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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빼앗긴 돌봄 노동과 뺏긴 돌봄 노동, 그 사이
[장윤미의 문화톡톡] 빼앗긴 돌봄 노동과 뺏긴 돌봄 노동, 그 사이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4.01.02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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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돌봄 노동이 나의 일상을 압도한다는 건

돌봄 노동자가 느끼는 무기력함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돌봄과 자신의 삶을 병행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희미해져 갈 때가 아닐까. 이 질문은 단지 돌봄 노동이 싫다 혹은 부담된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돌봄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인 이상 피할 수 없는 노동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는 이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돌봄 노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짊어진 돌봄 노동으로 인해 나의 일상이 파괴되는 것, 이 예외적이고 비일상적인 돌봄 노동으로 인해 타인과 원치 않는 단절을 경험하면서 맞게 되는 불안과 무기력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때 오는 절망이 두려울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울하지만 돌봄 노동자를 더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건 열과 성을 다해 한 돌봄 노동에 대가가 고작 ‘당신의 부모 자식처럼 돌봐주었으면’하는 아쉬움 내지는 ‘이것이 당신의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돌봄인가?’와 같은 서운함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더 잘해주어야 ‘좋은 돌봄 노동자’로 ‘인정’해 줄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돌봄 노동자가 되는 순간 부과되는 의무는 많아지고 그만큼 마음의 부담 역시 커지게 마련이다. 하나하나 모든 것은 돌봄의 무게를 더하는 것인 동시에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중에서도 아내, 딸, 며느리라는 이유로 무료의 돌봄 노동을 담당해야 하는 이들은 돌봄 노동 앞에서 자신의 일상은 기약 없이 뒷순위로 밀어내야 하는 건 물론 돌봄 노동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가족들은 맡겨놓은 돌봄이라 말할지 몰라도 돌봄 당사자는 빼앗긴 노동이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매몰찬 것일까.

 

2. 빼앗긴 돌봄 노동

이주혜의 장편 소설 자두는 주인공 유나가 시아버지의 간병을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이주혜, [자두], 창비(2020)

유나가 시아버지를 처음 만나러 간 날 그는 “봄꽃보다 반가운 사람이 왔구나.”라며 유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아들인 세진만큼이나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시아버지를 보며 유나는 ‘며느리가 아니라 딸처럼 대하겠다’라는 시아버지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아버지는 유나를 딸처럼 대하면서도 동시에 친딸에게 하듯 함부로 기대지 않는다. 신혼부부를 끼고 사는 건 추태라며 합가를 강하게 거부하며 ‘로맨스 그레이의 현신’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아버지, 타인이 돌봄 없이 완벽하게 1인분의 삶을 해내는 노년의 시아버지의 모습은 유나에게 어쩌면 현실에는 없는 이상적인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암에 걸리고, 타인의 돌봄 노동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하게 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건 당연히 가족인 유나와 세진이다. 물론 언젠가는 아버지를 돌봐야 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방식의 돌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인 탓에 유나와 세진은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다. 그래도 이 혼란만 정리되면 괜찮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돌봄의 무게는 늘어만 갔고, 그 무게로 인해 두 사람의 일상은 쪼개지고 갈라지는 걸 넘어 뭉개지는 상황에 이른다.

유나와 세진에게 가장 먼저 일어난 균열은 일상이었다. 시아버지의 입원과 동시에 유나와 세진의 일상은 말 그대로 조각났다. 아버지의 예상할 수 없는 섬망 증상으로 인해 수면 시간이 조각났고, 돌봄 노동으로 인해 일할 시간이 조각났다. 유나는 시아버지가 잠든 틈새 시간을 이용해 번역 일을 했고, 세진 역시 불규칙한 간병 생활로 몸이 조각난 상태로 출근했다. 돌봄은 가족의 의무이기에 돌봄대로 최선을 다해야 했고,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기에 일대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힘들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할 법도 하지만(대개는 여자가 일을 그만두고 돌봄 노동을 전담한다) 둘 중 누구도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버지를 돌본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 이건 유나와 세진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바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건강 회복만큼이나이 둘에게 중요하고 또 필요한 건, 자신들의 조각난 일상을 원래에 가깝게 되돌려 놓는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아버지의 상태는 기대와 달리 점점 나빠졌고 유나와 세진의 시간과 노동으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타인의 시간과 노동을 빌리지 않으면 시아버지는 물론 유나와 세진의 일상이 파괴되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결국, 유나와 세진은 간병인을 고용하기로 한다. 일급 8만 원의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것만이 돌봄 노동에서 벗어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유나는 기꺼이 비용을 감당하기로 마음먹는다.

간병인 황영숙이 처음 본 시아버지를 무심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며 노련하다는 단어로 평가한다. 노련하다는 말은 일을 잘한다는 뜻도 있지만 익숙하다는 뜻도 있다. 그는 효율적인 간병을 위해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간병과 관계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보호자에게 간병과 필요 없는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는다. 오로지 돌봄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할 뿐이다. 돌봄 노동자를 고용하는 입장에서 돌봄 노동자에게 바라는 건 노련함만큼이나 다정함과 같은 마음이지만 유나는 다정한 돌봄 노동자보다 노련한 노동자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다정함은 가족인 자신이 채워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황영숙의 노련함으로 유나는 이전의 일상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지만 동시에 그의 노련함은 때때로 자신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은 부담스러운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겨우 일상을 되찾았지만 황영옥은 자신에게 돈을 받으면서도 손톱에 메니큐어‘나’ 칠하는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간병인은 불편하니 내보내라는 시아버지의 말은 유나의 마음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자식과 며느리의 돌봄은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타인의 돌봄은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시아버지의 이기적인 모습에 화가 나는 것이다.

