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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의미한 규제로부터 포획된 청년들 <바보들의 행진>(1975)
[이하늘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의미한 규제로부터 포획된 청년들 <바보들의 행진>(1975)
  • 이하늘(영화평론가)
  • 승인 2024.05.0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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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을 걷던 1970년대의 영화에 작은 빛으로 생기를 불어 넣어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은 ‘바보’라는 대상을 형상화한 공허한 청년들을 다룬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에 갇힌 병태와 영철의 무력감과 어긋난 사랑을 보여주는 <바보들의 행진>의 오프닝에서 하길종 감독은 극중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을 대신해 은유적으로 선언한다.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는 병태와 영철의 몸은 정상과 비정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장면은 흘러가듯이 느슨하게 연출되어 있다. 발가벗겨진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잣대를 두어 판단하는 어른들 앞에서 그들은 반항할 수 없으며 나약하다.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게 된다. 이는 <바보들의 행진>이 이후에 진행될 방향성이 시대의 폭력을 시작한 지도 모르게 받아들이는 당시의 1970년대 유신정권 체제의 벗어날 수 없음을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상기시킨다.  

 

족쇄에 발이 묶인 채, 뛰는 한국영화의 달리기

 

1970년대 한국 영화는 몰락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한국 영화가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유신시대의 영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말로는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어디에서도 민주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면적인 통제와 이데올로기적 교육이 횡행했다. 도시락 검사, 신체검사 등 초등학교의 숱한 검사에서부터 거리의 단속이 일상화되었고, 조국근대화와 자주국방을 모토로 새마을 운동, 민방위 훈련이 전쟁처럼 행해지던 병영체제였다.” 그러나 유신 체제와 함께 발전한 경제성장과 대중문화의 발전은 청년들의 문화생활을 뒤바꿨다. “1960년대 젊은이들이 물들인 검은 군복에 『사상계』를 읽었다면, 1970년대 젊은이들은 청바지를 입고 대중소설을 읽었다. 청바지·통기타·생맥주를 즐기는 장발의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은 <바보들의 행진>에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와 함께 두발 단속을 피하는 병태와 영철의 달리기로 혹은 '학생답게'를 외치는 경찰과 교수, 지나가던 행인들의 행위와 통금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더욱이 대학생을 폄하하는 어른들은 이상향으로 점철된 프레임에 그들을 끼워 넣는다. 하지만 하길종 감독은 미팅을 가는 병태와 영철이 목욕탕에서 벗은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씻는 모습을 카메라가 빈틈없이 좇아가거나 영자와 병태가 테니스를 치고 난 이후에 샤워하는 과감함을 통해 주체적인 자아상을 드러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거칠고 불규칙한 영화가 되어버린 <바보들의 행진>은 불균질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이미지의 파편적인 구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하길종이 속해있던 ‘영상시대 그룹’과 연관되는데, “이들은 ‘새 세대의 영화’를 모토로 내걸고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와 프랑스의 뉴 웨이브(누벨바그),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를 모델로 하여 집단적인 발언을 시도”했다. 영화에는 실제 대학생들이 출연하기도 하고, 뉴웨이브의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 달리는 모습이 변주된 형태로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장  뤽 고다르의 <쥴 앤 짐>(1962)의 루브르 박물관 달리기와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에서 소년이 바다를 향해 달리는 트레킹 샷은 닫힌 프레임으로 공간의 확장을 제지한다. 그런가 하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끈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에서도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은 결혼식장을 향해 달린다. 한국영화 평론계의 거목 이영일은 “<바보들의 행진>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나오는 달리는 청년류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미완성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감각적으로는 새로운 세대를 그려냄으로써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했다. 때문에 새로운 공간을 향해 도달하려는 움직임은 끝내 이상적인 공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내부에서 튕겨나가는 공통점을 지닌다. 앞서 설명한 두발 단속하는 경찰을 피해 달리는 병태와 영철은 결국 육교의 양옆으로 가로막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뛰었던 뜀박질은 그 추진력에 급브레이크를 거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일정한 요구를 진행했던 박정희 정권 아래의 상황은 국민을 정부의 아래에서 길들이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정해진 규율은 청년들로 하여금 반항하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시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바보들의 행진> 속의 인물들은 허상과 허구를 좇아 의미 없는 움직임을 지속한다. 극 중, 병태와 영철은 철학을 전공한다. 초반부 교수는 예술에 대한 담론에 대해 “플라톤의 이론은 예술이 이상 국가를 이루는데 무용지물”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예술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는 필요한 허구가 이상을 유형화”한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때, 교수의 목소리는 오프 스크린으로만 등장하고, 수업을 들을 것이라 추정되는 학생들의 얼굴이나 반응은 일절 노출되지 않는다. 학교의 전경과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집단을 카메라는 조명할 뿐이다. 자연스레 우리는 매체 앞에 선 정치인들의 일방향적 소통 앞에 국민들을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사실상 이데올로기와 예술의 접합 지점은 시대의 경향성을 보여준다. 병태는 미팅에서 만난 영자가 하는 연극을 보러 가게 된다. 연극을 준비하면서 시험을 망친 영자는 학점을 완전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교수 앞에서 아양을 떨면서 성적을 정정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데올로기와 예술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한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 연극이 끝난 이후의 상황에서 영자의 표정을 잡는 카메라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영자가 맡은 하녀 단역은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데,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감이 영자의 표정에 새겨진다. 예술은 이처럼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선택할 수 있는 무게감을 지닌 시대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답을 구할 수 없는 공허한 공간 

