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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의 문화톡톡] 유일신 하느님
[김창주의 문화톡톡] 유일신 하느님
  • 김창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4.02.13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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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구약성서에 신명(神名)은 여럿이다. 누군가 히브리어 성서를 읽는다면 하느님 이름이 일관되지 않아서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쟝 아스트뤽(16841766)은 프랑스의 궁중 의사이며 신학자다. 당시는 성서를 대부분 문자적으로 읽었다. 유대인의 피를 물려받은 그는 창세기를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곧 창세기 1장에 하느님, 2장에는 야웨 하느님으로 신명이 다르다는 점이다. 중세 교회는 라틴어 성서를 활용했으나 엄격한 전례용으로 제한하여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교회개혁운동에 힘입어 성서 원문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며 평신도가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아스트뤽은 중요한 차이를 알아낸 것이다. 그의 독서는 성서 연구에 과학적, 합리적 해석의 초석이 되었다.

구약성서의 신을 이해하려면 방대한 문화자료와 역사를 통해 숙성된 신학적 사유를 들여다봐야 한다. 대표적 이름으로 야웨(יְחוָה> 엘로힘(אֱלֹהִים/)을 들 수 있다. 하느님으로 옮긴 엘로힘은 2,602차례, 야웨는 6,823차례로 압도적이다. 두 이름이 함께 언급된 예는 1,150여 번쯤이다. 그밖에 엘, 엘로하 등이 있고, 형용사와 함께 엘 엘리온(14:18-20), 엘 샤다이(17:1), 엘 올람(21:33), 엘 로이(16:13), 엘 벧엘(31:13) 등등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름 엘이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신명을 되뇌며 그들의 열망을 투영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기독교의 신은 오직 하나유일신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수많은 신의 이름이 성서 안에 오르내릴까?

성서의 하느님은 처음부터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먼저 , 로하(אֱלֹוהַּ/) 등으로 등장한다. 두 이름 모두 단수 하느님이고, 후자는 시의 운율에 맞춘 것이다. 로힘은 복수형이니 하느님들로 옮겨야 하나 단수 취급한다. 고대 이스라엘과 가나안에서 엘은 가장 높은 신이었다. 영어로 옮길 때 대문자 God로 표기하고 이스라엘의 신 한 분을 가리킨다(창세기 1:1; 시편 42:1 등등). 한글 번역은 수에 상관없이 늘 하느님이지만 일부에서는 하나님도 통용된다. 엘로힘이 이교의 신들을 뜻할 때는 영어 gods로 표기한다(출애굽기 20:3; 신명기 32:37; 시편 82:6). 문제는 구약의 최고 신 엘과 다신을 뜻하는 엘로힘이 한 구절에서 언급되는 예도 있다. “나는 엘(God)이다. 나 외에 다른 엘로힘(gods)은 없다”(이사야 46:9). 신학적 변별력이 필요한 경우다.

이렇듯 구약성서의 신명이 다양을 넘어서 혼란스럽게 언급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신 경험의 자리가 각각 다르고 인식의 척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으신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 영원한 하느님 등에는 개인의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된 신 인식이 반영되었다. 여기서 하느님은 모두 단수다. 그러나 역사의 진행을 따라 이스라엘은 제의공동체로서 신에 대한 사유를 거듭하는 동안 어느 시점에 큰 진전이 일어났다. 즉 개인의 경험을 단수 에 가두지 않고 복수 엘로힘에 신의 본질과 핵심을 담은 것이다. 이상하게도 체험자를 복수, 곧 공동이나 집단으로 묶지 않고, 고백의 대상을 복수화시킨 엘로힘을 단수로 여긴다. 한 사람의 신이나 부족 신으로 국소화하지 않는 대신 보편성을 확보하여 포괄적 복수 엘로힘에 투영한 것이다. 이렇듯 엘로힘 복수에서 다신론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으나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신의 본질로 사유한 결과다. 천재의 창안이라기보다 오랜 전승을 숙고하며 추출한 신학의 정수다.

 

조하리의

인지심리학 모델 조하리의 창은 히브리 신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래 인간관계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론이어서 고대 히브리 신관에 적용하면 시대착오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의식의 영역을 다룬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발전시켰는지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조력자다. 우선 사람의 시각과 인식에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신은 엘로 표명되었다. A는 모두가 알고 D는 아무도 모른다. BC는 사각(死角) 때문에 부분적이다. <D야웨는 나중에 다룬다.>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대로 신 경험은 짧고 형언하기 어렵다. 그러니 하느님의 전모를 알 수 없으며 묘사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스스로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한다(출애굽기 33:19; 이사야 45:15). 드러내는 하느님(Deus revelatus)감추는 하느님’(Deus absconditus)이다.

