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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송가(頌歌)-<안녕, 용문객잔>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송가(頌歌)-<안녕, 용문객잔>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4.08.05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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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진다. 관객이 모두 빠져나간 객석…. 아니다. 이 말은 조금 무안하다. 객석은 처음부터 거의 비어있었다. 1200석짜리 극장에 관객이라고는 열 명 남짓에 불과했으니까. 카메라는 조용히, 호흡을 멈추고, 텅 빈 객석을 한참 동안 비춘다. 그렇게 복화대극원(복화극장)의 마지막 상영이 끝난다. 오래된, 낡은, 침침한, 음습한, 천장에서 물이 새는 이 극장은 이제 임시휴업에 들어간다. 언제 다시 문을 연다는 기약은 없다. 마지막 상영을 마친 젊은 영사기사는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고, 어둠 속에서 그 영사기사를 지켜보던 매표원은 거센 빗줄기 속으로 커다란 가방을 들고, 한쪽이 찌그러진 꽃무늬 우산을 쓰고, 다리를 절며, 혼자서 걸어간다.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2001)에서 복화극장이 마지막으로 상영한 영화는 <용문객잔(龍門客棧)>이다. <용문객잔>은 호금전 감독이 쇼 브라더스의 다작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대만으로 건너가 1967년 연출한 무협 영화이다. 이 작품은 2011년 대만의 영화 전문가들이 뽑은 ‘100대 중국어 영화’에서 공동 9위에 올랐다. 1992년에는 이혜민 감독이 화려한 캐스팅과 와이어 액션으로 치장한 리메이크 영화 <신용문객잔>을 선보였다. 차이밍량 감독은 원전에 해당하는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에 경의를 보낸다. <안녕, 용문객잔>은 그러니까 <용문객잔>과 같은 고전적인 혹은 아날로그적인 영화의 시대가 저무는 시대 환경과 관련이 있다. 최신식 멀티플렉스에 사라져가는 옛날의 극장, 관객이 찾지 않는 영화, 잊혀져 가는 노배우와 그 배우의 눈에 천천히 차오르는 눈물…. 이 영화에서 복화극장과 <용문객잔>, 노배우 시천과 먀오는 같은 의미를 지닌 다른 기표이다.

실제로 <안녕, 용문객잔>에서 복화극장을 찾은 극소수 관객 중에는 <용문객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있다. <용문객잔> 상영이 끝나고 우연히 로비에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는 게이 청년이 복도 구석에서 뿜어내는 담배 연기처럼 쓸쓸하다. 시천은 <용문객잔>으로 데뷔한 먀오에게 “이제는 아무도 이 영화를 보러 오지 않아요.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관객은 이제 <용문객잔>이 아니라 <신용문객잔> 류의 화려한 영화를 선호하고, 그래서 복화극장은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밍량 감독이 복화극장을 공간 배경으로 설정하고, <용문객잔>을 상영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제작과 연출 방식을 고려하면 <안녕, 용문객잔>은 21세기 영화 제작 환경과 상영 시스템에 대해 그가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혹은 잊혀져가는 장소를 기억하다

 

최근 국내에서 차이밍량 감독 특별전이 열렸다. 차이밍량 감독은 한국을 방문해 GV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차이밍량 감독은 OTT 시대의 영화 관람문화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래도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안녕, 용문객잔>에서 복화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게이 청년은 사랑을 나눌 짝을 찾아서 객석과 극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화장 짙은 젊은 여성은 앞 좌석에 다리를 뻗고 과자를 먹고, 바닥에 떨어진 신발을 찾느라 바쁘다. 다른 여성 관객들도 나란히 앉아서 무언가를 먹는 데만 집중한다. 그리고 먀오의 손자는 할아버지와 함께 <용문객잔>을 본 이날을 과연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고, 영화에 몰입하는 인물은 <용문객잔>의 출연 배우였던 먀오와 시천, 두 명뿐이다.

