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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프레시 7월 월요시네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관하여 … 자연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피프레시 7월 월요시네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관하여 … 자연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승인 2024.08.3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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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김응교 영화평론가 발제, 20여 명 열띤 토론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국제영화비평가 ‘줌’ 세미나 열어 

국제영화비평가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Cinématographique. 이하 FIPRESCI/피프레시) 한국지부는 매달 마지막 주 월요일 오후 8~10시, 줌(Zoom)으로 월요 시네마 세미나를 열고 있다. 지난 7월 29일 김응교 영화평론가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3)에 대해 발제한 뒤 참가자들이 총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다섯 번째 줌 세미나에는 20여 명이 참여했다. 피프레시는 1930년 전 세계의 전문영화비평가와, 영화기자, 각국의 영화 단체들이 영화문화의 발전을 위해 결성한 단체로, 한국지부의 경우 1994년 창립됐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회자: 안녕하세요, 저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심영섭입니다. 선생님들 반갑습니다. 우리 협회에서 주관하는 ‘월요시네마’. 오늘은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님을 모시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응교 교수님은 시인이고, 문학평론가이고, 영화평론가로서 숙명여대 순헌칼리지 교수님이십니다. 일본에서 오래 지내며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되어 10년간 강의하셨고, 『일본적 마음』, 『일본의 이단아』 외에 영화 평론집 『시네마 에피파니』 그리고 『처럼-시로 만나는 윤동주』 등 여러 권의 시집, 번역서 등을 내신, 일본 영화평론가로 유명하십니다. 김응교 교수님을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오늘 발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발제자: 감사합니다. 제가 피프레시 회원으로 부족함이 많은데, 추천해주신 황영미 교수님,  그리고 심영섭 교수님께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발제문을 읽는 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아래서 위로 찍은 영상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가지들이 가득합니다. 롱테이크 영상을 보다 보면, 내가 하늘과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과 나무들이 ‘나’ 인간을 내려다보는 전이된 설정을 체험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끔 카메라의 시각은 독특합니다. 하늘이 인간을 보고, 버섯이 인간을 보고, 죽은 사슴의 해골이 인간을 보는 장면 등을 로우 앵글 샷으로 담았습니다. 자연이 인간을 보는 설정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소녀가 혼자 숲길을 걷는데 묵음으로 거의 5분간 긴 트래킹 샷입니다. 이어 30초간 아무 소리도 안 나오다가, 주인공 타쿠미가 전기톱으로 나무 다듬는 둔탁한 소리가 나옵니다. 타쿠미가 통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통나무를 옮겨 집 담에 쌓고, 담배를 물고, 차를 몰아 계곡물에서 생수를 담습니다. 소바 식당 주인이 와서 함께 물을 나르기까지, 감독은 천천히 주제를 풀어내며 관객을 안내합니다. 

타쿠미와 소바야 주인 카즈오와 물을 차에 싣는데 총성이 울립니다. 사슴을 잡는 사냥꾼의 총성입니다. 이 영화의 대립을 알리는 총성입니다.

카즈오는 “타쿠미 상, 건망증이 심하세요.”라고 말합니다. 타쿠미는 딸 마중 가는 것도 깜빡깜빡 잊습니다. 대자연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그냥 시간이 흘러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16분 10초, 하나짱을 데리러 학교로 가는 차 안의 타쿠미 얼굴에 역광인가 빛이 스칩니다. 무슨 전파 방해 하는 듯한 기계음이 들립니다. 아이들이 이상한 자세로 멈춰 서 있습니다. 아이들이 굳어 있는 갑작스런 장면이 당황스럽다. 세상이 멈추었는가, 영화가 판타지로 들어간 걸까. 화면이 오른쪽으로 수평 이동하면서, 한국에서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는 “달마대사가 넘어졌다네(だるまさんがころんだ)” 놀이를 하는 장면을 확인합니다. 이상한 기계음과 멈춰서 굳어 있는 아이들의 씬은 일종의 계시적(啓示的) 장면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타쿠미의 딸 야스무라 하나(花)는 타쿠미가 건망증으로 학교에 픽업하러 오지 않자, 혼자서 숲을 거닙니다.

