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감독 또는 영화인들의 부고를 듣는 건 흔히 접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게 했던 사례 중의 하나는 1996년 3월 13일, 폴란드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망 소식이다. 당시에는 집에 팩스가 있었는데, 새벽에 도착한 팩스(누가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54살에 불과한 키에슬로프스키의 때 이른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접하고 황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연출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와 <천국>, <지옥>, <연옥> 3부작을 찍기를 고대했는데 수포가 되고 말았다.

키에슬로프스키는 활동하던 시기에는 연출하는 영화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빨리 잊혀진 것 같아 더욱 안타까운 감독이다. 그런데 아쉬움을 달래듯 그가 남긴 마지막 연작 <세 가지 색: 블루(1993), 화이트(1994), 레드(1994)>가 재개봉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찾아왔다.
키에슬로프스키는 하나의 주제 또는 명제를 놓고 그것을 스토리텔링으로 풀기를 즐겼기 때문에, <십계>와 <세 가지 색> 등의 연작이 탄생했다. <세 가지 색>의 주제는 프랑스 국기의 파란색, 하얀색, 빨간색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이다. 1993년에 출범한 유럽연합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블루>는 파리에서, <화이트>는 바르샤바에서, <레드>는 제네바에서 각각 촬영하기로 기획했다. 전설적인 예술영화 제작·배급사 MK2의 마린 카미츠(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극장전>(2005)을 제작했다)와 변호사였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가 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키에슬로프스키 영화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즈비그뉴 프라이스너는 세 편의 연작이 완성되기 전에 음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키에슬로프스키 영화는 다루는 주제를 명확하게 내세운 다음 그 주제에 대해 역설적으로, 아이러니하게, 시니컬한 감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자유, 평등, 박애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블루>에서는 인간에게 자유가 진짜 가능한지, <화이트>에서는 평등한 인간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레드>에서는 인간에게 박애가 불필요한 건 아닌지 하는 방향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해간다.
<블루>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영화 도입부에서 쥴리(쥘리에트 비노슈)는 자신이 운전하던 차에 사고가 나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만일 쥴리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다면, 너무나 잔인한 방식이지만 아무튼 기도가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아이디어에는 <십계> 연작을 이끌어가는 구약의 무자비한 하나님이 어른거린다. 쥴리는 가족으로부터, 책임과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가진 돈도 충분하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따라서 쥴리는 과거를 잊고 진짜 자유롭게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남편과 살던 집을 떠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사한다.

만일 인간이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불행한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인간에게는 기억을 제어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것을 잊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쥴리는 시시때때로 강타하는 기억의 습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쥴리는 기억을 꾹꾹 눌러 억압한 다음 잊어버렸다고 치부했기에 조건이 될 때마다 억압한 기억이 되돌아온다. 다시 말하면 기억의 감옥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점점 얽혀들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아무리 어떤 사람과도 어울리지 않으려고 해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쥴리는 훌륭한 작곡가로 존경했던 남편이 죽기 전까지 외도를 했으며, 외도의 상대 여자는 임신한 상태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쥴리는 과거와의 단절이 무색하게 제어할 수 없는 질투의 감옥에 사로잡힌다. 이미 6개월 전에 죽은 사람을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그녀는 덫에 걸린 듯 빠져나오지 못한다.
결국 쥴리는 과거와의 단절에서 자유를 얻으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다시 세상과 화해하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편의 외도와 태어날 아이를 인정하는 긍정을 통해 또는 일종의 포기를 통해, 비로소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를 얻는다. 동시에 밀어두었던, 계속 외면했던 ‘애도’가 시작된다. 처음 흘리는 쥴리의 눈물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진 출처: 온포인트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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