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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도한 권력의 수정(受精)과 착상(着床) : 영화<서울의 봄>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도한 권력의 수정(受精)과 착상(着床) : 영화<서울의 봄>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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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신(정우성)의 눈빛에 관하여 (2023.11.22 개봉)

역사는 그 자체가 서사의 '생성'자이지만, 영화는 서사 구조를 거쳐야만 역사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인물-갈등-인물’의 서사 구조를 거쳐 역사의 생산자가 된다. 이때 그 구조는 두 가지를 함의한다. 인물과 인물끼리 일으키는 갈등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과 한 인물이 갈등을 통해 다른 인물로 인식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해석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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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에서는 인물과 인물끼리 갈등을 일으킨다는 전제도 한몫하지만, 인물이 갈등을 통해 다른 인물이 되었음을 깨닫는 인식의 문제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우리의 인식이 더욱 세밀해 진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서울의봄>을 관람하고 나면 우리가 막연하게 알아왔던 정치적 인물과 실존적 당사자는 더이상 같아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미지로 거칠게 소모되던 인물에 대한 인식은 현실의 층위를 한 겹 더 덧쓰게 되면서 세세하게 그 실체를 체험하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 구조는 ‘그러함에도 역사는 왜 되풀이되는가?’라는 물음에 침묵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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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황정민)은 권력욕이 이미 강력하게 탑재되어있는 인물이다. 여기에서 '그가 왜?'라는 의문은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이 가진 욕망 중에서 권력욕은 가장 강력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전두광이 그런 건 그냥 역사적 전제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는 ‘인간적’ 존재로 해석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태신(정우성)의 저항이 실패할 때 드러나는 감정선이다. 그 실패의 순간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충분히 축적된 이후여서 자칫 신파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저 건조하게 지나가려 한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힘 빠진 연출력이라고 박하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왜 그러해야만 했는지를 곱씹게 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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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광에 대한 이태신의 저항이 극적인 실패로 포장되었다면, 그래서 관객들이 표출하는 증오의 감정이 농축될 대로 농축된 후라면 또다시 되풀이 되는 열패감에 도리없이 휩싸이게 될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덕에 우리는 냉정하게 한국 사회의 역사적 진실을 촘촘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김성수 감독의 인터뷰 내용처럼, “한 나라의 군부가 어이없이 무너져버린 그 날”의 역사적 사실들은, 그 덕에, 감정적으로 농축된 분노를 빠르게 역사적 질문으로 바꿔서 지금의 우리 현실에 대입시킬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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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이 영화는 증오의 대상과 그에게 동조한 인물들을 승패로써, 저항하는 자들과 편 가르듯 갈라치는 방식을 활용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덕분에 이 영화는 인물들을 갈등 구조 속에 매몰시키지 않고(어차피 역사적으로 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급진적으로, ‘왜 한 인물에게 그토록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가?’를 물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언뜻 보면 그 질문(왜 그에게 그토록 무력해졌는가?)은 명확하게 제기될 틈이 없어 보인다. 영화 대부분 전두광과 이태신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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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갈등은 각각 입장에서 바라볼 때 서로 교차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태신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분을 다하기 위해 저항하지만, 전두광은 본분을 벗어나서라도 이기려고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태신에게 본분을 다하기 위한 저항과 대립은 ‘책임’의 소관이지만, 전두광에게 이겨야만 하는 대립은 권력이라는 ‘보상’의 소관이다.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여건에는 결국 권력이라는 '보상' 이슈가 있었다. 책임과 보상은 이 영화에서 대립을 이룬다. 책임은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해주지만 보상은 정체성을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망각한 자들에게 무릎 꿇으라는 명령은 교리(敎理)와 같다. 전두광이 쿠데타에 성공한 후 화장실에서 남몰래 드러내는 야비한 포효는 모든 기득권 세력들이 자기가 내어줄 보상이라는 교리 앞에 속절없이 복종하리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었다. (대사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는 "입속에 처박아줄"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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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영화는 전두광에게 저항했던 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과, 승자로서 전두광의 희열을 비교 배치함으로써 영화가 역사를 바라볼 때 작동시킬 수밖에 없는 서사 구조를 다시 부각시킨다. 그 속에서 이태신은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실패자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승자(전두광)와 패자(이태신)가 각각 그에 맞는 결과를 얻어가기는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전두광이 승자로서 모든 공과를 다 가져간다는 것에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적 서사의 구조 속에서라면 승자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거기에 따른 모든 공감대가 친밀하게 형성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증오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각 되는 사실 하나. 그것은 바로 이 서사 구조 덕분에 전두광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적 무능과 그 실패에 대한 우리 모두의 고통스러운 자각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김성수 감독의 영리함은 서사 구조를 이렇게 활용한 방식에 있다.

 

출처_다음 김성수 감독
출처_다음 김성수 감독

그러면 그 무능과 실패는 왜 반복되는가? 여기서 거칠게나마 파악되는 것은 전두광이 벌인 일련의 행동들이 어쩌면 한국형 권력 탄생 과정의 생리학적 시뮬레이션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가 하나회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회합하고 포섭하는 장면은 권력욕에 심취한 한 인간의 비도덕적 작태를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든 세력이 마치 ‘수정(受精) 후 착상(着床)'하는 생리적 반응과 비슷한, 이른바 작당하면 시도될 수 있는 권력 찬탈의 착상 시뮬레이션에 가까워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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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는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에 대한 허무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이라거나 본능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가?’에 대한 대답은, 한국 사회에서만큼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반응이자 본능적인 반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서 권력 찬탈은 권력의 찬탈을 자연발생적으로 회합하듯 수정(受精)한 결과로써 탄생한다.

 

출처_다음 영화 포스터
출처_다음 영화 포스터

그러므로 무도한 권력 앞에 결연히 맞서지 못한 이유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과 상관없이 오로지 긍정될 수밖에 없는 권력 창출의 수정(受精) 프로그램이 정파별로 지역별로 한국에서는 무조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묻어나는 이상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착상이 현실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탓이다. 우울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러한 작금의 현실을 절절히 자각하고 싶다면 나는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2023년 11월 22일 개봉)

 

부언: 영화 마지막, 이태신이 바리케이트를 기어이 넘어 전두광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서 순간 멈칫하는 전두광. 절대권력인 그를 그렇게 만든 눈빛, 그러니까 이태신의 강렬하고 절박한 그 눈빛. 그것은 어떤 극복의 상징이거나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태신은 아니, 이태신의 그 눈빛은 어떠한 장벽 앞에서도 계속 나아가길 지독히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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