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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까뮈의 친구는 왜 소의 발굽에 글자를 새겼을까
3화 까뮈의 친구는 왜 소의 발굽에 글자를 새겼을까
  • 안치용
  • 승인 2024.01.23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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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가 쓰고 싶을 때 나는 라면물을 올린다

Geduld! Geduld! es wird besser werden.

참자 참는 거야 그러면 좋아지겠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시시포스는 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친숙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의 영향이 크지 싶습니다. 족보상으로는 그리스인의 시조 헬렌의 손자이자 아이올로스의 아들입니다. 아이올로스라는 이름은 시시포스 아버지 말고도 그리스신화에 두 명이 더 등장해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합니다. 우리의 단군왕검에 해당하는 헬렌은 그리스 문화나 정신을 일컫는 헬레니즘이란 말의 유래가 된 인물입니다. 고대 그리스를 구성한 주요 부족들은 헬렌의 후손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을 헬레네스라고 일컬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프로메테우스가 헬렌의 할아버지이니, 시시포스는 프로메테우스 가문에 속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생부라는 소문 또한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는 워낙 혼인과 애정 관계가 복잡해 족보상으로 확인되지 않는 혈연이 꽤 많은데 그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꾀쟁이 시시포스

 

까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때문이겠지만 그리스신화를 제대로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시포스는 뭔가 비장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실존의 화신 같은 시시포스의 신화속 이미지는 그리스신화에서 카뮈의 묘사와 달라져서 꾀와 속임수의 대명사로 그려집니다. 언덕으로 돌을 밀어 올리는 비극적인 장면 전에는 속임수로 이득을 취하며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세속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지혜라고 할까요, 꾀라고 할까요, 시시포스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시포스가 아우톨리코스의 도둑질을 잡아낸 일화입니다. 아우톨리코스는 절대로 들키지 않고 훔치는 기술을 타고난 도둑질의 명수입니다. 아우톨리코스가 시시포스의 소 떼를 훔친 뒤 색깔과 모양을 바꾸어 누구의 소인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면서 아우톨리코스와 시시포스 사이의 한판 대결이 펼쳐집니다.

자기 소 떼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 시시포스는 보통 솜씨가 아님을 직감하고 도둑을 잡기 위해 소의 발굽에 칼로 글자를 새겨넣습니다. 아우톨리코스가 시시포스의 계책을 파악하지 못한 채 신출귀몰한 재주로 소를 훔쳐서는 예의 방법으로 색깔과 모양을 바꾸고 안심하고 지냅니다. 그때 아우톨리코스에 들이닥친 시시포스는 발굽에 새긴 글자를 근거로 아우톨리코스로 하여금 도둑질을 자백하게 했습니다. 결정적 증거가 있으니 아우톨리코스로서도 발뺌할 방법이 없었던 거죠.

오디세우스의 임신을 포함한 이후 이야기가 전하지만 개인적 관심은 시시포스가 소 발굽에 새겨넣은 글자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찾아보니, 누구는 이름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문양이라고 하고 심지어 문장을 적었다는 의견까지 있습니다. 전체 소 떼가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으나 소 한 마리마다 시시포스(Σίσυφος)라는 이름을 새겨넣으려면 보통 고역이 아닐 것이기에 이름이나 문장보다는 특정한 문양이 합리적 추론 같습니다. 신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깨알 같은 글씨로 단락에 해당하는 분량을 새기는 것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마법을 사용해서 말이지요. 제 궁금증은 마법이 아닌 시시포스의 땀으로 글자가 새겨졌을 것이란 전제하에서만 유효합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모든 소에다 표식을 새기는 시시포스의 무던함과 끈기입니다. 시시포스에 악명이 따라다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호감을 품게 됩니다. 꾀가 많은 인물이 아니어도 미련하지만 않으면 소의 발굽 네 개 전부가 아니라 하나에만 새겼겠지만, 그 일을 내가 직접 한다고 상상하니 시시포스가 대단해 보입니다. 속임수와 도질질의 고수가 맞붙어서 어느 한쪽이 이겼지만, 양쪽 모두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듯합니다. 아우톨리코스는 귀신같이 훔치고는 소의 모양과 색깔을 바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시시포스는 자기 소를 지키기 위해 하나하나에 일일이 칼을 들이대 무엇인가를 적어넣었습니다. 신화이긴 하지만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데에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이 따른다는 무난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겠네요. 너무 뻔한 교훈인가요.

