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응자>, 어느 파시스트의 ‘정상’적인 삶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응자>, 어느 파시스트의 ‘정상’적인 삶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16 1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1935)는 1934년 9월 5일부터 10일까지,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나치당의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대목은 70만의 군중(지금 관객은 보자마자 CG라고 생각할 것이다)이 일렬로 빽빽하게 늘어선 장면이다. 여기서 맨 앞에는 나치 문양이 새겨진 세 개의 거대한 휘장이 그 거대한 군중을 압도하고 있다. 때문에 나치당의 주요 인물들마저 아주 작게 보인다. 나치는 대중에게 ‘개인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이므로 더 높은 힘 속에 자신을 용해 시켜야 하며, 이 높은 힘의 기운과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라고 반복해서 주입했다. 그러므로 이 이미지는 압도적으로 강한 외부의 힘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갈망을 자극하면서, 거대한 군중의 일원이 되어야 정상인이라는 강박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사람에게 개인이 더 큰 집단과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을 견디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1970)에서,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 역시 그러한 정상적인 인간의 일원이 되기 위해 파시즘에 순응하게 된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1938년 무솔리니 시대에 정상적인 삶에 대한 열망으로 파시즘을 내면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첼로의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첫 번째 플래시백에서, 마르첼로는 자신의 분신 같은 친구 이탈로에게 “‘정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안정성과 확실성을 주기 때문에 결혼한다”고 말한다. 마르첼로가 ‘반파시스트 색출 비밀경찰’이 되려고 이탈로의 소개로 만나는 대령은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두려움과 돈 때문에 우리에게 협력하는데, 마르첼로는 파시즘에 대한 신념으로 일하려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원하는 대로 비밀경찰이 된 마르첼로는 정상적인 삶에 복귀했다고 느낀다. 다음 장면에서 마르첼로는 이탈로에게 “누가 정상적인 남자인지” 묻는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파시즘을 전파하는 이탈로는 나치가 대중에게 주입했던 내용을 이야기한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발견하고 만족해하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느낌의 사람들은 불신하는 사람. 따라서 정상적인 남자는 진정한 형제, 시민, 애국자이고 진정한 파시스트이다.”

 

마르첼로가 강박적으로 ‘정상적인 삶’에 집착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13살 때 겪었던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소년 마르첼로가 비슷한 또래 소년들에게 추행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운전사 리노가 구원자처럼 나타나 그 곤경에서 빠져나가게 해 준다. 그러나 리노는 동성애자로서, 마르첼로와 성관계를 시도한다. 경악한 마르첼로는 리노가 건네준 총으로 리노를 쏘고 도망친다. 이때 마르첼로는 리노에게 순간적으로 매혹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후 마르첼로는 자신이 혹 정상적인 남자에서 벗어난 동성애자는 아닐까 하는 공포감과 리노를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34살의 마르첼로가 13살에 있었던 사건을 고해성사할 때, 신부는 동성애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이면서 살인보다 더 중죄인 듯 취급한다. 여기서도 마르첼로는 이후 사창가를 드나들었으나 여자들과만 관계하는 정상적인 성생활을 했다고 강조하며, 거듭 결혼을 통해 정상적인 삶을 꾸리고 싶다고 말한다.

 

마르첼로는 정상적인 삶을 위해 줄리아와 결혼한다
마르첼로는 정상적인 삶을 위해 줄리아와 결혼한다

마르첼로가 정상적인 삶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관점에서 부르주아인 부모가 모두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마르첼로의 아버지는 파시즘이 시작되던 시기에 히틀러를 만난 다음 나치에 경도되어 반대자들에게 고문을 가하는 일을 자행하다가 아마도 그 죄책감으로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된 상태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지도 않고 돈만 축낸다고 원망하면서, 운전사를 기둥서방으로 두고 모르핀에 취해 해롱거린다. 마르첼로는 부모 때문에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다며, 아버지를 경멸하고 어머니의 퇴폐적 분위기에 구토를 느낀다.

