재우가 선수촌으로 향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재우는 거기에서 본인의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의 제자인 황태수(문진승)을 만난다. 그는 아버지의 실종 또한 황태수와 직접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 황태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선수촌에서 계속 1등을 차지한다. 재우는 황태수에 대한 복수심을 삭이지 못한다. 황태수를 검도로 이기겠다고 다짐한 재우는 훈련에 매진하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계속 사고를 내고야 만다. 재우는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점차 황태수를 따라잡기 시작한다. 그때 재우는 어머니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 영화는 세련된 문법으로 스포츠 영화의 틀에 무협의 미학을 담는다. 무협은 싸움을 뜻하는 무, 세속적인 논리에 얽매지 않은 본인의 소신을 뜻하는 협의 합성어다. 무협은 협이 부딪히는 순간을 담는다. 이는 검도라는 종목의 개성과 맞물린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검도는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기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검도에서 도는 이치를 뜻하기도 해서다. 검을 다루는 이치를 통해서 삶의 이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검도의 정신은 협의를 실천하는 두 인물의 정신과 이어진다. 둘 다 재우의 형이 검도를 하는 중에 죽은 사실에 슬퍼하고, 둘 다의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처를 입은 인물이기도 하다. 재우는 형과 아버지의 죽음을 애써 잊으려 한다는 점에서, 황태수는 그 죽음을 애써 덮고 살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트라우마를 대하고 애도하는 데에서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다. 둘은 서로의 스승인 셈이다. 또한 둘이 동시에 스승으로 삼은 재우의 아버지는 영화의 장르가 무협인 것을 드러내는 존재다. 첫째의 죽음이 사고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묵묵히 황태수의 수련을 돕는다. 어쨌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황태수, 어쨌든 형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으며 기억해야 한다는 재우, 감독은 이 둘의 협의를 죽도에 그려낸다.

김성환 감독은 탁월한 연출력으로 추상적인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협의를 미장센에 담는다. 우선 검도를 스크린에 담는 것부터가 힘겨운 일이다. 검도는 인물끼리 대사가 오가는 다른 스포츠와는 다르게 침묵을 미학으로 삼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이 침묵을 대신하는 것은 검의 소리, 캐릭터의 동작이다. 감독은 검도를 수련한 그 자신의 경험을 녹여냈으며, 두 배우는 이를 성실히 수행했다. 특히 주종혁 배우의 심도깊은 연기는 자칫 과잉된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감정선을 설득력이 있게 드러낸다. 감독이 플래시백과 환상 등의 장치로 재우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면서 재우의 협의가 죽도 끝에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히 그려낼 때 배우의 연기가 두드러진다. 감독은 물론 황태수의 트라우마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아버지라고 부르던 재우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두건을 둘러싸는 그의 절제된 태도에 트라우마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낸다. 문진승 배우의 절제된 연기는 끝내는 죄의식을 견뎌야 하는 황태수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재우의 트라우마가 드러나는 과정이 다소 반복적이라는 인상이 있기는 해도,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출처-다음 영화

나아가 감독은 자크 오디아르의예언자(2009) 등 영화를 레퍼런스로 삼아서 둘의 영혼을 그리려 노력한다. 매끈히 닦인 선수촌의 마룻바닥에 이 둘의 실루엣을 드러낸다. 특히나 둘의 마지막 결투에서는 마룻바닥이 검도를 겨루는 스크린의 정중앙에 걸쳐 있다. 이때의 둘의 영혼과 육체는 평형 관계를 이루며, 이 둘의 결투보다 마룻바닥에서 일렁이는 그림자가 더욱 시야를 사로잡는다. 둘의 영혼이 부딪히는 순간이 이 장면 하나에 압축된 셈이다. 소리의 부딪힘만으로 우리는 협의 부딪힘을 느낄 수 있다.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이미지로만 모든 심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성실한 이미지텔러로의 재능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가 드문 것이다. 이 감독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감독의 연출력이 탄탄하기에 그의 차기작이 독립영화가 되었든, 상업영화가 되었든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렴풋한 확신이 생겼다.

 

 

글·김경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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