여기까지가 1막입니다. 갑자기 1막이라고 쓴 이유는 이 영화가 연극으로 말하면 5막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막은 마을과 숲입니다. 숲과 시냇물이 흐르는 미즈비키쵸(水挽町)라는 가공의 마을로 30분 정도 진행되지요. 2막은 주민 설명회입니다. 글램핑 시설을 세우려는 연예사무소 직원 두 명이 마을 주민과 대화하는 설명회 장면으로 25분 정도 진행되지요. 3막은 직원 두 명이 연예사무소로 돌아와 기획회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4막은 두 직원이 마을로 다시 돌아가며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5막은 다시 마을과 숲입니다. 미즈비키쵸로 돌아와 벌어지는 일입니다.

 

갈등과 파레시아스트 
1막 2막 3막의 실제 촬영지는 배경으로 공기와 물이 맑고 숲이 울창한 나가노 현의 후지미마치(富士見町)다. 실제 촬영지는 나가노현 야쓰가타케산(八ヶ岳)입니다. 고원에 위치한 가공의 마을 미즈비키쵸는 도쿄에서 가까워서 최근 이주자가 늘고 있는 곳입니다.

이 평화로운 마을에 자본이 투입되며 급격한 변화가 예고되지요. 시골 마을에 글램핑(Glamping, グランピング)장을 건설하겠다며 도쿄의 기획사가 들어온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공연을 할 수 없어 경영난에 빠진 연예 기획사 ‘플레이모드’가 정부로부터의 보조금을 얻어 글램핑장을 계획한 것입니다. ‘플레이모드’의 직원인 타카하시(高橋)는 히라사와 마을 주민들에게는 글램핑장 건설이 관광지로서 지역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홍보합니다.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마을 사람들은 먼저 마을의 수원(水源)를 글램핑장의 오수가 오염시킬 수 있다는 지적합니다. 도시인들이 오면 심야에 밤새 시끄럽게 할 수 있고, 밤새 불 피우려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지적합니다. 건조지역이기에 대형산불이 일어날 수 있다며, 주민은 건설반대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금발 청년은 자연과 주민을 우습게 보고, 착공을 서두르는 기획사의 욕망을 정확하게 집습니다. 

“이것도 보조금을 타내려 보고하려는 형식적인 설명회잖아.”(45:21)

금발 청년의 분노는 지금까지 느슨했던 영화에 불을 지르듯 긴장미를 넣습니다. 흥분한 금발 머리를 말리면서, 이주 3세대라는 타쿠미가 일어나 “모두가 외부인입니다. 외부인에 의해 발전했고, 자연도 파괴됐다.”라고 말합니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자연을 주체로 볼 때 “모두가 외부인”이라는 뜻으로 다가오지요. 이제 타쿠미가 이 영화의 결론이 될만한 말을 합니다.
 
“문제는 균형이다. 지나치게 하면 균형이 깨진다.”(47:10)

윗물을 맑게 지켜야 한다는 마을 훈장의 훈시까지 들으며 플레이모드의 직원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감사하다고 하며 의견을 잘 전하겠다는 말로 마무리 합니다. 

주민설명회를 보는 관객이 당황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타쿠미가 ‘반말’을 하는데 누구도 왜 반말하냐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타쿠미는 반말을 쓸까. 그는 자신의 직업을 “이 마을의 심부름꾼”이라고 합니다. 그 예가 소바집에 약수물을 떠다주는 심부름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연을 대리하여, 담대하게 말하는 ‘파레시아스트’(parresiastes)입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자입니다. 모든 진실을 말하는 자입니다. “파레시아스트는 위험을 감수하는 자”입니다. “파레시아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이지요. “아첨에 저항하고, 아첨을 제한하며, 아첨에 반격을 가”(푸코, 『담론과 진실-파레시아』)합니다. 대자연에는 상하도 계급도 없습니다. 대자연의 진리를 대리하는 자는 거대 담론을 대리하기에 평서문으로 말할 뿐입니다.  

영화 전체에서 타쿠미가 존댓말을 쓰는 장면은 여자 회사원의 손을 치료해줄 때 딱 한 번 나오지요. 자연의 대리자 타쿠미는 숲에서 다친 마유즈미를 치료하며 “스미마센(미안합니다)”이라고 존댓말을 쓰지요. 대자연은 해없는 인간에게 너그럽다는 암시일까요. 

