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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희의 문화톡톡] 심청으로서의 심청되기
[한유희의 문화톡톡] 심청으로서의 심청되기
  • 한유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3.12.19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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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현실을 담아내는 웹툰 읽기] 3
seri, 비완, <그녀의 심청>

 

박제가 되어버린 여성을 아시오?


여기 쓰지 못한 사정이 있다. 행간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감은 눈을 떠보는 것은 어떠냐는 물음이 있다. 심청의 이야기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출천지대효’ 심청을 우리는 잘 모른다. 봉사의 딸,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엄마를 잃어 동냥젖으로 자란 아이, 7살부터 아버지를 부양하면서 “세월이 여류하여” 열다섯이 된 심청. 삶의 고된 여정에 대해서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얼굴이 추월하고, 효행이 뛰어나고, 동정이 안온하며 인사가 비범하니 천생여질”이다. 가난하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천생여질’이라 연이 없는 장 승상 댁 부인이 수양딸로 삼고 싶을 정도인 딸이다. 이상한 일이다. 동네 걸인은 어떻게 이렇게 사랑받는 소녀로 자랄 수 있었을까? 

길이길이 남은 효의 가치 뒤에 가린 심청을 생각한다.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가. 냄새가 나고 더럽고 볼품없다. 그렇다면 심청을 다시 그려야 한다. 애비는 눈이 멀어 아이를 깨끗이 씻기지 못했을 것이고 일곱 살부터 거리에서 살기 시작했으니 “지저분한 얼굴, 엉망으로 엉킨 머리, 굽실거리며 구걸을 다니다 굽어버린 어깨와 등. 목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여자아이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편이 현실적인 심청이다. 밥을 빌어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소녀가 과연 고귀하게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거쳤을 도화동 심청을 다시 상상할 수 있다. 

 

<심청전>의 2019년판 <그녀의 심청>의 심청은 효 이전의 심청, 여성 심청에 대한 이야기다. <심청전>의 심청과는 달리 아름답지만 꾸밀 수 없고, 살기 위해서는 도덕률도 버려야 했던 밑바닥 여성 ‘심청’의 상황을 적시한다. 효의 이미지로 박제된 심청이 웹툰 속 그림으로 현현되는 심청과 마주하면 기시감이 든다. 헝클어진 머리에 더러운 옷을 입고 말도 행동도 거칠다. 거렁뱅이 심청은 독자들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형성한다. 심청은 효를 벗어던지고, 현실을 입는다. 

심청은 동네에서 ‘잊혀진’ 존재다. 도화동 안에서 살아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잊고 산다. 선의는 금방 사라지고 ‘여태 살아있’는 지겨운 이물질이다. 불쌍한 사연은 어느새 마을의 짐으로 의미가 변용되며 살아있어도, 죽어있어도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심청은 자라며 비체(abject)가 되어버린다. 비체는 나와 친밀했던 이질성이 분리되어서 혐오스러워지고 나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어떤 것이다. 질서와 동일성을 해칠 수 있으며 어중간하고 모호한 혼합물은 사회의 한 부분을 담당하지만 완벽하게 배제할 수도 없다. 없는 것‘처럼’ 치부될 뿐이다.

비체로서의 심청은 당시의 사회의 민낯을 볼 수 있는 하나의 틈이다. 결핍의 공간은 리텔링을 통해 원전의 이야기를 전복할 수 있는 지점 또한 제시한다. 작가는 행간에 여성을 그리고 쓴다. 여성 작가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성의 픽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녀의 심청>은 과거-그곳의 심청을 현실로 길어 올리며, 지금-여기를 바라보게 하는 창이다. 여성의 픽션을 규정짓는 결론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은 2019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효에 갇힌 <심청전> 속 심청이나. <그녀의 심청>에서 비체로 존재하는 심청 모두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동일하다. 그들은 각각 주체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효’의 이미지로만 박제되어 있을 뿐이다. 인당수에 빠져 죽은 심청은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을 복원할 수 있을까? 

