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동안, 빛나라/ 결코 그대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마지막을 청할 테니.“
- 세이킬로스의 비문(BC 2~1세기?) -
누리 달의 프랑스 롤랑가로스(Roland Garros). 빛으로 살아있는 붉은색의 향연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노란 원형의 상승과 하강을 통해 찰나의 서사를 이어간다. 6월의 국립서울현충원. 라벤더의 꽃향기를 찾아 바다를 건넌 하얀 나비가 묘비에 내려앉는다. 삶은 빛을 향한 찰나의 몸짓. 죽음은 시간이 멈춘 영원의 손짓. 삶과 죽음은 빛, 찰나 그리고 시간의 경계를 찾아가는 물음표와 느낌표의 여행이다. 찰나의 빛은 빨강과 파랑의 여정을 거쳐, 마지막 시간의 문인 보라색에 머무른다. 빛~찰나~시간의 경계가 색채와 어우러진 곳에서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만난다.
우리 삶 / 시작(성장) 단계 / ‘해돋이’ / 붉은 열정
'인상주의'(Impressionism)라는 사조를 태동시킨 그림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1872년).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년~1926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서북부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해돋이 풍경을 그린 유화이다.

1사분면과 2사분면. 윗부분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떠오른 붉은 해는 크레인에 걸려 끌어올려지는 듯하다. 짧은 해돋이의 찰나는 무심한 듯 던져진 짧은 선으로 선홍빛 해의 그림자를 바다에 거느린다. 공장 굴뚝의 주홍빛 하늘과 연결된 해는 항구에 정박한 배들을 흐린 푸른 빛 속에 띄운다. 산업혁명과 도시화가 실루엣 되어 해무처럼 피어나며 퍼져나간다. 3사분면에는 노를 저으며 공장을 향해 가는 작은 배 두 척이 삶의 그림자 되어 떠있다. 가장 어두운 부분이면서도 짙은 남색으로 전달한다. 빛으로 표현되는 대상을 그리기에는 검은색은 원래 자격 미달이었으니. 이어서 4사분면은 해돋이의 인상을 넓은 바다로 확장하며 우리를 응시한다.
스냅사진 같은 찰나의 순간을 빛으로 포착하여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인상주의 그림의 특성으로 드러난다. 빛이 있는 대상으로의 이동, 표현 대상에 대한 생생한 조감, 투박함 속의 투명함, 신선한 빠른 붓 자국, 그리고 다양한 색감의 표현 등. 이는 당시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인간 중심의 변화 추구, 사진기 및 안료와 튜브 물감의 개발 같은 과학 기술 발전 및 일본 우키요에(浮世絵,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의 형태로서 주로 목판화 형태가 많음) 등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밑그림에 머무른 듯한 투박하고 짧은 붓 자국, 빛에 의한 시간 여행의 색채를 나타내기 위한 흐릿한 색깔과 무엇을 왜 그렸는지 불확실한 대상들. 대상에 대한 직접 경험을 강조하여 대상이 있는 장소로 나가서, 시공간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담는다. 이는 모네의 눈과 감정만이 오롯이 끄집어낸 그 찰나의 느낌으로 남는다. 19세기 후반은 신(종교)과 역사와 교훈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의 현실적 재현을 강조하는 사실주의가 지배하던 시기. 낯설기만 한 모네 등 인상주의 그림은 본질을 도외시하고 피상적인 인상만 아마추어 수준의 솜씨로 그렸다는 혹평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전통 기반의 주류에서 벗어나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며, 고유의 개성과 감각을 담아내는 매개체로서의 인상주의 미술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생명력을 확대해 간다. 너무나 인간적인 감성 표현자이며 자연의 목격자인 인상을 매개로 한 본질의 표현은, 가장 성공한 회화의 한 사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삶은 빛과 어우러지며 성장하는 그림 같은 발산의 과정이다. 삶의 시작 단계에는 인상주의 사조를 얘기하며, 해돋이의 열정과 감성 같은 붉은 색의 색감을 안고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어진 / 성숙 단계 / 파란 냉정 / ‘바다’ 교향시
해돋이의 붉은 인상은 음악으로 연결되며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년~1918년)를 만난다. 드뷔시는 당시 유행하던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사교 모임인 살롱에서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 드가와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 말라르메 등과 교류하며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 어린 시절부터 내재되어 있던 반항아적 기질이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음악의 뿌리를 넓히며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기존 음악이 불문율처럼 고수하는 화성학이나 소나타 형식 같은 전통적 음악을 거부하고, 미술과 문학과의 만남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겹으로 입고 화려한 외출을 한다. 음악에 시각적 색채를 강렬하게 반영한 그의 음악에 젖기 위해 바다를 찾는다.
《바다 La mer-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스케치》(1903년~1905년)는 우키요에(浮世絵)인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년~1849년)의 목판화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1825년 무렵)의 영향을 받은 곡으로,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악장 바다 위의 새벽부터 한낮까지 (De l'aube à midi sur la mer)~제2악장 물결의 희롱(Jeux de vagues)~제3악장 바람과 바다의 대화(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제1악장은 암흑의 바다에 장막이 서서히 걷히고, 해가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드러나는 바다의 수평선과 구름. 하늘은 해의 일어나는 속도에 따라 선홍빛에서 보랏빛으로 그 빨간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잔물결마저 기다리는 조용한 바다와 파란 인사를 나눈다. 이어지는 제2악장에서는 바다를 놀이터로 하는 파도의 장난스러운 물결 놀이를 드러내듯, 밀려가고 밀려오는 흰 포말이 바다와 밀당을 나누며 속삭이듯 사라져간다. 마지막 제3악장은 천둥과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으로 무섭게 흔들리는 바다로 시작한다. 거칠어진 바다는 커진 바람과 퉁명스러운 대화를 나누는데 하늘이 다가오며 바람과 바다와 손을 잡는다. 바람과 바다와 하늘은 웅장하지만 부드럽게 마음속으로 들어와 머무른다. 무심한 시간 여행자인 바다를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그린 이 곡이 ‘교향시’임을 드러내며 여백을 남긴다.