기획회의와 차 안의 대화 
3막은 연예사무소입니다. 배경은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의 유행이 지난 2020년대다. 바이러스에서 벗어나 공기 맑은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국가는 경제 불황 속에서 정부 보조금 제도를 내놓고, 기업들은 사업에 활로를 찾아내려고 응모합니다. 공연을 할 수 없는 연예사무소의 목적은 정부의 보조금을 따내는 데 있습니다. 글램핑장이 건설되든 안 되든 그것은 뒷일입니다.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보조금 비즈니스를 추진하는 사장은 대리인들에게도 나타나지 않고 온라인으로 회의를 주재합니다. 현장을 모르는 이들이 결정권을 갖지 못한 현장 담당자만 고생하는 ‘블랙기업’의 구조를 영화는 보여줍니다. 새로운 개발사업이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실한 보증은 없습니다. 그 지역에 자본과 중산층이 유입되고 부동산이 폭등하여, 저소득층인 원주민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4막은 마을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두 직원은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요. 연예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요양보호사 일을 했던 마유즈미는 연예사무소에 들어온 것은 평소 하고 싶었지만, 쓰레기 집합소라고 다카하시에게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회사를 그만두고 글램핑장의 관리인이 될 생각까지 합니다. 평범한 중년으로 살고 싶어하지만, 그의 삶은 이미 ‘블랙자본’의 얼개에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차 안에서 친밀하게 다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대화하는 장면은 뒷좌석에서 찍은 오버 더 숄더 샷입니다. 어깨 너머 저편이 중요하며, 저편과 어깨가 나오는 사람들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차 앞에 나오는 나가노 고원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두 인물과 저 고원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지요.  

 

도끼질과 약수물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 집으로 찾아갔을 때 타쿠미는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습니다. 타쿠미가 도끼를 그냥 쉽게 내려칠 때마다 통나무는 두 쪽으로 정확히 쪼개집니다. 타카하시가 한번 해보겠다며 도끼를 내리치지만 쉽게 통나무가 쪼개지지 않는다. 통나무 한쪽 쪼개지 못하면서, 자연을 다스리겠다는 경솔한 자들의 모습이 짧게 드러납니다.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세 사람은 소바 집에 가서 맛있는 소바를 나눕니다. 소바를 다 먹고 타쿠미는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회사에서 클렘핑장을 건설하려는 장소가 “사슴이 지나는 길이다.”라고 지적하는 장면입니다. 대자연을 대언(代言)하는 타쿠미가 묵직하게 지적했지만, “어디로든 가겠죠”라는 타카하시의 대답은 너무도 무책임합니다. 
 
이 때, 카메라는 타쿠미에서 어깨 뒤에서 찍는 오버 더 숄더 샷입니다. 오버 더 숄더 샷은 ‘인물과 인물이 연결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찍는데,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하마구치 감독은 타쿠미의 지적에 두 직원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줍니다. 정반대로 엄하게 꾸짖는 타쿠미의 모습을 정면에서 잡습니다.
 
사슴은 일본인들에게 신령한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딸과 함께 어린 사슴이 죽은 흔적을 보고, 또 사슴이 다니는 길의 사슴 발자국 흔적을 보기도 합니다. 

“사슴이 지나는 길이다.”

이 말은 이 영화 전체의 주제라고 할만큼 무게를 갖는 문장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도 ‘사슴신(シシ神)’이 등장합니다. 신사의 경내에서 기르며 소중히 여기는 사슴을 ‘신로쿠(神鹿, しん‐ろく)라 하여 소중히 여깁니다.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사진 출처=김응교 영화평론가

 이른바 사슴신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신라 백제의 금관에서도 사슴 뿔을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사냥을 하여 신록(神鹿)을 잡았다.”는 표현이 여러번 나오지요. 판타지 영화 <나니야 연대기>의 사슴인간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주인공을 살려냅니다. 영화 <해리포터>에서도 주인공 해리포터의 아버지는 하얀 수사슴으로 신비하게 나타나고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컷. 사진 제공=그린나래미디어

소바 요리를 위해 타쿠미가 깊은 계곡물에서 약수물을 떠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타쿠미가 말한 ‘심부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일에 회사 사람들은 함께합니다(1시간 23분). 마을 촌장이 말한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상류에 사는 사람에겐 의무가 있습니다.”라는 정언(定言)이 중요한 까닭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9분 53초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물 담는 씬을 영화 시작과 뒷부분, 두 번 보여주면서 촌장의 메시지를 관객의 마음에 새겨놓습니다.