 

꽃으로부터의 종속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70년 전 발화된 문장이 지금까지 사회에 타종을 울리는 것은 여성이 여전히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점이 바뀌었다. 여성은 주체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투표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 이제 많은 여성들은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관계항으로 대상화된다. 타자화된 여성들은 여성성의 이상인 ‘집안의 천사’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자기희생적이고 순결하며 매력적인 천사가 되기를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를 현현한다. 여성성의 보편성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여성이 대상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우선 여성의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여성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이미지 중 꽃은 대표적인 기표다. <그녀의 심청>에서 무한한 캔버스에 펼쳐지는 꽃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아름답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 곧 시들어버리는 것. 결국 버려질 것. 그저 장식품. 그리고 마님을 의미한다. 꽃을 장식하는 행위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이나 역할에 순응하는 의미를 갖는다. 결혼식에서 꽃을 꽂는 행위의 주체, 객체 모두 혼인을 할 수 있거나, 혼인의 상황에 놓여있는 ‘여성’이라는 점은 결국 여성에게 주어진 규범의 내재화를 의미한다. 

꽃은 매순간 배경과 소품으로 등장하며 여성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마님의 상황이 위험에 처할 때 꽃은 떨어지거나 꺾이고 밟힌다. 마님이 스스로 규율에 적극적으로 따를 때 마님은 꽃을 지니거나 뿌리거나 꽂는 행위를 취한다. 이런 이미지와 텍스트의 혼합은 꽃의 의미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 

이미지의 수많은 의미는 텍스트로 고정되는데, 스크롤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웹툰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속도를 좌우한다. 보통 독자들은 이미지는 빠르게, 텍스트는 느리게 스크롤 한다. 작가는 이런 웹툰의 특성을 영리하게 이용하며 사건이 해결될 때마다 텍스트를 컷 가장 끝에 배치한다. 검은 바탕에 텍스트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라스트 컷을 통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상황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포커싱하는 연출이다. 

도화동은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극대화된 공간으로 설정된다. 이때 세 명의 여성은 사회에서 바라는 여성의 이미지를 각자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한다. <심청전>에서 넘어오면서 완벽하게 변화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심청, 장 승상댁 부인, 뺑덕어미와 같은 <심청전>속 대표적인 여성 인물에 새로운 외모와 성격을 부여하면서 여성의 타자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살피고자 한다. 

사랑받고자 한다는 마님의 반복적인 언사는 여성의 위치를 완벽히 타자의 자리에 고착화하는 내재화된 규율을 뜻한다. 원전에서 수양딸을 원하던 50대 장 승상댁 부인이 심청 나이 또래로 설정된 것은 유의미하다. 욕망이 거세당한 여성이 꽃처럼 ‘꺾이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매혼’이자 재취자리로 승상댁 부인이 되었다는 설정은 억지로 ‘꽃’이 되라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굴복이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자 취향, 능력을 제한받는다. 결국 사랑하는 연인조차 포기한다. 승상의 부인으로 “본분을 다하지 않았습니까?”는 마님의 외침은 살해 위기에서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마님의 죽음이 승상을 따라 자결하는 것으로 변모하며 열녀로 칭송받을 것이라는 승상 아들의 말은 대상으로 존재해서는 결국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도화동에 이름난 효녀 심청은 비루하기만 해서는 사랑받지 못하고, 분칠에 힘썼다간 아비를 내팽개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꾸몄으나 꾸미지 않은 듯, 진흙 속의 연꽃처럼 태생부터 가릴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듯 해야만 모두가 가련히 여기더라”는 규칙을 지키는 심청의 실패는 베푸는 자의 우월성이 보장되는 동정심에 기댔기 때문이다. 마님의 방식대로 사랑받고자 했던 심청은 비체에서 고작 대상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스님은 심청에게 지속적으로 연꽃이 되기를 바란다. “너는 연꽃 같은 아이다. 속세에 때묻은 다른 꽃들과 달리 특별하지. 여래나 보살도 연꽃 위에 자리하지 않느냐. 착하지, 참으로 연꽃 같은 아이야.”라고 말하는 스님에게 심청은 자신의 덕성을 나타내는 대상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기로 약속을 한 후 거렁뱅이는 “화용월태 고운 얼굴, 난초 같이 푸른 머리...” 마을의 귀감에 걸맞게 그려진 청이의 초상화는 또다른 꽃으로 남는다. “도화동의 출천지대효(出天地大孝) 심청”이라는 이름의 꽃, 누군지 모를 단정한 규수로 기록되고 만다. 그림 속에는 어떻게든 사회에 흠집을 내려고 시도했던 심청은 없다.

