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이인숙의 문화톡톡] 탐욕과 오만의 탑
[이인숙의 문화톡톡] 탐욕과 오만의 탑
  • 이인숙(문화평론가)
  • 승인 2024.05.13 10: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대 바벨탑(Babel Tower)은 인간의 교만과 오만, 자만심으로 야기된 사건이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바벨은 히브리어의’뒤섞다’’혼란’이란 의미의 발랄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창세기 11장에”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시기 11:4)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인간들이 자신의 힘을 너무 믿어 오만해져서 신에게 도전하고, 나아가 신을 넘어서려는 인간이 교만으로 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탑을 쌓아 올려 하늘에 닿으려 하였으나 신은 두고만 보지 않았고 인간이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렸다. 탑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를 쓰던 인간 세상을 흔들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여러 종족으로 나누어 버렸다. 이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한 언어로 소통하였으나 바벨탑 사건 이후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 소통의 어려움이 시작 되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높이만큼 올라가기를 기대하며 계속 쌓아 하늘에 닿고자 하는 야심을 본 하나님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들의 오만과 교만을 두고 보지 않았다. 인간의 말을 제 각각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는 '바벨'(Babe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고대 성경의 바벨탑 이미지
고대 성경의 바벨탑 이미지

바벨탑 사건을 성경책에 나오는 이야기 이거나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현실적이지 않는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지만 단 하나, 선악과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었던 에덴동산을 떠나야 했다. 노아의 방주 사건 또한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씻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징벌이었고 이 또한 인간의 타락과 교만에서 비롯 된 사건이다. 노아의 방주 이후 인간은 하나님 앞에 교만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반복되는 타락과 오만으로 바벨탑 사건을 겪게 된다.

아담과 이브사건, 노아의 방주 사건, 바벨탑 사건을 살펴보면서 이 시대 인간의 욕심, 탐욕으로 인한 또 같은 사건이 펼쳐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 세대에 들어오면서 부쩍 심해진 자연재해나 이상기후, 생물 다양성의 파괴, 환경오염, 심상치 않게 번져가는 전쟁, 이해 충돌과 소통의 부재 등 삶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우리들을 불안하고 걱정스럽게 하고 있다.

 

신 바벨탑 시대

코로나를 겪으면서 지구전체의 위기와 단절, 고립을 경험하면서 정보 문화와 과학기술의 발달에의존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 졌고 그래서 사람간의 소통 보다는 매체를 이용한 소통이 더욱 편리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간의 소통은 더욱 어렵고 세대 차(世代差), 신 문맹(新 文盲)의 출현, 여론몰이, 정보 왜곡 등의 현상이 더욱 사람 사이의 불 평등과 부조리를 발생시킨다. 세대 차는 이제 나이나 각 세대가 가지는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다. 이제 의미조차 이해 못하게 하는 각종 신종어의 출현은 사전에도 없는 말들로 그들 만의 세계를 만들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너지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차별하는 문화의 출현, 그리고 매체를 다루기 어려운 세대들의 겪는 생활상의 어려움과 더는 사회에서 불필요하고 성가신 존재로의 취급을 당하고 있는 상황, 이는 세대 차 및 삶의 방식의 변화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또 다른 차별이다.

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조사에는 읽은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 못하는 실질문맹률이 무려 75%에 가깝다고 한다. 이는 언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면 이해하려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새로운 풍조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대는 손안의 핸드폰만으로도 세계의 정보와 지식 다양한 뉴스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속도와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영화, 공연, 정보, 지식, 쇼핑 모두 핸드폰 하나로 다 해결되는 세상이다. 더구나 세계 어느 나라의 언어든 번역기를 통해 불편함 없이 소통하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문자 및 메일을 다른 언어로 보내고 받는다. 해외 어느 곳으로의 여행도 그렇게 망설여 지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같이 글로벌시대,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는데도 듣는 이에 따라 다 다르게 듣고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 밖에 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듣고 싶은 이야기만 선택적으로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대화는 분명 마주대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상대를 알아가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내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것이 대화 인데 서로 허공에 대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는 우리의 이상한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왜 일까?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대화, 우리는 이미 대화의 방법을 모르게 된 것 같다. 소통과 이해가 없는 대화는 배려와 겸손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단지 한 국가의 문제 만은 아닐 것이다. 국가 간의 자국우선주위 내지는 이기주의는 개인간의 이기주의를 자극하고 또 다른 갈등과 불만으로 삶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집단이기주의, 자국우선주의는 자기 국가나 단체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들에게 더불어 함께 하는 인류의 더 이상은 없다. 다른 나라와 경제적, 권위적 차이를 정당화하며 차별을 심화시킨다. 직. 간접적인 횡포와 착취, 격심해지는 빈부의 차를 조장한다. 때론 이러한 차별을 여론을 통해 정당화하며 전쟁의 명분으로도 구체화시킨다. 한 나라의 왜곡된 지도자나 그 주변의 무리들은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야망이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희생대상을 만들고 또 과감하게 제거함으로 그 국가의 애국주위와 과시와 권력을 챙긴다. 이로 인해 생기는 무모한 희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개인의 삶을 처참하게 무너트릴 수 있는 권한이 도대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가?

모양은 있으나 내용은 없는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있는 99개의 축복에 만족 못하고 나머지 한 개 까지도 탐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에덴동산을 잃은 아담과 이브처럼 그 과오를 현 세대가 또 다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

자연의 무분별한 개발과 과소비,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의 오만이 환경을 점점 황폐하게 했고, 그로 삶은 더욱 비참해져 가며 사람간의 의심과 갈등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해(害)하는 시대가 되어 간다. 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총기 사용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 갔고 주위사람들을 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한다. 자연환경은 점점 인간의 생존 마저 위협할 정도로 가뭄과 홍수, 태풍과 지진, 해일과 극심한 오염으로 삶의 터전을 앗아간다. 그래도 개발과 훼손은 멈추지 않는다. 이미 미래를 애기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 버린 것 같은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 아직도 인간은 발명과 발전이라는 명분아래 마치 인간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과신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끝을 모르고 돌진하는 무모함을 알지 못하는 무감각한 인간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모함은 오만함을 동반한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한다고 하는 많은 일들의 부작용을 지금 세대에 우리가 제대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익선 백남준 1988, 국립현대 미술관 소장
다다익선 백남준 1988, 국립현대 미술관 소장

무분별한 정보의 다량의 공유는 순간의 홍수 같이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흩어 버렸다. 마치 또 다시 노아 때 홍수의 심판이 우리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소통과 자유, 속도와 편리함 속에서 다른 어느 세대 보다 다양한 기술과 장비와 도구가 있음에도 이방인처럼 각각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과의 만남과 소통이 아닌 온라인 선상에서의 누군지도 모르는 다량의 사람들과 다량의 정보를 공유하며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정보 문화와 과학기술은 세계적 공유와 소통하기 쉬운 여러 장치들을 개발하고 이용하지만 어쩌면 이미 우리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나 뜻이 서로 다른 체계로 흩어져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다. 마치 현대 시대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처럼…

 

 

글·이인숙
문화평론가, 교육학박사, 문화예술경영전공. 현재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부 공연예술전공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한국ESG위원회 공연예술위원회 위원장, 중국북경수도사범대학교과덕대학공연예술대 부학장역임, 청주 문화산업진흥재단 이사를 역임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 한국연기예술학회이사, 한국미래춤협회 이사, 한국무용과학회 이사, 국제문화예술교육교류협회회장, 청주시 도시문화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