 

반복적으로 나오는 유흥을 즐기는 술집은 삶의 의미에 답을 구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소음으로 묻히도록 한다. 병태와 영철이 관심 있는 여자를 만나는 장소이자 대학 술 경합대회라는 무모함과 수업을 마치고 습관처럼 방문하는 공간이다. 도피처이자 현실의 물음들을 쉽게 나열할 수 있지만, 답을 내려주지 않는 물음표 가득한 곳이었다. 주목할 점은 술집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감독의 시선이다. 술집 안에서 이뤄진 영철과 순자의 만남은 순조롭지만, 소통이 순환되지 않는 가로막힘이 존재한다. 하지만 개방된 야외에서의 병태와 영자(이영옥)는 술집 밖에서 만나게 되고, 동행을 하면서 연속된 움직임과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 이는 두 커플의 방향이 다르게 전개됨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다. 

영화 속 멜로 코드는 병태와 영철의 서사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면서 동시에 비극으로 가는 통로를 제공한다. 영자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병태에게 관심이 가지면 애써 밀어낸다. 3년간의 병역과 철학과를 재학 중이라는 이유로, “여자는 나이가 재산이야.”라는 말로 거리를 두면서 병태의 세계 안에 온전히 진입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연인처럼 행동하는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공공연하게 선포하면서 무력감을 자아낸다. 병태와 영자가 노는 공간을 살펴보자. 사방이 탁 트인 허허벌판의 언덕은 환상처럼 보이며,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과연 두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한다. 규제나 규탄이 없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야 비로소 웃고 떠들 수 있는 상황은 중심지가 아닌 외부로 벗어나야만 짧은 시간의 행복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1984)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혜영(이보희)의 죽음을 동철(김명곤)과 육덕(이희성)은 텅 빈 언덕 위에서 되돌리려고 한다. 혜영의 축 늘어진 신체를 자신의 몸으로 일으켜 세우려는 동철의 애처로운 몸짓은 죽음을 인정하기 힘든 거부의 제스처로 보이지만 끝내 맥없이 쓰러지고야 만다.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거대한 지닌 시대의 무게는 1980년대에 넘어와서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코드이다. 소외된 계층의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으며, 반복적인 행위에 동철과 육덕만 지칠 뿐이다. 이는 학교의 언덕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과의 축구를 응원하는 영자의 모습은 병태의 시선에 들어올 수 없으며, 대학 술 경합대회가 끝난 이후에야 병태와 영자는 온전히 서로를 응시할 수 있다. 영자가 병태에게 친구들을 소개하면서 쥐여준 돈은 병태의 자존심을 깎아내리고, 포장된 이미지로 집단 안에 속해있도록 강요하고 요구한다. 결국 병태는 영자의 친구들 앞에서 돈이 많은 호탕한 남자친구처럼 소개된다. 현실은 시계를 전당 맡겨야만 하는 정반대의 상황임에도 말이다. 언덕이 시대의 탄압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에덴동산을 짓는 일이라면, 공동묘지는 결국 그 동산에서 목숨을 연명하고 살지 못하는 생명의 단절을 상징한다. 병태와 영자는 공동묘지 앞에서 꿈을 이야기한다. 꿈과 죽음은 같은 선상에 놓이기 어려운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의지를 마음껏 표출할 수 없는 무감각으로 살아야 하는 공간에서 죽음은 인과관계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청년들은 살기 위해 꿈을 무력으로 눌러야만 한다. 