균형을 향한 경고  
마을에서 총 소리가 나고, 총 소리가 났을 때 타쿠미는 긴장합니다. 클렘핑장을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슴을 사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어 하나 짱이 사라지고요.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짱을 찾아요. 

하나짱을 찾으러 가다가, 피 묻은 가시가 잠깐 나오는데, 그 피의 주인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회사원 마유즈미의 손에서 난 피일 수도 있지만, 총에 맞은 사슴이나 노루의 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 짱의 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짱은 총알 맞은 사슴과 함께 있습니다. 갑자기 타쿠미는 남자 직원인 타카하시의 목을 뒤에서 졸라 죽이려 합니다. 파란색 옷이 주황색 패딩을 목 조르는, 느닷없이 호러영화로 바뀌는 걸까요. 타쿠미는 왜 타카하시를 죽이려 했을까요. 죽은 줄 알았던 타카하시는 다시 일어나 몇 자욱 걷다가 다시 쓰러집니다. 

사실 타카하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슴이 한 복수를 타쿠미는 타카하시에게 대행한 것이 아닐까. 타카하시가 숲의 질서를 파괴시키려는 단초이기에 아예 처음부터 존재를 없애려는 것일까. 완전히 살해하지 않았더라도, 강력한 위협을 주는 행동이 분명합니다.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거의 죽이려고 했다는 경고(warning)가 중요합니다. 모든 원인은 이 행복한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던 외부 자본 그 담당자에게서 촉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는 이 마을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경고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영화의 스크린 안이 아니라, 세상에 주는 강력한 경고(警告)입니다.
 
타쿠미는 “문제는 균형이다. 지나치게 하면 균형이 깨진다(大事なのはバランスだ。やり過ぎたら、バランスが崩れる。).”(47:10)”라고 도시인에게 경고했습니다. 균형이 깨지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지 도시인에게 그대로 시연해준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갈 때 헐떡이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타쿠미의 숨소리이고 발자국 소리일 것입니다. 그 급작한 소리를 감싸는 밤의 숲이 있습니다. 마침내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멈춥니다. 균형을 찾았을 때 오는 평온이랄까. 거친 숨소리와 급한 발자국 소리가 멈추었을 때, 영화는 끝나지요.

사슴에게나 자연에는 ‘선/악’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연에는 거대한 허(虛)의 힘, 생명을 가진 본체, 힘에의 의지로 충만할 뿐입니다. 자연에는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지요. 그저 자연의 선으로 충만할 뿐입니다. 그 충만을 상징하는 것이 나무이며, 얼어있는 순수한 호수물입니다.

 

Q1. 사회자: 발제 잘 들었습니다. 제 생각을 조금 말하자면, 영화에서 오염수 방류라는 것은 그냥 상징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일본이 오염수를 방류했고, 전 세계 바닷물이 오염되고 있지 않습니까. 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 시기에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그것은 현재 현실 문제와 연관을 맺고 있는 영화라고 봅니다. 김응교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발제자: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현실 문제를 영상에 담아 왔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사회파’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그런 비판력 때문이지요. 그가 만든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도 지진이 난 지역과 원전으로 황폐화 된 히로시마 지역을 보여주지요.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쳐 지적하지 못했던 문제 지역으로 빨간 차를 몰고 가서 목도하게 합니다. 이번 영화에서 오염수 문제가 현재 일본에서 오염수를 방류하는 문제에 대한 암시적 비판이라는 말씀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일본 사회가 갖고 있는 특이한 배경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어떤 사회 문제를 직접 지적하면 대중으로부터 버림받는 집단 이지메 현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극우 사회에서 문제를 지적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 집단적 버림을 피하거나, 더 넓은 영향력을 위하여 암시적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예술 작품들이 많습니다.  

Q2.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요? 하나 짱이 죽었는지요? 연예기획사 직원 다카하시가 죽었는지, 그들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가 모호한데,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 발제자 :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를 거예요. 저는 발란스(ballance)로 봤어요. 발란스 곧 균형을 이루려는 암시로 보았습니다. 하나짱, 다카하시가 죽었는지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치명적인 위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카하시가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지지요. 다카하시가 자연의 관리인이 되고 싶다고 하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 원닝(warning)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Q3. 저는 ‘환경과 영화’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니체가 이렇게 썼지요. 자연은 인간과 관계가 좋을 때는 좋은데,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을 반드시 복수한다고 니체는 썼지요.  인간이 지구를 온난화 시키면, 자연이 인간을 복수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영화도 타쿠미가 자연의 대리인이라면, 자연이 파괴적인 인간에게 반드시 복수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봅니다. 환경 영화는 <The day after tomorrow>나 <설국 열차>처럼 이미 재난이 닥쳐 있는 ‘환경 재난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도 재난은 아니지만 ‘환경’에 대한 관점을 시사하는 중요한 영화라고 봅니다.  