 

A

 

 

 

open

B

 

엘리온 올람 로이

 

 

blind

C

 

이스라엘 가브리엘

다니엘 라파엘 미가엘

 

 

hidden

D

 

 

야웨 에흐웨

 

 

unknown

 

엘로힘은 조하리의 창에 드러난 이름(A+B+C)알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는D까지 모두 반영한 이름이다. 문법적 복수를 취하되 한 하느님단수로 간주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히브리 신앙은 역사적 구원 경험과 조상들의 신 체험을 기억하고 전승하였다. 하느님을 깊이 숙고하고 신학적인 내면화를 거듭해온 것이다. 그렇다고 바하이교(Baha’i )처럼 주요 전승들의 총합을 취한 혼합종교나 다신교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 신화처럼 여러 신들 가운데 제우스를 으뜸 신으로 여기는 신관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이 보여준 개별적 체험의 핵심과 전승의 본질을 냉철하게 사유하고 신학적으로 걸러냈다. 한 하느님(the God)이라는 결론이다. 이른바 유일신이다(신명기 6:4; 스가랴 14:9). 그들은 일반명사 엘의 복수 엘로힘에 총합이나 신 중의 최고 대신에 단 한 분하느님을 끌어낸 것이다. 구약성서가 엘로힘에 반영한 신학적 중요성 및 인류학적 의미는 중차대하다.

첫째, 엘로힘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은 물론 이념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보통 신 체험은 당사자에게 허락된 유일회적 사건으로 둔갑하기 쉽다. 그러니 과장이 일어나고 사유화하며 국소화(局所化)시켜 숭배한다. 지금도 계시를 내세우며 절대화하고 사당을 세워 신을 독점하려는 이들이 행세한다. 이 점에서 한글 하느님은 하늘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모두의 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특정 공간을 지칭하기 때문에 그 한계 또한 여전하다. 이스라엘은 개인적 경험에 덧씌워질 수 있는 거품을 거둬내고 계시의 핵심과 본질을 추출하여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것이 곧 유일신론의 핵심이며 신학적 성취랄 수 있다, 참신이라면 한 사람이 독차지할 대상이 아니며 더구나 밀폐된 사당에 가둘 수 없다.

둘째, 엘로힘은 탁월의 복수(Pluralis Excellentiae). 문법에서 복수는 단수의 집합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탁월의 복수는 단수의 대조항이 아니라 대표성, 강렬함, 최상급이다. 왕의 복수(royal we)와 흡사하지만, 복수를 통하여 다수 또는 전체를 뜻하지 않고 본질이자 핵심을 가리킨다. 엘의 어원에 앞에 있다’(to be in front)는 뜻이 들어있다. 따라서 엘로힘은 문법적 복수에 매이면 곤란하고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하느님의 정체성, ‘앞에 계신 분에 맞춰야 한다. 그것은 곧 신성이자 신격이다. 이스라엘은 역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하느님을 특정한 개인, 영웅이나 계시자의 개인적 영역으로 가두지 않고 공동의 유익과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 곧 삶의 본질이다. 순수한 사랑, 공평, 질서, 평화, 이해, 지혜, 기쁨 등이 수없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엘로힘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동족어이고 자매어다. 아람어 엘라하(אֱלַהּ/)는 아랍어 알라(الله)와 히브리어 엘, 엘로힘과 비슷하다. 공통적인 엘은 고대 가나안에서 창조의 신, 인류의 아버지, 만신전의 왕, 태풍의 신, 최고의 신이다. 영어 God은 고대 독일어 Gott에서 나왔다.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스(675-754)는 독일 선교 과정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을 좋은(gut) 이라며 Gott로 소개하였다. ‘엘라하는 존재의 본질, 삶의 핵심을 뜻한다. 하느님은 고대인들이 두려워 떨던 보복과 심판의 신이 아니며 개인의 수호신이나 부족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명명하고 한 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은 그분의 이름에서 공동의 가치와 보편적인 세계관을 찾았기 때문이다. 공자에 의하면 그것은 인, , , , 신 등이다.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을 녹여 신명 엘로힘으로 상정한 것이다.

엘로힘은 세상 모든 곳에서 하나’(uni)의 원칙, 하나의 인간, 하나의 목표, 하나의 생명을 위해 일한다(verse). 그가 곧 우주(universe)를 창조한 주인이다. 하느님은 비국소적이다(이사야 57:15; 예레미야 23:23-24). 국소적이라면 공간에 붙잡히고, 개인에 휘둘리며, 정파나 이념에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엘로힘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보편적 가치를 찾고 공적인 유익을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엘로힘은 역사 지성, 곧 히브리 신앙이 일궈낸 신비로운 이름이다. ‘축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인류 정신의 기둥을 세운 신앙과 지성의 성취다.

장미를 어떻게 부르든 그 향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넘지 못한다.” 줄리엣은 참사랑을 알았으며, 소쉬르는 진리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엘로힘을 무엇으로 명명하고 어떻게 표현하든 신의 본성과 핵심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신명이 바뀌어도 인류가 염원하는 신성과 히브리 신앙들이 추구하던 신격은 다를 바 없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생명, 한 우주를 창조하셨다. 온 우주와 만물은 그 하나의 원리를 따라 이 순간도 움직인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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