실제로 영화가 끝난 순간, 객석에는 아무도 없다. 먀오와 시천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의자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복화극장은 이제 극장으로서의 쓸모가 없어진 공간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영화 속의 관객은 유령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인물들은 ‘이 극장이 귀신 들렸다’라는 대사와 관련된다.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날 만큼 흉흉한 극장이라니. 이 관객들은 극장이 옛날의 영화(榮華)를 잃어버리고 쇠락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과거의 관객들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아니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차이밍량 감독은 폐관을 하루 앞둔 극장이라는 공간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것이다. 관객이 꽉 들어찬 첫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복화극장은 각각의 인물들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극장은 게이 청년에게 하룻밤을 같이 보낼 짝을 찾는 최적의 공간일 수 있다. 혹은 젊은 여성이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마음의 상처를 잠시 다독거릴 수 있는 곳일 수도 있다. 반면 먀오와 시천에게 복화극장은 애잔하고 애틋한 추억의 장소이다. 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서 공간은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며, 장소는 조금 더 구체적이며 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성이 관련된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푸 투안 역시 공간은 추상적이며, 공간에 개인의 삶과 체험, 애착이 녹아들면 장소가 된다고 설명한다. 차이밍량 감독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라고 말한 배경도, 오래된 극장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혹은 결핍의 존재들

 

<안녕, 용문객잔>에서 극장만큼 비중 있는 인물은 여자 매표원과 젊은 영사기사이다. 특히 여자 매표원의 신체적 특징과 행적은 복화극장의 메타포로 읽을 수 있다. 여자 매표원은 매표소에서는 정작 할 일이 별로 없고, 화장실과 극장 내부를 청소하고 관리하느라 더 바쁘다. 그녀가 가장 마음을 쓰는 곳은 영사실이다. <안녕, 용문객잔>은 여자 매표원이 매표소에서 정성스럽게 찐빵을 자르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영사실에 찐빵을 두고 오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 여자 매표원은 한쪽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언제나 느릿느릿 걷는다. 카메라는 그러한 걸음걸이를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낡고 오래된 극장, 음침한 계단과 복도, 쇳소리를 내면서 절며 걸어가는 여자 매표원은 공간 배경과 인물이 절묘하게 동일시되는 설정이다.

여자 매표원의 마음은 영사 기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영사 기사에게 외면당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다. 관객이 <용문객잔>을 대하는 것처럼. 그런데 <안녕, 용문객잔>은 여성 매표원이 힘겹게 다시 계단을 오르고, 영사실에 청년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빈 영사실에 그대로 있는 찐빵을 바라보는 순간을 클로즈업으로 처리한다. 여성 매표원은 자신이 두고 간 찐빵을 오래 들여다본다. 젊은 영사기사가 여성 매표원을 일부러 외면한 것인지, 그저 무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올 때 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신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여자 매표원은 찐빵을 다시 가져와 매표소의 그릇에 담아둔다. 그리고 마지막 퇴근을 하면서 찐빵이 든 그릇을 매표소 안에 둔다. 마지막 희망일까? 포기일까?

<안녕, 용문객잔>에서 여자 매표원과 젊은 영사기사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두 인물은 마지막 장면에서 유일하게 한 프레임에 들어오지만, 그때도 영사기사는 여성 매표원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다. 여성 매표원의 마음은 그렇게 어긋나고 만다. 그렇다면 여성 매표원에게 복화극장은 먀오와 시천의 <용문객잔>과 같은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될 것이다. 장르가 무협에서 멜로드라마로 바뀌었을 뿐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제목에서 <용문객잔>과 옛 영화관의 시대에 작별을 고한다. 하지만 ‘잘 가라, 내 청춘’이라고 손을 흔든다고 청춘의 시절이 사라지고, 고개를 흔든다고 옛사랑의 그림자가 희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안녕, 용문객잔>은 사라져가는 옛 영화관에 대한 안타까운 송가(頌歌)이면서 역설적으로 그 시대를 추억 속에 되살려놓는다.

<안녕, 용문객잔>의 인물과 공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가를 상실했거나 혹은 무엇인가가 결핍된 존재라는 점이다. 복화극장, 영화 <용문객잔>, 노배우들은 한때 화려했으나 지금은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 초라한 형편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성 매표원은 마음에 두고 있는 영사기사와의 짝사랑이 어긋나고, 게이 청년은 사랑의 짝을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상실과 결핍을, 사라지는 것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여성 매표원이 복화극장을 나와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성 매표원, 한쪽이 찌그러진 꽃무늬 우산의 이미지는 영화 속 모든 인물과 공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복화극장은 문을 닫지만, <용문객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인터넷신문 '로컬데일리'에도 실려 있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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