Q4. 저는 ‘균형’이 중요하다고 봤어요. 저는 타쿠미가 다카하시를 죽이려고 죽인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루기 위한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목을 막았잖아요. 목을 막은 것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 것이겠죠.   

- 사회자: 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첨언한다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중요한 테마는 ‘오염’ ‘침범’이라는 문제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대자연은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기보다는, 다쿠미가 자연의 대리인으로 “간섭하지 마라”, “개입하지 마라”고 전하는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인간이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거든요. 인간은 끊임없이 대자연을 오염시키고 침범하는 존재가 바로 바이러스 같은 인간이거든요. 

그 다음 하나짱과 사슴은 어떤 관계일까요. 저는 사슴이 하나이고, 하나가 사슴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변신’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많지요. 하나짱이 사슴이 되고, 사슴이 하나짱이 되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논리적이지 않은 데까지 관객을 이끌고 가는 것이 하마구치 감독의 세계관 혹은 인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Q5. 네, 저도 심영섭 선생님의 해석에 공감이 가요. 복수보다는 선을 넘으면 단호하게 경고를 주는 자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봅니다.  

Q6. 이 영화의 결말이 델리아 오언스 장편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2018)과 비슷해요. 영화로도 나왔지요. 거기에서도 자연을 파괴한 자에 대하여, 자연의 균형을 이기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요. 균형이랄 수도 있지만, 인간이 폭력을 행사할 때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보여주는 거 같아요. 그 많은 동물 중에 사슴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동물 중에 연약하고 착한 사슴이 끔찍한 일을 행했을까 싶은데, 바로 사슴처럼 착한 동물까지도 자연의 균형을 위해서는 이런 결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복수보다는 균형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연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고’의 개념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Q7. 영화를 보고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여러 관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균형을 이루려 한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왜 제목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가’인지요? 그럼 ‘선’은 존재하는가? 선도 존재하지 않는가, 라는 말인지요.  

- 사회자: 과연 ‘악’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봐야 ‘악은 존재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 발제자: 예, 우리는 ‘악/선’을 구분하지만, 이 영화에서 악이나 선이란 구분 자체를 달리하는 거 같아요. 이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이지요. 영어 포스트를 보면  “Evil Does Not Exist”입니다. 모든 포스터, 인도든 프랑스어든 이 영화의 모든 포스터에 NOT, 곧 존재하지 “않는다”(NOT)를 붉은색으로 강조합니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오수를 버리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악’일텐데, 그것마저도 자연에서는 그 구분을 거부하는 것이죠. 인간이 악이 뭐고, 선이 뭐고, 구분하지만 대자연에는 악이나 선의 개념 자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닐지요. 

Q8. 영화를 볼 때 ‘선/악’이라는 이분법적으로 편하게 보려 했어요. 그런데 감독은 그런 이분법을 뛰어넘으면서, 선주민(先住民, aboriginal)이라는 표현을 쓰셨지요. 그 애모리지널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자연은 우주의 선주민이지요. 우리 인간은 뒤에 온 외부인이고 바이러스 같은 역할을 하지요. 물론 좋은 의미의 외부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요. 자연이 선주민의 입장에서, 영화의 출연진인 인간을 보는 것이지요. 문학 작품에서도 보면, 대자연의 초월적인 상황으로 많이 쓰곤 하지요.   

Q9. 신화를 보면 자연을 무섭고 악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요. 인간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자연도 있지 않은지요. 시간의 문제도 있을 거 같아요. 글램핑이 오기 전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대자연에 있어서 본래 악이 없었는데, 인간이 개입하면서 악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나오지만, 자연은 인간이 보는 선의 존재로만은 아니지요. 자연은 무서운 심판이 있기도 하지요. 

- 발제자: 지금 하정 선생님 말씀처럼 이 영화에서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너무도 아름답고 악이 존재하지 않지요. 끝나는 장면을 보면 인간이 생각하는 악의 대한 판단도 나오는 거지요. 

