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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진창을 뒹굴어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 <대무가>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진창을 뒹굴어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 <대무가>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5.20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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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을 흥(興)으로 바꾸는 것이 굿이라면, 굿은 삶을 뒤집는 페스티벌이다. 어떤 소리가 들리든,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혹은 어떤 퍼포먼스가 진행되든, 굿의 본질은 지금의 나를 또 다른 나로 바꾸는 작업일 것이다. 이를 원하는 것이 굿을 행하는 자가 될 수도, 의뢰한 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 <대무가>는 굿을 행하는 무당의 간절함에 주목한다. 무당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신빨이 떨어져버린 이들, 애초부터 신빨 조차 없던 이들은 무당이 되기 위해 굿을 벌이고 여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흥미롭다. 신빨을 불러오는 것이라기 보단 스스로의 삶을 점검하여 다시금 무당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대무가>는 현재 자신을 놓아버릴 수도 있는 이들이 어떻게 다시금 스스로를 되찾아가는지를 흥을 통해 보여준다.

크게 보자면 영화는 신남(류경수)에게 찾아온 윤희(서지유)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을 불러 재개발 지역의 이주계약서를 찾고자 하는 것을 주요 사건으로 둔다. 신내림을 받긴 했으나 ‘신빨’은 떨어지는 신남은 몇 가지 정보로 윤희에게 굿을 하도록 유도해 돈을 벌고자 했으나 이는 오히려 신남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고, 학원을 함께 다니던 청담도령(양현민)은 신남을 구하기 위해 분투한다. 결국 신남과 청담도령, 그리고 윤희와 함께 하던 마성준(박성웅)은 등 세 명의 박수무당은 재개발 지역을 맘대로 주무르려던 익수(정경호) 일당을 몰아낸다. 이들의 분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예의 그 굿을 벗어나는 리듬과 분위기로 흥미로운 ‘난장’으로 형상화된다.

 

이처럼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줄거리는 사실 영화가 흘러가는 길을 잡아주는 것일 뿐 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영화는 세 명의 무당, 그것도 자신의 신도 목표도 잃어버린 이들에 집중하며 이들이 스스로의 ‘대무가’를 완성해가는 것을 끈질기게 훑어간다. 신남은 취업준비가 여의치 않자 알바를 전전하다 ‘정년’이 없는 ‘블루오션’ 사업인 무당이 되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신내림을 받긴 하지만 영 신통치않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수강생 청담도령이다. 청담도령은 과거 외모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선수’였지만 자신을 찾는 여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주는 이로 업소의 에이스였다. 그러나 이를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또 다른 직업인 무당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길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성준을 만나며 신빨을 잃어버린다. 마성준은 과거 잘나가던 무당이었으나 순간의 실수로 신빨을 잃고 거의 알콜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로 이제 누구도 그를 불러주지 않는다. 

이들의 설정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실패한, 혹은 모두가 원하는 길을 벗어나 어딘가를 배회하는 이의 것이다. 이들을 바라볼 때에 어딘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뛰고 소리치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무당학원의 수강생을 훑으며 시작한 <대무가>의 의도와 맞아 떨어질 것이다. 이 학원의 수강생들을 볼 때에 재미있으면서도 크든 작든 경멸 혹은 황당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을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일반적으로 도달할 수 없거나 혹은 도달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 영역에서까지 배우고 인정받아 자리잡고 싶어하는 이들을 통해 그들의 간절함에 집중한다. 루저이든 찐따이든 흙수저이든 간에 일단 간절하게 달려들어보자는 것, 무작정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달려들어 접신해보자는 것, 바로 거기에 <대무가>는 집중하는 것이다.

 

큰 무당이 돕는 노래라는 뜻의 ‘대무가’(大巫歌)는 그 탄생부터 역설적이었다. 이때의 ‘큰 무당’은 신내림을 받지 못한 채 큰 무당이 된 자신의 부인을 보필해야 하는 백봉선생(윤경호)의 스토리에서 시작한다. 백봉선생은 자신만의 수련을 통해 신내린 무당보다 죽은 이의 혼을 더욱 강력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비기를 완성하고 이를 알리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녹음본만 남긴 비운의 인물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남긴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절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야만 접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 내려놓고 달려들고 고백할 수 있는, 지금에는 용기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이 까발림이 있어야만 어떤 경지를 넘어선다는 것, <대무가>의 중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쪽팔리더라도 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돈이 얼마나 절박한지, 자신이 얼마나 무시받는 ‘선수’였는지, 어쩌다 망가졌고 얼마나 부끄러운 무당이었는지. 이 모든 것을 쏟아낸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는 결국 되돌아보고 싶지 않아도 나를 이룬 것들을 인정하며 살아나갈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왜 ‘누님들’이 오는 곳은 ‘형님들’이 가는 곳보다 단속이 자주 뜨는지와 같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있더라도, 진짜 살고 싶다면 완성해야 할 것은 결국 나를 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대무가>는 모두가 알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은 이 과정을 접신과 같은 경지로 밀어올리고자 했다.

 

모든 문제가 결국 내 안에서 이해하고 인정할 때 완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이 이야기는 내 손을 떠난 일들이 나를 공격할 때에 떠올려볼 수 있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마치 신남이 도무지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지 않은 때 대무가를 완성하기 위해 혼이라도 만나보려 했던 것처럼 정말 얼토당토 않는 무엇이 어디선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 <대무가>가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던 무속과 젊은이들의 열정을 연결했던 것처럼, 또 신이 씌는 것조차 자신의 간절함이 들어가야 한다는 설정에서부터 굿을 장면화하고 강렬한 음악을 선택해 익숙한 무속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인물들의 연기가 전혀 전형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대무가>는 무속의 원천이 되는 ‘위로’를 이렇게 실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무가>(2022)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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