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영화에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은 인물의 물리적인 이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인물의 인식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구체적으로는 기억과 예지를 통해서 과거나 미래에 접근하는 것이 그것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예지하는 능력이 그 자체로 인간을 넘어서는 것으로써 초월적인 암시를 갖는 것에 비하여, 그다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기억하는 능력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더 많은 영화가 기억을 심는 것 또는 기억을 잃는 것을 둘러싼 독특한 경험에 주목하고 있는데, 관객 또한 이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는 개별 작품의 탁월한 연출력 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 테지만 무엇보다 기억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자아내는 독특한 감각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측면은 무관하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기념비적인 작품 <메멘토>(2001)는 기억을 잃는 질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극적인 사건 이후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지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사진과 메모, 문신에 의존하여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메멘토>의 이야기는 기억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은 남자가 기록하는 행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과거를 되찾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기억하는 능력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기록하는 행위는 기억하는 능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즉, 기억을 기록으로 대체하려는 영화의 설정은, 그리고 주인공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또는, 그것은 애초에 성공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인가? 물론, 2024년 현재에 이러한 질문은 우스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기록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로 뒤덮인 살인 현장을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런데 남자의 손에 들린 사진은 그가 사진을 흔들수록,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연해진다. 심지어 남자가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이 이어지며 사진에 촬영된 사건이 뒤이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는 촬영된 장면을 거꾸로 재생한 것일 뿐이지만, <메멘토>의 첫 장면은 사진이라는, 그것도 시간성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기록 매체를 활용함으로써 역재생의 이질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살인 사건을 찍은 사진이 사건의 발생보다 앞선 자리에 위치하는 이러한 배치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인 동시에 기록(물)의 본성에도 반하는 것으로서 기묘한 감각을 자아낸다. 본성상 사건 발생 이전에 존재할 수 없는 사건 현장 사진을 제일 먼저, 가장 처음으로 제시함으로써 <메멘토>는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는 낯선 감각을 이중으로 배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멘토>는 살인 사건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전말은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 곧장 밝혀진다. 죽은 남자의 이름은 테디(조 판토리아노 분)고 그를 죽인 것은 래너드(가이 피어스 분)다. 기억력이 불완전한 래너드는 사진과 메모를 보고 테디를 죽인다. 그런데 메모를 적은 것은 다름 아닌 과거의 자신이다. 그는 자기 몸의 문신을 바탕으로 테디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사진에 그를 죽이라 메모한다. 따라서 래너드의 살인은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전한 메시지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문신과 사진, 메모를 포함하여 수많은 기록을 조합한 결과다. 그렇다면 과연 기록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가 그토록 집착하던 기록은, 글씨체를 통해서 그리고 시스템을 구축해 완전하게 만들려던 기록은 그의 불완전한 기억을 대체할 수 있을까?
영화의 끝에서 알게 되는 사실은 그가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달성할 또 다른 목적을 찾는다─따라서 그는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 중’의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는 그가 목적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복수의 결말은 곧 비극적 진실을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를 죽게 만든 이를 죽이는 것이, 그러니까 진정한 복수가 불가능했던 것은 차마 그가 비극적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얻는 것이었으며,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테다. 적어도 과거를 되찾으려 시도하는 동안에는 과거를 되찾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기억과 기록이 모두 왜곡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인가? 영화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듯, 기록은 조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명시적인 존재야말로 ─그것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지나치게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다. 반면, 기억은 어떤가? 래너드가 아내의 죽음을 둘러싼 기억을 왜곡하고 꾸며냈듯이 기억 또한 조작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이 눈에 보이게 존재하며 드러나고, 심지어 수많은 이들 간에 공유될 수 있는 것임에 반하여 기억은 그렇지 않다. 기억이야말로 지극히 사적이며, 온전히 주체에 속하는 무엇이다. 래너드가 아내를 기억해 내는 장면이 보여주듯, 그것은 어떤 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특정한 순간의 느낌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 없는 존재를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한다. 즉, 어떤 기억들은 현재에 부재한 대상을 현재시제로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이것이 래너드가 계속해서 과거를 쫓으려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런 종류이 기억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글‧김윤진
영화평론가/미술비평가.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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