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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가자의 유대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가자의 유대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3.11.15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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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지 않은' 절대악 만큼 '사유하는 절대악'도 해롭다

 

나치 독일은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어 유대인과 폴란드 공산주의자 110만여 명을 독가스로 살해했다. 소련군이 진주했을 당시 7톤의 머리털이 한 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나치는 그걸로 담요를 만들었다고 한다. 수용소 의사였던 요제프 멩겔레는 어린이 수감자를 영하 20도 이하의 추위 속에 맨발로 내몰아 동상에 걸리게 한다든가 남녀 성기를 절단해 보는 등 각종 생체실험을 했다. 잘 아는 아우슈비츠의 잔혹사다.

 

예루살렘 재판정의 아이히만
아우슈비츠의 참상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잡지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가, 이런 학살의 책임자 루돌프 아이히만이 재판받는 과정을 참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63년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006, 한길사)을 출판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2006, 한길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2006, 한길사)

 

 

악의 펑범성

아렌트는 7개월간 진행된 예루살렘의 법정 심리가 끝나고 교수대로 향하는 아이히만을 관찰했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그는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했고, 그 절반을 마셨다. 그는 그에게 성서를 읽어 주겠다고 제안한 개신교 목사 윌리엄 헐 목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두 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기괴하게도, 의기양양하게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낸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듯이 말이다.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우리는 실로 두려운 교훈 한 가지를 얻었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것이 두려운 이유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자 전례 없이 가공할 만한 ‘절대악’이 놀랍게도 ‘평범함’ 속에서 서식하기 때문이다. 절대악은 중뿔난 괴물이나 냉혹한 소시오패스, 그리고 특별한 악마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근면하고 성실하며, 삶에 의지가 충만한 평범한 인간들, 심지어 선량한(!) 시민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과 악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이러한 무사유가 아마도 더 많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던 것이다.

 

절대악, 인류에 대한 범죄

아돌프 아이히만!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 전범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독일 및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강제 이주 및 학살을 계획·지휘하며 총 600만 명을 학살했다. 600만! 서울인구(941만)의 64%, 부산인구(330만)의 1.8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다. 서울시민의 3분의 2, 부산시민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수가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더욱이 질병이나 심지어 전쟁으로 죽지도 않았다. 전투와 무관한 곳에서, 인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맙소사,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던진 질문이다.

이유를 찾기 전에 그는 이 전대미문의 학살을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집단학살로 부르긴 미흡하다. 그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잔혹한 방식에 따라, ‘전 민족’을 그것도 ‘체계적으로’ ‘절멸’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인 셈이다. 이러한 범죄는 실제로 국제법이나 국내법으로 단죄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단죄도 용서도 할 수 없는 ‘절대악’이다!

 

 

‘사유하지 않은’ 절대악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그 이유를 밝힌 차례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절대악이 자행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렌트는 두 가지 사례에서 힌트를 얻었다. 첫째는 1944년 여름 패전을 앞두고 농부들에게 격려 연설을 하기 위해 바바리아로 갔던 한 여성 ‘나치 지도자’의 이야기다. 유대인에 대한 독가스학살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그녀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 말했고, 훌륭한 독일인들은 이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전쟁이 불행한 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해, 가스를 사용해 모든 독일 국민들이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기에 찬 여성지도자의 연설에 농민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 광경을 본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말았다. “오, 맙소사.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이 사랑스런 여성이 허깨비가 아니라니, 나는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40대를 바라보는 노란 피부의 미친 눈을 가진 여성을! ..... 그런데도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이 바바리아 농부들이 죽음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식혀주기 위해 호숫물에 빠뜨렸던가?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179~180)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고, 그 확신으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듣는 이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침묵했다.

이제 ‘지도자’도 당원도 아닌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자. 이 사건은 1945년 1월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도시는 러시아의 반격으로 이미 폐허로 변했고, 내일이면 러시아의 연방으로 합병될 운명이었다. 거기서 어떤 독일여성이 의사에게 다가와 수년간 앓던 정맥류를 치료해 주길 원했다. 의사는 ‘지금은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 받는 것이 좋겠다고 애써 설명하면서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의사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이때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낭패로군,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 버렸으니!’(p.180) 기가 막힌다. 과연 생각이란 게 있긴 한가? 속된 말로 머리는 장식물에 불과한가! 한나 아렌트가 결론 내린 ‘악의 평범성’이 확인되는 듯하다.

 

 

‘사유하는’ 절대악

하지만 같은 책에서 그녀는 악의 다른 모습도 보았다. “수천 명의 유대인이 가득 들어차 있는 구덩이를 향해 기관총으로 난사하고는,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몸뚱어리들 위로 흙을 덮는 것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무척 덤덤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참혹함에 대한 일말의 감정만은 남아 있는 듯한 푸념(!)이다. 나치의 학살전문가 친위대원이 상부에 쓴 보고서다(p.169).