시시포스 입장에서는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소유인 것을 강력한 적수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이어서 더 비범하다고 해야겠습니다.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을 못 막는다도둑놈은 한 죄 잃은 놈은 열 죄같은 속담을 보면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일화는 일상과 평범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비범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참자 참는 거야 그러면 좋아지겠지라는 인용문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사실 세상사의 태반은 참고 견디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냥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시시포스처럼 소 한 마리마다 발굽에 무엇인가를 새기면서 견디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무위의 견딤은 수행이거나 빈둥거림입니다. 물론 둘 다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자가 아닌 한 무한정 무위의 견딤이 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요.

 

1만 시간의 법칙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소위 법칙입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최소한입니다. 1만 시간은 매일 3시간씩 훈련한다고 치면 10년이 걸립니다. 무리해서 하루 10시간씩 공을 들인다면 3년에 달성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Anders Ericsson)1993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제시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와 아마추어 연주자 간 실력 차이는 대부분 연습 시간에서 비롯하였으며, 우수한 집단은 연습 시간이 1만 시간 이상이었다는 연구 결과를 논문에서 밝혔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에 관한 한 법칙이 맞는 듯합니다. 제 아들이 어려서 바이올린 배우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어쩌다 제가 집에 있을 때 레슨을 받으면 정말 그 소리를 들어주느라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깽깽이 소리였습니다. 소음에 가까운 소리를 오랫동안 내더니 몇 년이 지나서야 음악에 근접한 연주가 되더군요. 초등학생이 경쟁하는 작은 콩쿠르를 나갈 땐 한 곡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모릅니다. 어린이다 보니 힘들어서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고집이 있어서 한 곡을 어느 정도 익혀서는 작은 상을 타기는 했습니다.

초등학생이 취미 생활을 하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노고가 필요한데 프로 연주자가 되는 삶은 오죽할까요. 성인이 된 아들은 그때 바이올린을 중단하지 않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 훈련할 수 있게 격려하고 후원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지 않지만, 과거에 쌓은 노력이 바탕이 돼 조금만 감을 찾으면 간단한 연주는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1만 시간까지 아니어도 적잖은 시간을 들였기에 가능하겠지요.

가끔 보게 되는 발레리나의 발 또한 참고 견디며 시시포스처럼 새기는 삶의 법칙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프로의 이야기이긴 합니다. 저는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끔씩 타인의 글을 읽고 평가하거나 더러 고쳐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두 단락을 읽으면 대충 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못 읽을 글이 있고, 과시욕이 뚜렷하나 깊이 없이 흉내만 번지르르하게 낸 딜레탕트의 글, 프로의 글, 프로 중에서도 정상급 프로의 글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꼰대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성찰과 깊이, 품격을 갖춘 글은 실제로 수십 년 이상 글을 쓴 사람만이 쓸 수 있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글쓰기 연주 등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인 거죠.

인격적으로 또 인권 측면에서 인간은 동등하고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반복적인 노고를 구겨 넣으며 적잖은 세월을 견뎌내고 달성한 특정한 역량에 대해서는 충분히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모두 어떤 분야에서는 프로가 아니던가요.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두 발로 걷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쓰러졌던가요. 우리는 이족보행하는 포유류로서 걷기에 프로입니다. 유사한 사례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발을 접질려서 며칠 집에 머물렀습니다. 나이가 들고 당뇨병이 생기면서 식후에는 반드시 걷는데 발을 아끼느라 못 걸으니 답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제대로 걷는 일만 해도 참 어려운 일이구나, 그렇게 하려고 기억나지 않는 노고를 많이 투하했겠구나, 수고한 발과 다리를 아껴주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발목 보호대를 장만했습니다. 통증이 가시면 다시 걸어야지요. 걸음에서 다시 프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만한 자격이 있기도 하고요.

누구에게나 하던 일 중에 조금 더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더 잘하게 될 것이 많이 있을 겁니다. 하고 싶은 일 중에 전혀 엄두를 내지 못한 일도 있을 겁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듯 무작정 시작하면 됩니다. 성인인 만큼 우선순위가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듯 순위가 정해지면 무작정 해보는 게 어떨까요. 완수하면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나중에 다시 하면 되고, 영영 못 해도 사실 지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1만 시간이 길다면, 시시포스가 되었다 치고 발굽 하나에만 더 새기자는 생각으로 충분합니다. 1만 시간이라는 게 결국 1분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평론가로 영화·미술·문학·정치·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크리티크M 발행인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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