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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퍼펙트 데이즈>,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다”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퍼펙트 데이즈>, “지금은 지금이고, 다음은 다음이다”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4.07.1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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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간, 노인이 빗자루를 들고 길을 청소한다. 그 소리에 <퍼펙트 데이즈>(2023)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잠에서 깨어난다. 히라야마는 이불을 개고, 이를 닦고, 수염을 정리하고, 세수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입고, 몇 가지 물건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빼서 봉고차에 오른다.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노래를 들으며 일터로 간다.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일터는 화장실. 히라야마는 퇴근할 때까지 담당구역의 화장실을 티끌 하나 없이 열심히 청소한다. 점심시간에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무 또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같은,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다. 퇴근한 다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대중목욕탕에서 목욕하고, 식당에서 술 한잔하며 저녁을 먹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잠을 잔다. 그렇게 히라야마의 ‘완벽한 하루’가 마무리된다.

 

스마트폰, 컴퓨터, 텔레비전, 기타 가전제품을 갖고 있지 않은 히라야마는 필름 카메라와 흑백 사진, 카세트테이프와 올드 팝을 즐기며 디지털 시대의 유행에서 동떨어진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2024)의 이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봉고차를 운전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히라야마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쇼트로 담아내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 더없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쇼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해가 뜨고 새벽이 밝아온다. 청소하는 노인의 빗자루 소리, 히라야마는 잠에서 깨고 우리가 보았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이 지점까지 영화의 4분의 1 정도가 흘러가면서, 히라야마의 일상이 관객에게 각인된다.

히라야마의 평화롭고 단조롭고 규칙적인 일상은 젊은 청소부 다카시와 그의 여자친구 아야, 조카딸 니코, 단골 선술집 여주인 마마의 전남편 도모야마 등이 등장하면서 약간의 파문이 인다. 다카시는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뭘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냐?”고 핀잔을 주거나, “돈이 없으면 사랑도 못 하는 세상”이라고 한탄한다. 아야는 난생처음 본 카세트테이프를 신기해한다(요즘은 영화과 수업을 듣는 학생들 가운데 필름 자체를 접한 적이 없는 경우가 꽤 많아서 프레임을 설명할 때 난처해지곤 한다). 다카시는 불평과 한탄을 계속하다 결국 청소 일을 그만둔다.

 

니코는 엄마와 싸우고 가출해 삼촌인 히라야마를 찾아온다. 엄마가 찾으러 왔을 때, 니코는 스릴러 범죄소설 작가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앨프리드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1951)의 원작자인데, 헌책방 주인은 “불안을 잘 표현한 작가”라고 평가한다)의 단편소설 “<테라핀>에 나오는 소년 빅터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빅터는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를 칼로 살해하는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지만, 히라야마는 부유한 아버지와의 심각한 불화 끝에 가족과 절연하고 지금처럼 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히라야마의 과거를 추측하게 하는 설정은 극도로 말수가 적고, 책을 즐겨 읽으며,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중년 남자는 원래부터 청소 따위를 해왔던 노동자가 아니라 의미심장한 과거를 가진 존재여야 한다는 ‘클리셰’를 따라간 것이다.

다카시와 아야의 에피소드가 히라야마의 일상에서 흔히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라면, 여동생과 조카의 에피소드는 그와 가장 가까웠던 가족 간에 빚어진 일이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히라야마 자신과 관련된 문제가 펼쳐진다. 히라야마는 여느 휴일처럼 선술집에 들렀다가 여주인 마마가 낯선 남자와 포옹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가 강가에 나가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 마음이 크게 동요했음을 알 수 있다. 낯선 남자는 그에게 다가와 마마와 7년 전에 이혼한 전 남편 도모야마라고 소개하며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도모야마가 “마마를 잘 부탁한다”고 하자, 히라야마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두 사람은 맥주와 담배를 나누며 어린아이처럼 그림자 잡기 놀이를 하면서 잠시나마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이밖에 화장실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던 어린이, 거리에서 계속 마주치는 홈리스, 화장실 벽 사이에 쪽지를 꽂아둔 익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히라야마와 진짜 소통을 나누는 인물은 이들인 것 같기도 하다. 아울러 히라야마가 미소를 머금게 하는 진정한 친구는 나무와 햇살, 바람 따위이다.

<퍼펙트 데이즈>를 연출한 빔 벤더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마지막 영화 <꽁치의 맛>(1962)을 도쿄에서 만든 지 60년 만에 <퍼펙트 데이즈>를 촬영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히라야마(<꽁치의 맛>의 주인공 이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벤더스는 오즈에 대한 존경으로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를 연출했던 감독이다. <퍼펙트 데이즈>의 화면 비율을 4대 3으로 설정한 점, 화면에 스카이트리(도쿄도 스미다구에 있는 전파 송출용 탑)가 계속 등장하는 점, 히라야마와 니코가 자전거 타는 장면, 술집에서 야구를 보는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 등은 오즈 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의 첫 번째 날, 히라야마가 출근하는 장면에서 애니멀스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주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부터 시작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루 리드의 <Perfect Day>, 롤링 스톤즈의 <Walkin' Thru The Sleepy City>, 킹크스의 <Sunny Afternoon> 등, 내가 젊었을 때 좋아했던 노래(올드 팝?)가 계속 이어진다.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와 함께 듣기 때문에 노래마다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히라야마는 거의 2분여 동안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이 장면에서 새삼 야쿠쇼 코지가 정말 훌륭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2023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타고도 남을 만한 연기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한데 버무려진 것 같기도 하고, 삶이 너무 충만해서 눈물겨운 것 같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벅찬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짓는 표정 같기도 하다. 이때 니나 시몬의 노래 <Feeling Good>이 흘러나온다. “높이 나는 새들, 내 기분이 어떤지 알지/하늘에 떠 있는 태양, 내 기분이 어떤지 알지/불어오는 바람, 내 기분이 어떤지 알지/새로운 새벽이다/새로운 날이다/나에겐 새로운 삶이다…”

히라야마가 잠을 자는 장면에서 매번 낮 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잔잔한 일상에 나타나 파문을 일으킨 속 시끄러운 일들은 밤사이에 그렇게 해소된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면 또다시 ‘새로운 삶’, ‘퍼펙트 데이’가 펼쳐진다. 왜냐하면 오늘도 해가 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주)티캐스트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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