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널 알아봤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해"
<토리와 로키타>에서 이들이 머물기 위해서는 각종 묘사와 설명이 필요하다. 아프리카계 이민자 출신 로키타는 같이 건너온 이민자 토리가 동생임을 증명해야만 같이 머물 수 있는 체류증이 발급된다. 사실 이들은 친남매가 아닌데, 영화는 토리와 로티카가 서로를 돕는 이유를 딱히 묘사하지 않는다. 학대 사실을 근거로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아직 체류증을 받지 못한 로키타는 초조하다. 누군가의 허락을 필요로 하는 난민들은 임시적인 단계에 발을 걸치고 있으며,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중간에 위치한 로키타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본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이민국인 벨기에에 머물 방도도 딱히 없다. 영화는 로키타가 중간 단계에 놓여있음을 다양한 지표를 통해 보여준다. 피자 가게에서 일하는 토리와 로키타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중간 단계인 배달을 하는데, 이들은 피자 대신 베팀이 공급하는 마약을 전달받아 소비자들에게 판매한다. 그러나 사소한 것 하나조차 직접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들은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서 어떠한 권리도 챙길 수 없다.
심지어 로키타는 가족과 밀입국 브로커 사이에서도 균형을 잡지 못한다. 동생들의 학비를 송금해야 하는 본국의 가족들과 돈을 빼앗는 브로커들이 양옆에서 밀어붙이는 압박으로 인해 숨만 간신히 붙인 채 힘겨워한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로키타는 세상이 인지하지 못하는 테두리 바깥으로 넘어간다. 체류증 발급이 어긋나자, 베팀의 도움을 받아 가짜 체류증을 발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로 인해 대마를 불법적으로 기르는 창고에서 석 달동안 살아야 하는 로키타는 인간적인 삶의 바깥으로 향하게 된다. 밖에서 안을 걸어 잠그면 나갈 수 없고, 창문 하나 없이 닭장처럼 촘촘하게 붙은 방은 지도에서 지워져 웅웅거리는 소음만이 가득한 장소다.
반면, 토리는 체류증을 발급받아 중간 단계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다. 세상과 단절된 로키타를 위해 몰래 휴대폰 유심칩을 전달하지만 곧 들킬 위기에 처해있고, 미성년자이기에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야만 해외로 돈을 송금이 가능하다. 그러나 토리에게는 약간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것은 로키타와 달리 배달하는 사람에서 직접 공급자가 될 수 있다는 것. 토리는 베팀의 사업장에서 몰래 대마초를 훔쳐 직접 공급자가 되며 중간 단계를 뛰어넘는다.
물론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원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이러한 가능성은 일종의 희망을 내비친다. 그러나 일시적인 해결책은 순간적으로 단계의 격차를 좁히지만, 완전하지 않기에 곧바로 위험에 처한다. 토리가 전달한 휴대폰 유심칩을 베팀에게 들켜 대항해야 하는 순간에 이들의 선택지는 단순히 공간을 탈출하는 것밖에는 없다.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이 손쓸 수 없도록 완전히 가둘 수 없는 두 사람은 그저 자물쇠 안에 모래를 채우거나 열쇠를 멀리 던져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다. 두 사람에게는 낯선 장소가 베팀과 동료에게는 익숙하고도 친밀한 본국, 자신들의 본거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는 토리와 로키타 사이에도 깔려있다. 토리가 로키타가 갇혀있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유심히 보자. 카메라는 토리보다 몇 배는 큰 벽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비춘다. 마치 물리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듯이 너무나도 위압적인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결국 토리는 정문이 아닌 다른 구멍을 통해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토리는 로키타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설 수 없는데 성적으로 로키타를 탐하는 베팀에게서도, 로키타가 총을 맞을 때에도 숨죽이고 지켜봐야만 한다. 이민국에 느슨하게 발을 걸쳐놓은 토리 역시 체류증으로 인해 임시적으로 단계를 뛰어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감독인 다르덴 형제는 난민들의 어두운 삶의 단면을 로키타의 죽음을 통해 조명한다. 다리를 다친 로키타가 도로에서 차를 얻어 타려 히치하이킹을 할 때, 영화는 단숨에 희망을 거둬간다. 베팀의 동료에게 발각되어 로키타는 숲속에서 총살을 당한다. 죽은 로키타의 얼굴과 신체는 수풀 사이에 가려져 있고, 카메라는 그녀에게 다가서지 않는다. 가려진 로키타의 얼굴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제도적 차원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는 사실과 방치된 난민들의 진짜 삶에는 개입할 수 없는 아이러니다.
다만, 영화는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컷으로 하여금 로키타와 토리가 가려는 삶의 방향성을 살짝 비튼다.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이민국 심사 인터뷰를 하는 로키타의 미디엄 쇼트로 시작하는 영화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울먹이는 로키타를 조명한다. 하지만 프레임 내부 어디에도 도움을 줄 어른의 흔적은 없다. 인터뷰를 중단하고 난 이후에야, 카메라는 갑자기 패닝을 하며 주변에 있었던 어른들의 존재를 비춘다. 반면, 영화의 엔딩에서 토리는 교회의 많은 어른들로 하여금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마치 프레임을 꽉꽉 막아 어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지지대가 사방에 존재하는 것만 같다. 토리는 앞으로 나가 로키타를 추모하는 편지를 읽고 미디엄 쇼트 안에 홀로 남는다. 수미상관으로 컷을 배치한 영화는 서로 다른 길로 가는 두 사람을 보여준다.
앞서 베팀의 동료에게 붙잡혔던 로키타는 토리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걔는 다른 길로 갔어요" 이 말은 마치 로키타 자신과는 다르게 토리만은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정착할 수 있었으면 하는 씁쓸한 희망이 내포된 것은 아닐까. 로키타의 죽음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토리의 삶이 임시적인 단계를 뛰어넘기를 기대해 본다.
글·이하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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