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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냥 무조건, 당신의 찬란한 그때를 응원합니다 - <빅토리>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냥 무조건, 당신의 찬란한 그때를 응원합니다 - <빅토리>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4.09.1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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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보고 싶은 장면들이 있다. 그리웠던 어떤 것 혹은 바라마지 않던 어떤 상황, 그러니까 오글거림을 눌러담아 툭 던졌을 때 퍼지는 따뜻함을 기대하는 것처럼. 아마도 너무나 희소해서 모두가 겪을 수 없을 것이기에 기다려지는 이 순간들은 종종 환상처럼 그려진 장면에 기대어 나에게도 일어나길 꿈꾸게 한다. 영화가 이를 보여줄 때 누군가는 너무나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라며 냉소를 보낼지 모르지만, 또 누구가는 그 행복을 기대하며 간직할 지 모를 일이다. 그 행복의 힘을 영화 역시 알고 있지 않을까, <빅토리>가 담은 그때의 그 모습이 그런 것처럼.

영화 <빅토리>는 경험한 적도, 아마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를 무조적인 응원 그 자체로 영화를 채워간다. 1999년의 거제, 댄서가 되겠다는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춤을 출 수 있는 곳을 마련하겠다며 동아리원을 모을 때에는 듀스의 ‘나를 돌아봐’와 디바의 ‘왜 불러’로 에너지를 채운다. 이와 함께 삐삐와 펌프, 카세트 테크와 그때의 스타일 등은 이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예전의 언젠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바로 그 순간의 발랄함으로 충분한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바로 이 두근거림, <빅토리>는 열렬한 응원으로 바로 그 감정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음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음을 풀어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빅토리>의 응원은 어딘가 어색하다. 이 정도까지 쏟아지는 응원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쉽사리 친해지고 너무 쉽게 화해하고, 눈앞의 기회를 나를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포기하고, 또 모두가 내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에 관심을 기울여 주고 심지어 환호를 보내주는 것은 분명 환상이다. 게다가 1999년이라는 IMF 직후의 시간, 필선의 아버지 우용(현봉식)을 통해 알 수 있는 상우 조선의 상황과 바로 이 조선소가 한 지역을 먹여살리던 거제라는 공간에서 예상되는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행복 가득한 찬가는 더욱 작위적으로 읽히기 쉽다. 영화는 필선이의 활기와 우용으로 읽히는 상황의 균형을 잡지 못했고 이는 정확한 시기를 짚어 명시한 작품에선 분명 허점이 될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원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바로 그 믿음을 <빅토리>는 행복하게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어느 때보다 응원이 필요한 이때 <빅토리>는 우직하게 그 응원을 보내주었다. 영화는 언젠가 세상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지금은 무작정 원하는 것을 해보고 싶은 누군가를 감싸주었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느냐며 물어봐 주었다. 언젠가 그런 때가 있었던 듯 했지만 이젠 세상이 어렵고 무서워 묻어 두었던 그때, 그래도 그 기억 하나로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왔던 그 동력에 대해 영화는 찬란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빅토리>가 보여주는 환상은 믿고 싶어진다. 시장 한복판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그 모습도, 집회 현장에서 누군가의 아버지들과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그 돌발적인 상황도, 가장 화려하게 비상해 오르는 그 모습들까지도 한번 쯤 바라게 되는 것이다.

 

<빅토리>는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그 흔한 우등생 한 명을 중심인물로 삼지 않았다. 교실을 채운 학생들은 춤에 환호하고 종말론을 믿거나 강아지와 함께 등교하며, 짝사랑 하는 이를 위해 멋진 모습으로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었다. 선생님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 글자라도 더 보라고 말하기보다 아이들이 종치면 빨리 일어서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클럽에서 아이들의 싸움을 목격하면서도 시선을 돌려 춤을 추고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보다 축구의 우승을 기원하는, 경직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정해진 길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빅토리> 속 인물의 설정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흔한 갈등과는 거리를 둔 채 다른 길도 충분하다고, 어디에서나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고 또 그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빅토리>의 무한 긍정이 불편하게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믿고 싶은 환상이 쌓아 올린 세계가 우리가 원하던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함께 했어도 어른이 되면 각자의 삶에 찌들어 버린 <써니>(2011) 속 ‘칠공주’ 언니들의 모습이 현실이라 해도 <빅토리>의 ‘밀레니엄 걸즈’는 굳이 그 모습까지 미리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응원을 하는 이유이며 안 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하게 할 힘이 될테니까. ‘밀레니엄 걸즈’는 자신들의 응원으로 즐거워하는 이들을 눈에 담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이 즐거워하는 순간을 맛보며 그 힘을 스크린에 담았다. 이렇게까지 발랄해도 된다고 꾹꾹 눌러 담은 <빅토리>의 응원이 많은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길 기원해 본다. 덧붙여 그들의 응원이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응원 그 자체로 보일 수 있게 해준 ‘밀레니엄 걸즈’ 모두에게도 기대 어린 응원을 보낸다. 

 

<빅토리>(2024)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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