- 사회자: 하정 선생님의 말씀에 보내자면요. 이 영화는 감독이 자연을 해석하는 재현(再現)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는 자연이 갖고 있는 초월적인 진리를 현현(顯現)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진리를 현현시킬 수 있는 감독은 대단히 드물다고 봅니다. 
 
- 발제자: 이 영화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글도 본 적이 있어요. 불교나 기독교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겠지요.  
  
Q10. 예, 자연에 대한 신앙으로 볼 수도 있겠어요. 얼마전 중앙박물관에 가서 북미 원주민들의 신앙이 어떠한지 들은 적이 있어요. 인디언들은 나무를 하나 뵐 때도,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고 한답니다. 모두 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신앙이겠지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지요. 자연을 무시하는 시대에 이 영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11. 발제를 들으면서, 교수님이 일본에서 거주하셨기에 제가 모르는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영화에서 반말이 왜 중요한지, 나가노의 영화 촬영 배경지 등 모르던 사실을 배웠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면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번 토론을 들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다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교수님의 관점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2011년 3월 11일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여러 다큐를 만들었잖아요. 그가 만든 <아사코>(2018)나 <해피 아워>(2018)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고호쿠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만든 다큐멘타리잖아요. 계속 동일본 대지진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 발제자: 첫째, 기독교에서는 환경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지요. 절대자가 세상을 창조했을 때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선악과가 바로 자연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대자연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지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장 28절)고 했는데, 이때 “정복하라”라는 원어에는 “모시라”는 뜻이 있지요. 자연을 잘 모시라, 관리하라는 뜻인데, 자연을 파괴했지요. 이 영화는 성서가 주는 근본 메시지와 비견할만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둘째 동일본 대지진과 하마구치 감독과의 관계지요. 2011년 이후에 단편이 아니라,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아픔을 백 분 짜리 이상의 다큐로 계속 찍었지요. 그러다 보니, 대중적인 달콤한 영화가 아닌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에서 사랑받고 있지요. 한국에서는  이 영화가 흥행되지 않았지만, 현재도 전국에서 이 영화가 상영 중이에요. 단순히 대중성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지요. 

Q12. 반말을 썼다고 했는데, 자연이 그렇게 위압적인 반말을 하는 것이 어울릴까요. 명령형으로 썼다고 봐야 할지요.   

- 발제자: 반말이라기보다, 평서문으로 표현했다고 봐야겠어요. 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자연이 말할 때는 명령형이 아니라 평서문으로 보아야 할 거예요. 평서문이지만 다카하시 입장에서는 위압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는 문장이지요. 

Q13. 네, 일본어 대사가 명령보다는 충고로 들렸어요. 

- 사회자: 이제 10분 정도가 남았는데 마지막 하실 말씀 있으신 분 계신지요.  

Q14. 요즘 제가 읽는 책 중에 에릭 잠파 앤더슨이 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란 ‘혁명적 환경 철학’ 책이 있어요. 자연이 살지 못하면, 인간이 살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강이나, 산이나, 시냇물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는 책이지요. 인간이 어떡하든 자연은 홀로 의연하게 있다는 메시지는 이번 영화를 보며 느꼈습니다. 인간이 자연에게 못하면  자연이 인간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로 인간 행동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자연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았습니다.    

Q15. 동의합니다. 자연은 의연할 뿐인데, 인간이 아파할 뿐이지요. 

- 사회자: 남은 시간들 말씀 안 하신 분들 말씀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Q16. 이번 문제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일어나지요.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는 문제 같은 것이지요. 태양 열을 발전시킨다고, 태양 발전을 일으키는 태양열 발전기는 숲을 밀어 붙이고 설치하는 문제들도 있지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균형’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Q17. 제목만 봤을 때는 산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같은 영화인 줄 알았어요.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영화를 피프레시를 통해 알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18. 발제와 토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잘 설명해준 걸작이라고 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비판적 시각은 분명 세계 영화사에 의미를 주었다고 봅니다. 
  
- 발제자: 오늘 최고의 비평가들과 여러 시민들의 고견을 듣고,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도움 주신 내용들 생각하면서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피프레시와 심영섭 회장님과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 사회자: 네, 인상 깊은 발제를 해주신 김응교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영화평론가로서 볼 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분명 현재의 거장이고, 미래의 거장입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선생님들 오늘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8월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피프레시 월요시네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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