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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해롭지만 평화로운 <우리의 하루>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해롭지만 평화로운 <우리의 하루>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14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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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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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과 답

“아무 뜻도 없이 있는 겁니까?” 재원(하성국)은 시인인 의주(기주봉)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진리는 무엇인지 질문하다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자 이렇게 되묻는다. 우리 인간의 삶은 정말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이냐 묻는 이 대사에 몇 달 전 보았던 웨스 앤더슨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안의 방송 속 연극의 연기자인 존스이자 극 중 이름이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인 인물은 연기를 하다 무대 뒤편으로 들어와 연출자에게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연기를 해야 해요?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잖아요. 아직도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요” 그의 질문에 연출자는 이렇게 답한다.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

항상 비슷한 이미지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반복하여 영화를 만들고 있으면서, 한 명은 지극히 사실적인 방식으로 기묘한 비현실성을 드러내고 다른 한 명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기묘한 사실성을 드러내는 두 감독의 유사성 속에, 연기자(오기/존스)와 연기자를 지망하는 인물(재원)이 같은 이야기와 대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두 영화가 다른 점이 있다면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허구적 재현의 안과 밖을 오가는 방식을 활용해 직접적으로 현실의 환영성을 다룬다면, <우리의 하루>는 카메라라는 지극히 작은 소품을 활용해 간접적으로 그것을 지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할 자리가 있을 것이고, 기주(김승윤)가 든 캠코더처럼 특별하지 않은 듯 프레임 한편에 놓인 <우리의 하루>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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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카메라와 고양이

<우리의 하루>는 전작인 <물안에서>나 <소설가의 영화>처럼 과감한 형식상의 변화가 있는 작품도 아니고 <탑>처럼 이야기의 구조가 견고하게 구축된 영화도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 <우리의 하루>에도 두 이야기가 있고 그 두 이야기는 다르지만, 구조적 유사성이나 대사와 인물의 역할과 같은 내용적 유사성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만 전작들처럼 두 이야기가 강렬하게 부딪히면서 영화가 구축하고 있는 사실성을 무너뜨리는 클라이막스가 없다. <소설가의 영화>의 영화 속 영화나, <물안에서>, <탑>, <도망친 여자>의 엔딩처럼 말이다. 때문에 <우리의 하루>가 주는 강렬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면서도 약간의 해방감을 동반하는 영화의 따스한 감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 두 이야기 간의 구조적 연결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정수(송선미)의 집에서 에피소드와 의주의 집 에피소드 간의 핵심적인 유사성은 고추장을 푼 라면도, 선물도, 사라진 고양이와 술, 담배도 아닌 계단을 올라와야만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의 특성과 그곳에 뜻과 답을 구하러 올라가는 인물들에 있다. 예컨대 계단을 올라온 이후에 몇 층인지 모를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있지만, 건물 밖을 나선 후의 거리의 모습은 있어도 두 에피소드의 공간이 되는 건물 자체에 진입하는 장면은 없다. 두 공간은 땅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어딘가로 올라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공간적 특성에 속해 있다. 이 공간에는 끊임없이 창밖에서, 외화면에서 공사장 소음, 사람들의 말소리와 같은 현실의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에 무언가 답을 구하러 지수(박미소)와 재원이 찾아온다. 먼저 지수가 상원(김민희)에게 연기에 관해 묻지만, 상원이 답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와 경험을 언급하며 후련해지지 않고 막막해진다. 결국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조언 아닌 조언은 풀과 꽃을 바라보면 편안해진다는 감흥과 감정이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정수처럼 풀과 꽃을 볼 때 “다 괜찮다, 아무리 흔들려도 믿는다, 다 조용하다, 난 항상 좋아하고 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는 재원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그의 질문에 의주는 간단하게 답한다. “삶의 이유는 없다. 사는 것은 이유와 상관이 없다. 인간의 삶에는 뜻도 명확한 정답도 없다. 정답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 오답이다. 오답들 사이에서 헤매는 것이 삶이다. 그렇기에 산다는 건 어색하고 어설프다. 우리는 살아 있기에 삶에 대해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좋다” 그러고 의주는 카메라를 끄자고 말한다. 카메라가 있어 피곤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기주는 카메라를 끄고 그때부터 술 게임이 시작된다. 더 이상 질문도 하지 않고 답도 구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놀이에 취하고 술에 취하는 일상적 즐거움의 순간이다. 카메라가 꺼지듯 고양이의 잠이 찾아올 때 정수의 집에서도 지수가 사라지고 상원에게도 평온한 순간이 찾아온다. 술과 노래와 수다의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땅을 벗어난 공간에 속한 두 인물의 집에 찾아온 외부인의 모습은, 마치 관객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영화에서 혹은 각자의 삶에서 무언가 답을 찾기 위해 현실 밖을 바라보고 허구의 공간에 찾아오지만 그들이 듣고, 보고, 찾을 수 있는 것은 뜻이나 답이 아니라 평범한 대화들, 식사, 술자리와 음악이 주는 일상적 즐거움이다. 카메라가 켜져 있는 동안, 고양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에 들려오는 말들은 그 자체로 “사는 게 너무 짧고, 금방 죽고, 금방 끝나”기에 “오답 사이에서 헤매는 것이 삶의 모습"이라는 명쾌한 해답이기도 하면서,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 반복됐던 식상한 말들이기도 하다. 때문에, 의주는 이 문답들이 피곤하다고 말하고 카메라를 끄라고 말한다. 또는 마치 그 식상한 문답들을 피하려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 고양이처럼 지수는 사라져 버리고 영화는 곧 막을 내린다.

 

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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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롭지만 평화로운 우리의 하루

당연히 카메라가 꺼지고 땅이라는 현실로 내려간다고 해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무대 밖을 이탈하더라도 무대 뒤편에서, 극장 밖에서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지는 <애스터로이드 시티>처럼 말이다. 진실하게 진리에 근거해서 살고 싶다던 재원은 의주에게 거짓말인 것처럼 보이는 핑계를 대고 기주를 따라나선다. 그는 먼저 가겠다던 기주를 극구 말리며 같이 땅 위를 걷는다. 사랑이 무엇이냐 물었던 그의 질문의 답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기주는 영화의 끝까지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피운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안주와 술 한 잔을 따라 놓고 경건하게 담배를 태운다. 땅이 보이지 않는 옥상에서, 금방 끝나는 삶의 일상적인 평온함이자 건강이 나쁜 의주에게는 해로운 즐거움인 담배를 피우며 기묘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이 엔딩은 영화관을 나서며 각자의 삶으로, 이야기로 내려갈 우리에게 “다 괜찮다, 아무리 흔들려도 믿는다, 다 조용하다, 난 항상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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