드뷔시, 라벨 등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 음악은 특정 목적의 서사를 위한 환상이나 눈앞의 현실 표현에서 벗어난다.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이나 사물을 그대로 옮긴다. 객관적 대상이 아닌 주관적 인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주관적 인식은 시간 흐름과 공간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 이는 빛과 더불어 흘러가는 유동적 대상에 대한 유연성을 강조하게 되며, 고정적 전통 방식과 가치관을 벗어나게 한다. 그러나 인상주의 미술과는 표현 대상에 대한 접근 면에서 공간적 한계를 갖는다. 이는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는 눈의 색이 아닌, 직관적 경험을 재생하는 마음의 눈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바다는 마음속 바다이며, 상상의 바다이다.
바다를 헤엄치는 시를 들려주며, 드뷔시는 말한다. “나는 음악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사랑하는 까닭에 나는 그것을 숨 막히게 하는 전통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한다. 그것은 용솟음쳐 오르는 자유의 예술이며 하늘과 바다, 바람과 같이 무한한 것들의 예술이다. 내가 원하는 음악은 영혼의 서정적 발로와 꿈의 환상에 충분히 순응할 수 있는 유연한 것이어야 한다.”
삶은 빛과 소통하며 상호작용을 하는 음악 같은 발산의 과정이다. 삶의 성숙 단계에는 인상주의 미술과 음악처럼 영감을 나누며, 해 돋은 바다의 냉정과 이성 같은 파란 색의 색감을 온몸이 젖도록 유영(遊泳)해야 하지 않을까.
시(詩)속의 / ‘바이올렛 아워(Violet Hour)’ / 재성숙의 / 창조 단계
해돋이의 붉은색과 바다의 파란색을 섞으면 보라색. 이는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이들의 보라색 사랑에 대해 《컬러의 말, Kassia St Clair》(2018년)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많은 이들은 인상파 예술가들이 완전히 미쳤거나 밝혀지지 않은 병에 시달린다고 결론을 내리고 ‘바이올레토마니아(보라색광,Violettomania)’라 이름한다. 1881년에 마네는 그의 친구에게 공기의 진짜 색을 발견했노라고 선언한다. ‘바이올렛이더군. 공기는 바이올렛이야. 3년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바이올렛이겠지.’

붉은색 해돋이 그림~파란 바다 음악에 대한 인상주의적 특성은 상징주의와 모더니즘 시의 공통 분모로 찾아온다. 붉은색과 파란색을 섞은 보라색이 모더니즘 시에 등장한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년~1965년)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년) 중 ‘보라색 시간(violet hour)’은 귀로를 재촉하고 바다로부터 집에 데려오는 황혼 녘 시간일 것이다.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에 데려오는 시간,
At the violet hour, the evening hour that strives
Homeward, and brings the sailor home from sea,
-《황무지/비현실적 도시(The Waste Land/Unreal City)》 -
이는 삶과 죽음의 여정에서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을 검정이라고 하면, 삶에서 죽음으로 무게추가 옮겨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는 보라인 것이다. 삶은 열정과 냉정, 감정과 이성의 유기체적 집합. 우리의 삶을 색으로 나타내면 하얀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채워가며 아름다운 보라를 빛나게 하는 과정이리라. 삶은 유한한 찰나이다. 삶은 양(수명)과 질(가치)의 함수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추세는 삶과 죽음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영원이 아닌 찰나인 삶의 두 변수인 양과 질. 이에 대한 가중치 조화는 양과 질 전환의 법칙을 통해 재성숙을 창조한다.
우리 삶의 첫인상은 서투른 아마추어의 그림~음악~시. 우리의 의식과 인지력이 달라질 수 있는 재성숙 단계에는 어떤 인상을 남기며 보라색을 채워갈까. 보라색 삶은 어떤 그릇이어야 하는지. 넓고 깊은 그릇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답게 빛나는 둥근 그릇. 그 그릇엔 담길 내용물과 흔적(성취)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세대를 잇는 생물학적 흔적, 지식을 넘기는 인문・과학적 흔적, 지혜를 남기는 사유적 흔적, 또는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융합적 흔적.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기지계(旣知界)에 대한 유한 리스크를 느낌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은 무한이고 영원이다. 인상주의가 빛을 차단하는 검은색을 싫어하듯 우리는 죽음을 저어한다.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현재의 삶에 대한 함수를 풀어가지 않는다면, 미지계(未知界)에 대한 무한 리스크를 물음표로 안고 가는 것과 다름없는 건 아닐까.
롤랑가로스의 붉은 색은 윔블던의 보라색, US 오픈의 파란색 향연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삶의 색인 빨강과 파랑,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색인 보라색의 흔적을 그린다. 그림~음악~문학(시)에 ‘나’의 붓 자국, 바다를 유영하는 시, 그리고 보랏빛 시간을 만들며 심호흡 한다. 죽음을 향한 전쟁은 붉은 땅, 보라색 들판, 파란 바다에서 누리 달의 그날처럼 처연하게 머무른다. 바다를 떠나 집으로 향하며 내일의 해돋이를 꿈꾸는 우리는, 오늘도 숨을 쉰다.
글∙최양국
격파트너스 대표 겸 경제산업기업 연구 협동조합 이사장
전통과 예술 바탕하에 점-선-면과 과거-현재-미래의 조합을 통한 가치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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