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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의문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대한 의문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6.1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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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재현의 윤리’라는 쟁점 대신

인류가 대체로 공감할 만한 보편성을 획득한 비극은 그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재현의 윤리에 민감해져야 할 때가 있다. 홀로코스트 역시 이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어디까지 묘사해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론과 의견, 외압과 반응이 뒤섞인다. 이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어쭙잖은 재현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 대신 간접적인 단서들을 통해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시체를 소각하고 나서 배출되는 뼛조각들이 강가에 떠내려오거나, 벽 너머에서 지속되던 비명 소리가 몇 번의 총성 끝에 잠잠해지는 순간들 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벽 너머 수용소를 두고 일상을 보내는 아우슈비츠 책임자와 그 가족들의 일상을 담아낸다. 영화의 관점은 명확하다. 가해자의 일상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소름 끼치고 무서운 존재인지 되돌아보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함부로 재현하지 않는 결단을 통해 오히려 그 비극의 질감을 더욱 생생하게 스며들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수용소의 참상을 전시하지 않고, 직시하지 않고, 묘사하지도 않은 채 그저 관객 각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외화면 영역에만 내버려둔다. 이따금씩 침입하는 기운에서 오는 서늘한 감정의 파고만이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도 없고, 현실 자체를 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사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본 평자들이 대체로 매달리는 ‘현실의 재현’은 내겐 중요한 담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쟁점인가. 바로 현실과 영화 사이 경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훨씬 중대한 사안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현실과 영화 사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의 비극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와 관련없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감독 글레이저 역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무엇을, 어디에서 촬영하는가 하는 바로 그 점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사건의 특수하고 끔찍한 무게로 인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현장의 모두에게 그곳에 발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끝까지 투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연출 의도와 결과물이 연동되지 않는 기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감독은 마틴 에이미스가 집필한 동명 소설에서 역사적 질료와 실존 인물의 잔상 등 일부 요소만을 추출했다. 결국 원작 소설이 있어도 허구에 기반했다기보다는 현실에 기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실존 인물의 이름(루돌프 회스 등)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실제 역사가 깃든 장소를 고집해서 로케이션에 반영하지 않았나. 현실과 맞닿은 영역에 자신을 몰아넣고자 하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일 테다. 이제부터 역설이 발생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결코 현실과 연동될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가 스스로 구축해낸 세계를 스크린 내부에 가둬버린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엔딩에 대한 의문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정말로’ 영화를 통해 현실을 환기하고 있는가? 여기서의 환기는 무엇인가. 이 ‘환기’가 내다보는 지점은 바로 스크린을 프리즘 내지는 반사경 삼아 현실을 사유하고 반추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을 테다. 문제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경계를 논하는 일보다도, 가상의 세계를 축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찝찝한 뒷맛을 남긴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어째서 그런가. 그 이유는 바로 엔딩 시퀀스의 편집에서 찾을 수 있다. 회스가 바라보는 어둠-현재의 수용소 기념관 내부의 문로 이어지는 몽타주 말이다. 회스 중령이 구토를 하다가 어둠을 응시한다. 그와 대척점에 있던 어둠은 곧 현재(정확한 시점이 나오지 않지만, 관객이 점유하는 세계와 공명하는 동시대로 간주할 수 있다)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달려 있는 문으로 연결된다. 당시의 아우슈비츠 내부는 영화 내내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마침내 엔딩에 이르러서야 흔적만 남은 기념관의 내부로서 관객에게 공개된다. 몽타주처럼 이어붙는 해당 시퀀스는 많은 평단과 관객들의 호응을 자아냈다. 혹자는 미래를 본 회스의 내면을 풀어낸 장면이라고들 말하고, 혹자는 과거와 현재를 엿결짓는 충돌과 접합을 통해 동시대성을 불어넣는 장치로 바라보기도 한다.

실제 기념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섭외해서 그들의 노동 장면을 담아냈든, 연기자를 고용했든 간에 중요한 건 현시점의 아우슈비츠를 관객에게 소개했다는 선택 자체가 문제다. 이건 영화가 줄곧 공백으로 뚫어놓았던 아우슈비츠를 영화가 전제한 현실(현시점의 기념관에서 유추 가능한 실제의 인류사 영역)과 영영 분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영화가 현실과의 접합을 하지 않았더라면, 벽 너머에 공백으로 남겨뒀던 아우슈비츠는 관객들 각자에게 스며드는 현실로서 작용하면서 자연스레 환기의 장을 만들어냈을 테지만, 기념관 시퀀스가 회스의 구토와 연결되는 순간 그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마지막 엔딩에 현재의 수용소 모습이 병치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관객이 영화가 끝나도, 외화면 영역에서 관객들을 내내 의식하게 만드는 아우슈비츠의 내부에 대해 곱씹어 볼 기회를 얻게 되지 않나. 왜냐하면 여백으로 남겨둔 아우슈비츠가 현재 어떤 모습인지 영화에서 제시하지 않았으니 영영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때부터 원활하게 작동하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러닝타임 동안 고수해온 관점의 유효성이 계속해서 살아 숨 쉴 수 있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가 응시하는 어둠을 현재의 기념관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상상 지대는 닫힌다. 그 미지의 영역을 관객에게 넘기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나. 영화는 현실이 될 수 없고, 현실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늘 그 얇디얇은 막 사이를 오갈 뿐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외화면의 아우슈비츠를 끝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유지한 채 관객과 연결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선택을 지지할 수 없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스틸컷. TCO㈜더콘텐츠온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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