뺑덕어미는 리텔링에서 아주 흥미로운 존재다. 아주 아름답고 본인의 욕망에 투철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좋은 어머니’의 프레임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부덕한 여자가 자식까지 망쳤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인 덕이를 팽개친 뺑덕어미. 덕을 갖추지 못한 뺑덕어미”라는 이름을 통해 뺑덕어미는 사회의 질서에서 축출된다. 샤먼과 같은 특이성을 통해서만 생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여성이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욕망의 거세가 전제된다. 남성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알 수 없는 존재다. 매혹적이면서 두렵고, 자신을 해하고 사회를 불안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꽃을 양산하고 있는 이유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면서 꽃을 관리한다. 

 

비체되기의 새 양상


비체는 대상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여성성’은 타자화된 대상을 의미한다. 비체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비체는 대상화가 될 수 없다. 대상은 주체로 하여금 의미가 욕망하는 아슬아슬한 틀 속에서 균형 잡도록 도와주고 모호한 상태인 주체가 동일화되는 것을 도와준다면, 비체는 배타적이 되어 주체를 의미가 붕괴되는 장소로 가게 만든다. 

비체가 되는 것은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비체 자체가 지정된 한계나 장소나 규칙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호한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 여성을 다시 호명해야 한다. 크리스테바의 비체가 되는 것의 의미를 이현재는 비체되기로 방법화한다. 비체를 긍정적으로 재전유하는 순간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구조를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벗어나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된다. 대상으로서의 여성, 여성성을 벗어날 때 여성은 ‘행위자성’을 추동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비체되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미러링과 패러디, 가면쓰기, 잡년될 것, 여성성의 재전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님은 ‘가면쓰기’의 비체되기의 방법을 차용한다. 조앤 리비에르의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에서 “여성성은 가정된 것이며 따라서 가면처럼 쓸 수 있다”는 주장은 여성이 되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감추는’ 과정을 뜻한다. 지배 문화 속 비난과 처벌이 두려운 여성이 자신이 위장하는 가면을 씀으로써 여성이 된다는 주장은 마님의 행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가면쓰기는 여성의 욕망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욕망 자체를 고민해야 한다. 마님의 욕망은 사랑하는 연인 심청, 화려한 옷, 글쓰기, 자신의 능력을 내보이는 것이다. 사랑받는 여성의 가면 아래 마님의 욕망은 끊임없이 추동한다.

뺑덕어미 또한 비체다. 뺑덕어미의 비체되기의 방식은 잡년이 되는 것이다. “쌀 대신 엿 사먹고 벼 대신 고기 사고 잡곡으로 술 사먹고 술 취하면 밤중에 울음 울고 남정네를 유혹하고 아무에게나 담배를 청하고 정자 밑에서 낮잠 자기 일쑤에 툭하면 싸움지에 일년 내도록 입을 멈추지 않아 온갖 악행을 다 겸하였다는 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뺑덕어미는 “그게 어디가 나쁜데”라고 되묻는다. 자신의 욕망을 아주 솔직하게 관철한다.

심청은 제시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비체되기를 실현한다. 사랑이다. 심청과 마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 비체다. 동성애라는 것은 성의 정상성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비체되기의 방법이다. 사랑이 좌절된 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심청이 인당수로 갈 것을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의미를 찾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딸’로 머물러서는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여성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체되기를 행하지만 서로의 방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 자신을 포함한 그들의 인정투쟁까지 이르지 못했기에 심청의 죽음은 가시화되고 만다. 죽음의 순간에 다가서자 그들은 다른 양상을 띤다.

