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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놀랍지 않은 폭로를 위해 희생시키는 것들 – 영화 <설계자>의 태도에 대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놀랍지 않은 폭로를 위해 희생시키는 것들 – 영화 <설계자>의 태도에 대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6.1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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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밀에 숨겨진 진실이 놀라운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상황이, 혹은 인물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마'가 들어맞는 순간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는 이 비밀과 연계된 모든 것에 대한 바람과 추측이 무너진 ‘진실’로 인한 것일 테니까. 이때의 문제는 좌절이나 붕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해진다. '진실'과 '설마'가 연결되는 순간 피어나는 '불신'은 이 모든 것에 이미 정해진 수순이 있다는 것, 우리가 모르는 어디엔가 표면과는 다른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불안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몇 년 간, 아니 지금까지도 이 '설마'가 '진실'이 되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이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너무도 당연하게 인지하고 있다. 어지간한 '진실'은 더 이상 놀랄 것이 아니고 '그럴 줄 알았던' 하나의 조각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이러한 관객의 감각에 역행하며 영화 '만' 놀라는 진실과 함께 퇴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에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최후에는 국가이든 공권력이든 기업이든 많은 이들이 '불신해 마지 않는 집단'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은 더 이상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다. 이러한 결말에 놀랄 것이라는 기대로 새로운 듯, 정의로운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영화들이 지루해진 이유는 이러한 감각에서 비롯된다. 배후에 대한 폭로가 어떠한 '비판의식'을 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이미 더 강력한 현실로 덮힌 채 낡은 전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음모와 불신에 대한 구도는 매우 강력하고도 명확한 선악 구도 속에 길을 잃으며 의아한 올바름의 강박에 놓이기도 한다. 영화 <설계자>가 빠진 함정은 정확하게 이 루트를 경유한다.  

 

<설계자>는 다수의 사건들이 누군가의 의도로 설계되고 있다는 가상의 가능성을 중요한 축으로 둔다. 영일(강동원), 재키(이미숙), 월천(이현욱), 점만(탕준상) 등은 이 위험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자신들처럼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이들보다 더 큰 세력인 '청소부'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들로 인해 마치 짝눈(이종석)이 그랬던 것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이들은 어떤 음모를 만드는 존재이자 그 음모로 인해 제거될 수도 있는 불안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인데, 영화는 이들의 불안한 위치를 '희생'으로 보일 수 있도록 치환시키며 메우 투명하게 상상의 빈곤함을 드러낸다. 거대한 세력으로 인한 제물, 즉 연민을 끌어낼 수 있는 인물의 구성을 위해 나이브하게 인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젊은 것이 아닌) 어리고 해맑은 꿈을 지닌 미소년, 퀴어, 베트남전의 트라우마로 인한 약물 중독과 치매증세를 보이는 여성은 <설계자>가 상정한 '약자'의 포지션이었다. 영화는 바로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서 마치 올바름이 상실된 이 현실에 대해 함께 아파하길 바란 듯 했다.

부조리한 권력의 반대편에 앞서 나열한 속성들을 배치한 것은 악과 그름에 맞서 선과 옳음으로 무엇을 배치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악의 반대편에서 선하고 올바른 듯 보이기 위해 배치한 이 요소들은 꽤나 비겁해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미묘한 태도로 사건을 파헤치던 경찰 경진(김신록)이 청소부의 정체라는 점으로 결말을 맺었었다. '굳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이 모든 배후가 다시금 '진짜'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공권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으로 마무리 지은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영화는 정작 중요한 사건의 설계는 우연에 맡겨두고 사건을 의뢰하는 주체에 검찰총장 후보의 딸이라는, 청소부의 정체가 결국 경찰이었다는 지극히 정치적 포지션을 가져오면서 굉장한 비판의식을 담은 영화로 거듭나려 한다. 설사 정말 정체가 그러하다 해도 별로 놀랄 것 없는, 더 놀랄 일을 겪어온 이들에게 크게 타격을 주지 않을 결말을 위해 소수자들을 매우 기능적이면서도 자극적으로 배치하면서 올바름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 귀결은 물론 인물의 희생이기에 그들의 정체성은 안타까움으로 쉽게 치환되었고, 활용될 뿐이었다.

 

<설계자>가 <엑시던트>(2009)를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불편함을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엑시던트>의 주인공은 과거 자신의 아내를 잃고 몇몇 일행과 사건을 설계하며 살아가다 위험을 감지한다. 그는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하던 동료도 믿지 못하고 급기야 병적으로 자신의 주변을 의심하다 망상으로 인해 주변도, 스스로도 괴롭혀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자가당착에 빠진 듯 자신 진행하던 그 설계가 자신을 향할 것이라 생각했을 때 보일 수 있는 광기는 <엑시던트>가 가장 주목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엑시던트>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 그들의 전사(前史)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엑시던트> 속 인물들은 그 어떠한 소수자성도 지니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사건의 설계에 더 거대한 흑막이 있을 것이란 인간의 추측을 허망한 것으로 남긴 이 영화에서 이러한 설정은 굳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설계자>가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인물들이 사건을 설계한다는 얼개였다. 그리고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의 개입이 있을 것이며 인물들은 그로 인해 희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젠 상식과 같은 전제를 덧입히려 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일 이하의 일행들을 주민등록번호조차 없이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로 재설정했고 각기 다른 소수자성을 부여하며 많은 설명이 필요한 이들로 재배치했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거대한 권력 속 안타까운 희생을 위해 배치된 것 뿐이었으니까. 정의로울 것이라는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고통과 억울함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임에도 굳이 소수자성을 앞세우는 것은 그들의 폭로가 얼마나 편협하고 엉성한 것인지를 내보인다.

 

최근 몇몇 한국 영화에서 보이는 허술한 비판조의 결말들은 권력에의 불신을 내비치기 위해 분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예의 그 뻔한 결말, 즉 이제는 익히 짐작되는 그 이야기로 인해 오히려 김이 새는 모양새다. 이 결론을 향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려할 때 <설계자>가 선택한 것은 소수의 누군가를 겨냥한 것이었다. 영화는 이들에게 이입해달라는 듯 끊이지 않는 음악에, 그것도 처연한 분위기를 담아 호소했지만 그리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의심이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가 이미 예상되고, 그것이 별 다른 방해없이 맞아떨어지는 데에도 홀로 심각한 영화에서 어떤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게다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요소들은 매우 팽팽해야 한 '설계'를 느슨한 것으로 만들며 전체적인 서사적 이해조차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신 이후의 이야기는 언제쯤 기대할 수 있을까.

 

 

<설계자>(2024)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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