마르첼로가 정상적인 삶을 위해 반파시스트 색출 비밀경찰이 되려고 제안한 계획은 파리에서 반파시스트 전선의 구심점으로 활동하는 루카 콰드리 교수에게 접근해 그의 조직에 잠입하고 이탈리아 내 연락책들을 밝혀내겠다는 것이다. 마르첼로의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콰드리는 “파시스트 국가에서는 더 이상 철학을 가르칠 수 없다”며 망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반파시스트 색출 비밀경찰에서는 계획을 변경해 콰드리를 암살하라고 명령한다. 마르첼로는 왜 이 잔인한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그는 동성애와 살인을 고백한 고해성사에서 신부에게 “(파시스트) 사회가 나를 용서하길 원한다”고 말한다. 그는 (파시스트) 사회가 요구하는 콰드리의 암살을 시행함으로써, 자신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마르첼로가 갓 결혼한 아내 줄리아와 함께 파리로 향하는 신혼여행에서 수반되는 콰드리 살해는 정상적인 삶의 시작에서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가 된다.

콰드리의 집을 방문했을 때, 콰드리의 아내 안나가 마르첼로 부부를 맞이한다. 마르첼로가 안나에게 즉각적으로 이끌리면서, 그는 시험에 빠진다. 안나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양성애자로서, 그녀가 뿜어내는 관능적인 매혹은 마르첼로가 필사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동성애의 욕망을 자극한다. 마르첼로가 정상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관문에 리노의 분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 치명적인 유혹을 하는 것이다. “안나와 사랑에 빠져 함께 떠나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침울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마르첼로는 활짝 웃는다. 그러나 콰드리가 비밀경찰의 하수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다음 차례가 된 안나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 마르첼로는 마지막 관문 바로 앞에 서게 된다. 감시자이자 조력자인 비밀경찰 만가니엘로와 함께 차 안에서 이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던 마르첼로는 차창을 사이에 두고 안나와 닿을 듯 마주한다. 그는 안나가 필사적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모습을 미동도 없이 똑바로 지켜봄으로써, 마침내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마르첼로를 그토록 오랫동안 은밀하게 괴롭혔던 동성애의 욕망은 제압되고, 만가니엘로의 파시스트 세계, 정상적인 삶이 자리하게 된다.

 

​콰드리의 아내 안나는 마르첼로가 억압한 동성애의 욕망을 자극한다
​콰드리의 아내 안나는 마르첼로가 억압한 동성애의 욕망을 자극한다

마르첼로가 파시스트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콰드리가 1928년에 강의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때문이다. 콰드리를 만난 마르첼로는 그 강의를 언급한다. 콰드리가 “동굴에 갇힌 죄수들이 횃불이 동굴 벽에 비추는 그림자만 보는 상태가 이탈리아의 상황”이라고 하자, 마르첼로는 “그 죄수들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무솔리니 시대에 그림자를 현실로 보는 건 착각이라는 생각과 그림자가 곧 현실이라는 생각(그렇다면 이탈로의 눈먼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의 차이에서, 콰드리는 반파시스트가 되고 마르첼로는 파시스트가 된다. 이 장면의 빛과 어둠(영화 내내 매우 중요한 의미 작용을 한다)의 연출에서,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촬영 솜씨는 그야말로 찬탄할만하다.

 

마르첼로는 안나의 죽음을 지켜봄으로써, 정상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마르첼로는 안나의 죽음을 지켜봄으로써, 정상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파시스트 국가/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리히 프롬의 주장에 의하면, 그것은 비정상이 정상으로 뒤바뀌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매도되는 전도현상에 따른 ‘병리적 정상성’이다. 다시 말해서, 비정상적 사회의 정상성을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콰드리 부부가 암살된 다음 장면에서 시간이 흐른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식이 라디오 뉴스를 통해 알려진다. 마르첼로는 이탈로를 만나러 콜로세움에 갔다가 무솔리니 동상의 머리 부분을 끌고 다니는 군중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를 진짜 충격으로 몰고 가는 사건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 리노를 발견한 것이다. 리노의 죽음을 확신하고, 그에 따른 죄책감으로 콰드리의 암살에 동참했던 마르첼로는 동굴의 그림자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파시스트에게 성찰이나 자기반성은 있을 수 없다. 마르첼로는 파시스트답게 모든 잘못을 바로 타인에게 전가한다. 그는 군중들을 향해 리노가 콰드리 부부의 암살범이라고 고발하고, 이탈로가 파시스트라고 소리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르첼로는 동굴의 죄수처럼 어둠 속에서 쇠창살에 갇힌 듯 보인다. 그는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관객 쪽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는 또 다른 빛이 그 어둠 속에 비쳐서 또다시 그림자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나치즘의 강령 자체가 ‘기회주의’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