독일인만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루마니아는 독일인도 혀를 내두를 ‘루마니아 스타일’로 유대인을 학살했다. 루마니아 스타일이란 5,000명을 열차 화물칸에 발디딜 틈 없이 태우고는 여러 날 동안 목적지도 계획도 없이 교외를 계속 달리게 하여 질식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살해 작전을 마치고 나면, 유대인 도살장에 시신들을 전시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아주 흔한 일이었다. 루마니아 공포의 강제수용소는 독일의 명령과 무관하게 루마니아인들 스스로 만들고 운영했는데, “독일에서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어떤 일들보다도 더 교묘하고 잔혹한 것이었다.”(p.275) 1942년 8월 중순까지 루마니아인들은 거의 어떠한 독일의 도움 없이 30만에 가까운 유대인을 죽였다.

유대인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옷을 모두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고는 트럭이 도착해서 그 방의 출입구 바로 앞에 정차했고, 벌거벗은 유대인은 그 트럭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은 닫혔고 트럭은 떠났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갔는지) 저는 알 수 없었어요. 저는 거의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비명 소리가 났고, 그리고 .....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그리고 저는 그 차량을 줄곧 따라갔고, 제가 평생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트럭은 넓게 파인 구덩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고, 그리로 시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사지는 유연했습니다.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떠났습니다, 제 차에 올라타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p. 152) 바르테가우라는 폴란드 소재 학살센터에서 일어난 일인데, 여기서 30만 명이 학살되었다. 이곳은 동부지역에 설치되었던 6개 죽음의 수용소 중 한 곳에 불과하다. 이 목소리는 이곳을 방문한 아이히만의 경험담이다.

악은 과연 사유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이 저지르는 것인가? 아렌트가 목격한 이 광경들로부터 나는 그녀의 결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왜 그런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고 평범한 마음으로, 저런 악행을 저지르기는 쉽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악하지만은 않아서 대다수 사람들은 ‘이성을 동원해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저런 평범함의 가면을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부류의 사람들은 무엇을 사유하면서 저 힘겨운 평정함을 유지했을까? 첫째, 외면하면 된다. 얼굴을 돌림으로써 우리는 적어도 악행을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마냥 안 보고만 살 수 없다. 둘째, 보상이 이뤄지면 악행도 어느정도 저지를 만하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인들에게 완전고용을 보장했으며, 구수한 빵과 따뜻한 수프를 부족함 없이 제공하였다. 적지 않은 독일인은 순전한 무사유가 아니라 ‘깊은 사유과정’을 거쳐 적극적으로 악행에 동참했으며, 적어도 외면함으로써 이를 방조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깊은 사유’가 전체주의적 악행의 또 다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나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라고 평가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목격한 또 다른 모습의 악행을 포괄하기에 악의 평범성은 뭔가 부족하다. 절대악은 사유하기도 한다.

 

 

가자의 사유하지 않는 유대인과 사유하는 유대인

가공할 만한 절대악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자행된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살아남았다. 그 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시온성을 건설했다. 빼앗은 자는 ‘국민’이 되고 빼앗긴 자는 ‘난민’이 되었다. 둘의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6미터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쌓인 ‘도시감옥’에 퍼부어지는 유대인의 융단 폭격! 이스라엘의 공격 후 가자지구 전체 사망자는 이미 1만을 넘어섰다. 가자의 유대인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악의 평범성! 60년 전 예루살렘에서 아렌트는 이러한 순전한 무사유가 저지르는 절대악에 탄식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가자의 유대인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이러한 무사유가 아마도 더 많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동족 아렌트의 이 교훈을 잊고 있는 듯하다.

 

가자의 어린이들(MBC 뉴스데스크)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MBC 뉴스데스크)

그런데, 이 광경을 즐기는 유대인들의 환호성(!)은 무심한 나치친위대 대원의 푸념보다 더하다. 더욱이 가자지구는 어린이의 무덤이 되고 가고 있다. 10분에 1명의 어린이가 사망하고 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하기만 하다면 이러진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남부 스데르트 인근의 한 언덕에서 2009년 1월 1일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 북부 공습당하는 광경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다.
이스라엘 남부 스데르트 인근의 한 언덕에서 2009년 1월 1일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 북부 공습당하는 광경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다.

 

2014년 7월 덴마크 언론인 ‘알란 쇠렌슨’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사진이다. 자국군대가 팔레스타인난민촌을 폭격한 후, 폭음과 불꽃이 일자 이스라엘국민들이 액션 영화를 관람하듯 편안한 의자에 앉아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쇠렌슨은 이곳을 ‘극장’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2014년 7월 덴마크 언론인 ‘알란 쇠렌슨’이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사진이다. 자국군대가 팔레스타인난민촌을 폭격한 후, 폭음과 불꽃이 일자 이스라엘국민들이 액션 영화를 관람하듯 편안한 의자에 앉아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쇠렌슨은 이곳을 ‘극장’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나는 악마를 보았다!"

가자의 유대인이 보여주는 평범성 속에는 ‘사유하는’ 절대악이 깊이 감춰져 있는 듯하다. ‘가자의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아이히만’보다 더 나은가? ‘사유하지 않은 악’보다 ‘사유하는 악’이 더 해로울 수 있다. 사유하지 않은 자 사유해야 하고, 사유하는 자 ‘똑바로’ 사유해야 한다. 그게 깨어 있는 시민이다.

 

 


글 · 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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