병세가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시아버지는 섬망 증상까지 보인다. 그는 섬망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황영옥에게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간 ‘도둑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유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봄꽃보다 반가웠던 사람이었던 유나는 사실 아들을 뺏어간 '도둑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유나는 툭하면 '도둑년' 소리를 내뱉는 시아버지를 보며 자신은 처음부터 철저히 이방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유나는 시아버지-세진과의 관계에서 타자로 위치한다. 유나와 시아버지의 관계가 딸과 친아버지 같은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절대 불가하다. 결혼 초반에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유나와 시아버지 모두 동등한 힘으로 같은 목적을 향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고 시아버지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어쩌면 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시아버지는 유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들 세진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유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이 그를 억압했기 때문에 유나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억압은 섬망이라는 장치를 통해 툭툭 튀어나오는데 틈만 나면 시아버지는 유나에게 내 자식을 빼앗아 ‘도둑년’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또한, 시아버지가 화자로 등장하여 과거 회상하는 장면은 돌봄 노동을 대하는 왜곡된 그의 무의식을 담은 장면이자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회상 장면은 ‘나’(시아버지)가 두려워하고 또 혐오하는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데 그는 자신의 것을 빼앗는 모든 존재를 혐오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남의 것을 훔치면서도 당당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자기 아내였던 숙이는 사실 훔치듯이 데려온 사람이고, 늙어서도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자두는 남의 집에서 몰래 딴 열매였다.  죄책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논리로 죄책감을 철저히 제거한다. 이를테면 숙이를 다시는 울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탐욕스러운 주인의 자두는 먹어도 벌 받지 않는다는 근거로 스스로 죄를 상쇄하는 것이다.

자기 집 마당에 열린 자두를 나누어주지 않는 주인 여자는 탐욕스럽지만 남의 집 마당에 열린 자두를 몰래 훔쳐 먹는 건 행복하다. 사랑하는 여자를 훔치듯이 데려온 것은 미안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들이 있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논리로 그는 유나와 황영옥의 노동을 공짜로 훔치려고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그의 논리를 이해해 줄 사람은 유감스럽지만 피로 연결된 아들 세진 말고는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대신 그런 아버지‘까지도’ 수용하지 못하는 유나와 황영옥을 처벌한다. 황영옥에게는 해고를 통보하고 유나에게는 영옥의 해고를 통보한다. 물론 유나와의 상의는 필요 없다. 가족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기 때문이다. 세진과 시아버지는 진짜 가족이지만 유나는 그들과 진짜 가족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시아버지의 탐욕과 아버지에게서 연민을 떨치지 못하는 아들 세진 앞에서 유나는 결국 폭발한다. 자두를 드시라고 시아버지에게 자두를 들이미는 영옥의 머리채를 잡으며 도둑년이라고 화를 내는 시아버지를 보자 유나는 영옥을 보호하고 시아버지를 밀친다. 때로는 환자의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돌봄 노동자의 일이라고 하지만 보호자가 돌봄을 받는 당사자의 폭력을 저지하지 않거나 두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유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지만 세진은 그러지 못했다. 세진에게 영옥은 필요에 의해 고용된, 그렇기에 고용주의 마음에 들길 노력해야 하는 피고용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이방인 유나와 영옥만이 남는다. 가족으로 불렸던 유나와 숙련자로 불렸던 영옥을 기다리는 건 세진의 처벌이다. 유나는 죄를 짓지 않고도 용서받는 기분과 죄를 짓지 않고도 처벌받는 기분에서 벗어나 수 없다. 아버지-세진의 관계는 아버지-세진/유나 관계에서 아버지-세진/유나-황영옥의 관계로 확장된다. 여기서 빗금 ‘/’ 위에 놓인 것은 주체이고 빗금 아래 놓인 것은 대상이다. 그리고 이 대상은 주체가 규정하는 것에 따라 사회적 위치와 신분이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며느리가 아닌 딸로 대하겠다는 시아버지는 병 앞에서 유나를 자기 아들을 훔쳐간 도둑년으로 취급한다. 그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일정 수준의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인지 능력이 떨어져 발화를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고 할지라도 진심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 유나의 돌봄 노동을 당연히 여기는 것을 넘어 함부로 대하는 시아버지의 행위는 ‘내 아들을 빼앗아 간 못돼먹은 나쁜 여자’라는 판단 아래서 비롯된 결과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것을 훔치는 것, 자신의 돌봄을 위해 타인의 시간과 노동을 훔치려 하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유감스럽게도 시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세진의 분노 역시 이것과 다르지 않다. 세진에게 황영옥은 자본 아래 언제든지 교환 가능한 피고용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황영옥에 대한 세진의 행위가 곧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유나가 결국 세진과 가족 관계를 종료하기로 선언하는 건 그들의 삶에 의해 자신의 삶이 미끄러지는 것을 견디지 않겠다는 저항의 최전선이기도 하다.

 

3. 지치지 않는 돌봄 노동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우리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더 오래 살아야 한다. 이 말은 곧 내가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 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인 동시에 내가 돌봐야 할 대상도 늘어난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돌봄 노동이 힘든 건 노동 자체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대체 인력도, 기약도 없는 ‘독박 돌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동시에 돌봄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적 위로 장치가 필요하다. 돌봄 노동자의 빈자리에 대체 인력을 투입하는 시스템을 다양하게 마련하여 그들의 사적 시간을 확보해 주어야 하고, 동시에 당신이 아니면 이 사람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심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돌봄은 없지만 돌봄 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 될 것이다.

 

*이 글은 [지역 사회 생태계와 청년 문화]에 실린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정하였습니다. 

 

 

글·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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