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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평생을 짊어지던 돌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 바통을 건네는 거장.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평생을 짊어지던 돌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 바통을 건네는 거장.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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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불길에 휩싸인 어머니를 향해 질주한다. 다시, 불길에 휩싸인 어머니를 향해 질주하던 소년이 꿈에서 깨어난다. 이후에도 그는 반복되는 꿈, 섬뜩한 새의 목소리, 남들은 볼 수 없는 환영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끊임없이 재목격한다. 도쿄를 떠나온 그가 도달한 새로운 세계는 꿈과 현실, 실체와 환영,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다. 마히토가 휘두르는 목검이 대표적이다. 목검은 한차례 소동이 마치 꿈이었다는 듯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금세 산산이 조각나며 현실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타지에서 혼란에 빠진 주인공은 우연히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남겨놓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책을 통해 여러 층위로 구분되는 이 기묘한 세계에 하나의 층위를 더할 수 있다. 환영으로 영사되어 꿈이란 착각을 일으키고, 그 속에서는 생사의 구분조차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세계, ‘픽션’이다.

소년을 꿈, 환상, 저승 혹은 ‘이야기’ 속으로 안내하는 이는 누구인가? 포스터의 주인공, 왜가리이다. 나츠코에 따르면 왜가리는 엿보기를 좋아한다. 물론 관음의 성격만으로 새에 카메라의 메타포를 들먹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정보는 이후의 대화에서 주어진다.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거짓말을 했다는 왜가리의 말은 거짓일까? 세 사람의 대화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인용하지만, 역설의 해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왜가리는 진실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것으로 소년을 인도한다. 모든 픽션은 허구이지만, 언제나 진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향한 마히토는 그곳에서 드높은 탑을 마주한다. 왜 하필 탑이었을까? 여타 건축 양식과 달리 탑은 그 높이가 강조된다. 영화가 설정한 세계의 층위는 ‘높이’라는 관습적인 위계를 충실히 따른다. 소년이 살고 있던 현실의 바닥이 꺼지며 ‘지하’ 세계, 저승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높이가 세계 간의 위계를 규정한다면, 꼭대기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탑의 주인을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환상 세계의 베일이 벗겨질수록 그의 신적인 면모는 더욱 두드러진다. 탑의 주인, 큰할아버지는 신비로운 돌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이다. 여기서 줄곧 언급해 온 ‘픽션’의 메타포를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 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서사가 전개될수록 큰할아버지가 그려낸 세계가 놀랍도록 잔혹한 것을 알 수 있다. 앵무새들은 우스꽝스럽게 군인을 흉내 내며 파시즘의 물결에 잠식된다. 제국주의적 색채는 교회 창문의 모자이크마저 정치적 심볼로 대체할 정도다. 자신들을 창조한 신에게 협박에 가까운 협상을 제안하는 모습을 통해 이들의 끝없는 오만함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 ‘망가진 세계’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는 것일까? 애초에 이 세계는 왜 이토록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일까?

 

다시 탑의 주인, 세계의 창조주가 예술가라는 대목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안타깝게도,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20세기 초, 눈부신 이성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은 끝내 전쟁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마치 아이가 어른의 행동을 보고 배우듯, 화염에 뒤덮인 당대의 현실이 난장으로 가득 찬 환상 세계를 낳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신은 안간힘을 쓰며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자신을 계승할 소년에게 신이 부탁한 것은 단 하나, 악의로 가득 찬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를 위해 직접 “아늑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 조각”을 준비한 그였다.

하지만 다시,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소년은 현실 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픽션의 세계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마히토, ‘진실된 사람’이 목도한 진실이다. 소년은 관자놀이의 흉터를 드러내며 자신에게도 악의가 있음을 밝힌다. 기어이 서로 죽고 빼앗는 참혹한 ‘Real World’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이제야 비로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한 이유가 선명해진다. 전쟁이 한창 고조될 때 소년은 수도를 떠나 환상 세계로 여정을 떠났다. 어머니가 남긴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깨달은 그는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기 위해 다시 자신이 원래 있던 곳, 도쿄를 향한다. 그는 언젠가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신, 예술가의 자리에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을 대입할 수 있을까? 감독이 실제로 군수 공장장의 아들이라는 배경지식을 떠올린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히려 주인공 마히토에 자기 자신을 투영한 자전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마음에 걸린다. 소년이 두 번째로 신을 만나는 장면 직전, 거대한 돌이 신의 머리 위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하는 이 돌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자 원리라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조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때 카메라가 신과 돌덩이의 관계를 포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마치 지구를 힘겹게 떠받드는 아틀라스처럼, 노인이 돌덩이에 의해 짓누르는 듯이 그려진다. 여든을 넘긴 거장은 일평생 동안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를 힘껏 들어 올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는 지금껏 자신이 지탱해 온 세계를 이만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감독의 작은 한숨이 담겨있다. 이번 작품에 유달리 지브리 전작들에 대한 오마주가 많은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머니가 남겨놓은 이야기를 아이가 읽는 외피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노년의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관객에게 내놓은 것에 가깝다. 설령 삶을 통째로 반추하는 성찰이 죽음을 암시할지라도, 이는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장은 자신의 사유를 이어 나갈 다음 타자에게 바통을 건넨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오지랖도, 꼰대질도 아니다. 그는 현실 세계로 박차고 나간 소년 소녀들이 궁금할 뿐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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