 

사회 안으로 귀속되는 움직임과 내쫓기는 죽음 

 

이러한 강압은 나라의 명령에 군대를 가는 병태의 상황과 접합한다. 사실상 영자가 병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이유는 개인의 솔직한 마음 이전에 시행된 국가의 통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자는 그것을 이길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입영열차를 타고 군대를 떠나는 병태와 열차의 바깥에서 따라가는 영자의 모습이다. 병태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하차할 수 없고, 시끄러운 경적음과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들은 병태와 영자의 대화 사이의 거대한 벽으로 자리한다. 영자는 병태에게 입맞춤하고, 높이 차이로 인해 간극이 발생한다. 달리는 열차와 멈춰서 입맞춤하는 모습은 동일선상에 있을 수 없고, 영자와 병태는 위태롭게 마음을 전한다. 

병태의 친구인 영철의 상황은 정반대에 가깝다. 둘의 차이를 운동성을 중점에 두고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영철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은 실패자이며 아무것도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 없다고 허탈한 마음을 곳곳에 뿌려 놓는다. 아버지 앞에서 말을 더듬으며 용돈을 부탁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고래를 잡는 이야기만 주구 창창 늘어놓기도 한다. 영철은 어리숙하다. 영철은 결국 고래를 잡기 위해서 동해 바다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영화는 그런 영철을 응원하듯 송창식의 '고래 사냥'을 함께 동행하도록 한다. 자전차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영철을 따라가는 카메라와 주변의 풍경은 영철을 감싸고 있던 도시에서 점점 시골로 변화한다. 마침내, 동해바다 앞 주상절리에 도착한 영철은 자전차를 멈춰 세우고 파도가 요란하게 일어난 바다를 응시하고, 자전차를 탄 채로 바다 안으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제도권의 바깥으로 도망친 영철의 움직임이 외부로의 죽음이라면, 병태의 움직일 수 없음은 사회 안으로 귀속되며 생존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고래인 것일까? 실체 없는 허상과도 같은 존재를 찾으려고 하는 태도는 영철이 선택한 철학의 본질과 연결되면서도 묘사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감정들과 연결된다. <바보들의 행진>은 원작자이자 각색가인 최인호의 또 다른 작품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 역시 <바보들의 행진>에서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꿈이나 믿음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은 쉽게 잡을 수 없는 것을 표상한다. 당구장에서 영철과 병태, 그의 친구들은 한 가지 내기를 한다. 신문을 파는 소년에게 돈을 건네주고 밖에 나가서 신문을 사오라는 것이다. 건넨 돈의 액수는 신문을 바꿔오더라도 많은 금액이 남은 상황이다. 영철을 제외한 친구들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영철만은 다르다. 소년을 믿으며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보이지 않는 믿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나타나지 않은 소년을 기다리는 영철의 간절함은 다소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등장한 소년은 영철의 굳은 믿음을 지켜준다. 

고래 역시 보이지 않은 믿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철이 포획하려던 고래는 1970년대 제도권 안에서는 잡기 힘든 추상적인 마음들이다. 앞서 언급한 소년은 앞으로 자라날 세대의 희망을 상징한다면, 고래는 실체는 없지만 존재하는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을 뜻한다. 영철의 자살은 한편으로 비극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철이 행한 유일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실패한 바보, 쪼다 같은 인생으로 치부했던 영철에게 자전차를 타고 파도에 뛰어내리는 행위는 바보라는 프레임을 뒤집는 행위다. 안타까운 점은 젊은 청년을 파도가 치는 절벽으로 밀어붙인 기성세대의 권력이자, 끝내 포획 당하고야만 비극적인 엔딩이다. 

 

 

참고 및 인용

강성률, 「영화로 보는 우리 역사 ① <바보들의 행진>과 유신시대 - 이길 수 없는 시대에 저항한 두 젊음」, 『문화로 역사 읽기1』, (2005.03)

강성률,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 바보』,이론과 실천, (2005.04)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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