뺑덕어미는 심청만 구하려고 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그 여자에게 화살이 돌아갈 때 방관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뭔가 바뀌었을까”고 말한다. 동정심을 넘어서 공감하고 행동에 이르러야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본인과 심청이 죽음에 상황에 처하자 모른척하던 부당함을 인정하며 행동한다. 그 방법이 폭력의 미러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집안을 보전하고 싶은 거라면, 가장의 지위를 제게 넘기고 눈을 감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정조를 위한 칼로 장 승상 댁 아들을 살해한다. 본인이 꽃을 즈려밟는 컷은 새로운 비체되기의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을 지르고 스스로 문 밖을 박차고 떠난다. “염병하고 앉았네. 다들 싸그리 망해버려라.”라고 웃으며 뱃길에 오르는 심청 또한 의미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화에서 벗어난 자들은 스스로 비체되는 것을 재전유하며 그들의 의미를 새롭게 한다. 비체되기란 결국 자신들이 지워진 행간을 채워넣는 시도다.

 

도화동과의 작별은 가능한가?


분노는 잠시다. 금방 잊고 만다. 또한 금방 다른 감정으로 전유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 돌풍과, 미투 운동, 워마드 사태, 강남역 살인사건까지 다사다난했던 일들로 호명되는 여성의 수난사 속에서 여성들은 분노했고 행동했다.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의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언술한다.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혐오한다. 여성서사 웹툰이라고 칭해지는 모든 웹툰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체가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페미니즘의 시작이라고 전제한다면 지금은 페미니즘이 득세하고 있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 

상황의 부당함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피해자-가해자의 구조를 취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식이다. 악당과 선한 영웅의 싸움은 서사구조 중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청> 또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요구받는 조건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작가는 젠더 이분법을 전제로 한다.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서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하며, 모든 여성들은 “피해자로서의 동일한 경험을 가진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녀의 심청>에서 남성의 모습은 자존심이 강하고, 무능력하며, 세간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폭력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청이의 아버지, 장 승상의 아들, 마님의 오라버니, 스님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부조리한 사회로 상정된다. 이들 모두가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도식적으로 제시되는 가해자-피해자의 구조는 서사를 이해하고 감정을 파악하는데 수월하다. 그러나 이분법적 구조는 다시 혐오의 사회로 돌아갈 뿐이다.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게 된다. 은유적인 표현과 상황에서 행동을 보고 독자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장치가 필요하다. 

여성 서사가 주요 논의로 대두되자, 혐오와 배제로 공격받는 경우가 많았다. 혐오를 어떤 식으로 배제하면서 여성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녀의 심청>은 현실에서 조금 비켜난 가상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운신의 폭이 더 자유롭다. 여성 서사는 결국 여성들의 불편한 현실을 투영하여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 여성의 서사가 혐오 속에서 변질되지 않고 생존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그녀의 심청>이 의미가 있는 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 뿌리깊은 여성의 차별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있다. 웹툰을 읽으며 생기는 불편한 감정을 마주하고 상황을 인지해야만 한다. 어디에서부터 오는 불쾌인지 성찰하는 것이 여성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마님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마님과 청이가 매회 어떤 식으로 구조를 흔들 수 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이 패(敗)미니즘으로 가고 있는 지금 <그녀의 심청>은 페미니즘의 새로운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청이가 인당수에 빠지고 다시 되돌아온다고 해도 분명 <심청전> 속 심청과는 다를 것이다. 청이의 행보가 궁금한 것은 우리도 여전히 도화동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화동과 작별할 수 있을까. 작별의 방식은 작품을 읽는 우리도 고민해야만 한다. 청이와 마님이 그랬듯 이제 현실에 눈을 뜨고 행동할 시간이다.

 

 

글·한유희
문화평론가. 제 15회<쿨투라> 웹툰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만화평론 공모전 우수상 수상. 경희대 K-컬처 스토리콘텐츠 연구원으로 웹툰과 팬덤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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