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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괴물>, 소년들은 죽지 않았다.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괴물>, 소년들은 죽지 않았다.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08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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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쿠로카와 소야)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넨다. 따돌림 당하는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할까. 다른 아이들 앞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던 친구의 사과를 받아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때묻지 않은 마음씨에 감응한 것일까, 류이치 사카모토의 피아노 선율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는 두 아이를 포근히 감싼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결코 흉내 내지 못하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다.

신이 난 두 소년이 창살에 막힌 열차 선로 앞에서 멈춰 선다. “막혀버렸네.” 카메라는 잠시 두 소년을 내버려 둔 채 쇠창살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다. 따뜻하고 푸르른 전경은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기찻길을 향한 선망이 느껴진다. 영화의 독특한 시간성을 고려한다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가 불러일으킨 노스텔지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괴물>은 가닿지 못한 세계를 향한 감독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작품이 아니다. 감독의 시선은 언제나 현실에 닿아있다.

 

망가진 세계

<괴물>의 탁월함은 그 형식에 있지 않다.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으로 반복하며 진실을 점차 드러내는 플롯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조차 중요하지 않다. 삶을 망가뜨리는 무수한 오해 너머, 영화의 정수는 바로 그곳에 있다.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시점으로 서사가 전개될 때 관객은 아들의 학교생활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감정에 이입한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 분실된 신발, 담임 선생님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아이의 폭로까지. 모든 증거가 미나토를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가리킨다. 아버지를 여읜 미나토의 가정환경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가엾은 주인공’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뛰어내리는 이상행동은 럭비선수였다는 아버지의 뇌 손상이 유전된 것은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킨다.

분노한 사오리는 학교를 찾아가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에게 사죄와 해결책을 요구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손과 코에 상호접촉이 있었다.”는 교사들의 터무니 없는 상황설명뿐이다. 사탕을 입에 문 교사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싱글맘”을 운운하자 교무실 내 모든 것이 부조리하게 보인다. 머리 숙인 교사들의 사과마저 머릿수를 앞세운 폭력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사오리는 끝내 공개 사과를 받아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괴물을 찾는 아들의 섬뜩한 노랫말로 가득하다.

 

다시 화재가 일어난 날 밤, 호리는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을 통해 ‘걸스바’에 다닌다는 교사의 혐의가 벗겨진다. 눈빛도 인상도 안 좋은 그는 계속해서 억울한 일에 휘말렸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아끼는 그는 실제로 분노한 미나토를 말리다가 “코와 손이 접촉”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애들보다 학부모를 대하는 것이 더 힘들어진 교사 수난 시대”이다. 초등학교 교사의 학대가 대서특필되고 호리 선생은 차가운 시선과 오물 테러에 시달린다. 열정적인 교사는 끝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듯 학교 옥상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정말 호리 선생의 말대로 미나토는 학교폭력의 가해자였을까? 카메라는 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홀연히 남자를 벗어나 망가진 우리네 세계를 놀랍도록 차분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다시 시점을 돌려 이번엔 두 아이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미나토가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요리를 구해준다. 이번에도 역시나 한 인물을 둘러싼 오해가 풀린 셈이다. 초등학교 교사의 억울한 사연은 소년의 섬뜩한 행동들과 맞물리며 한 아이를 ‘괴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저분한 혐의들과 달리 소년은 악마가 아니다. 오히려 외톨이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죽은 고양이를 묻어줄 줄 아는 마음 깊은 아이다.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던 ‘괴물’마저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놀이로 밝혀진다. 이로써 한 학급을 둘러싼 ‘진실 찾기 게임’이 막을 내렸다. 시간 역행을 거듭하며 관객은 수많은 오해의 공범이 되기도, 증인이 되기도 했다. 이제 우린 카메라가 가리킨 플롯 너머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

 

소년들은 죽지 않았다

산속에 버려진 열차 칸에서 시간을 보내던 두 소년은 문득 우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대. 그러다가 붕괴되면 시간이 역행하는 거야.” 물리학에서 ‘대함몰(Big Crunch)’은 우주의 시작인 대폭발(Big Bang)과 반대로 온 우주가 한 점으로 축소되면서 종말하는 가설을 뜻한다.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발화된 과학 개념을 반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스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단어를 통해 표현된 아이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전쟁을 파괴적이지만, 진작 무너져야 했을 옛 세상이 무너지는 개벽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갖는 것으로 묘사했다. ‘빅 크런치’를 대하는 <괴물>의 두 소년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대격변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모든 부조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희망찬 상황에 가깝다. 세상은 이제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너져 내려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대홍수를 연상하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산사태가 아이들을 위협한다. 하지만 나무가 열차에 부딪히는 소리가 커질수록 소년들의 기대는 커져만 간다. “출발하는 소리야.” 어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재난 속에서도 아이의 순수함은 희망의 빛을 품을 수 있다. 두 소년의 모험을 응원하듯 빗소리가 다시 평화로운 피아노 선율로 전환된다. 어머니와 담임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구조하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열차뿐이다.

비가 그치고 두 소년이 화창한 기찻길을 내달린다. 이전에 카메라가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창살 너머 풍경 속 바로 그 선로이다. 유달리 환상적인 색채로 그려진 이 장면은 언뜻 소년들의 죽음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왠지 소년들이 죽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모호하게 그려진 주인공들의 생사를 구태여 하나로 확정 지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꼭 필요한 작업처럼 느껴졌다. 소년들은 죽지 않았다.

 

세계는 망가졌다.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증오는 손쉽게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교사들의 잇따른 자살을 목격한 한국인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뉴스는 인간이 스스로 빚어낸 재앙을 연신 쏟아낸다. 새로운 법이 날마다 개정된다지만, 또다시 세상은 요지경이다. 현세에 지친 인간은 자연스레 아직 오지 않은 이상 세계를 꿈꾼다. 미나토와 요리도 마찬가지다. 두 소년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시간을 되돌리고자 했고, 비록 환상일지라도 그토록 선망하던 창살 너머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계’는 영 낯설지 않다. “새로 태어난 건가?”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괴물>은 시간을 되감는 행위를 반복하며 감춰진 사건의 진실을 드러냈다. ‘진실 찾기 게임’은 끝이 났지만, 소년들은 플롯의 연장선에서 또 한 번의 시간 역행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놀랍게도 시간 역행 따위는 없다는 뜻밖의 진실이다.

목적지를 잃은 요리는 왜 “다행”이라고 미소 지은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무(無)로 회귀하면 좋은 기억마저 전부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의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에서 밝힌 인생관이다. 어른들이 망쳐놓은 현실에서 어린아이가 희생되는 결말은 서사를 비장하게 완결짓는 훌륭한 연출이다. 하지만 이는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적 정동을 위한 ‘의미 있는 죽음’에 불과하다.

 

교장 선생님(다나카 유코)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만약 행복을 찾기 위해 현실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행복을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제 영화에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은 비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선망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현실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야 학교 옥상에서 호리 선생이 바라본 세상이 그토록 차분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흰 선은 무의미하다. 세상은 한편 오해로 점철된 파국이지만 다른 한편 두 소년이 우정을 쌓을 수 있는 푸른 숲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젠가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꿋꿋이 현실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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