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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신문의 생존을 위한 '우리'
독립적 신문의 생존을 위한 '우리'
  • 세르주 알리미
  • 승인 2012.10.12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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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사상의 근거는 무엇인가?> ‘색깔을 밝혀라’ 시리즈 중, 1973-제라르 프로망제르

자신의 대의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데 애석해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식의 일상적인 자기 변명을 스스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한 권의 책에 '너무 오랫동안' 몰입하거나, 길거리나 박물관을 한가롭게 산책하거나, 1시간 30분 동안 영화를 관람할 시간도 이젠 더 이상 없다는 얘기다. 잘 아는 주제에 대한 것이 아니면 그 기사를 아예 읽지도 않는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관심으로 인한 긴급한 요구로 즉각적인 방해를 받는 경우가 아닌 한, 어쨌든 뭘 옹호하거나 뭘 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시간이 부족하게 된 부분적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한 탓이다. 이동 속도가 빨라졌고, 연구나 정보의 전파나 통신의 속도도 빨라졌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졌다. 이와 동시에 속도에 대한 요구가 각자의 시간 사용에 계속해서 부담이 된다. 해야 할 일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항상 뭔가에 접속돼 있고, 빈둥거리지 못하게 됐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1)

때론 돈도 부족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럴 만한 여력이 없다. 파리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잡지 한 권 값이 유로화로 말보로 담배 한 갑의 값어치도 안 되지만, 많은 직장인과 실업자, 은퇴자들에겐 이 돈도 하찮은 비용이 아니다.

이런 이유들이 유료 언론에 대한 독자들의 이반 현상을 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과거 구독자들의 일부가 잡지 구독을 포기한다. 집배원이나 가판대 상인들이 기대하는 세계로 열린 언론의 창은 이미 정해진 시간 속에 추가 구독을 해야 한다는 제약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유료인 경우 특히 더 그렇다. 프랑스에서 인터넷 서비스 '프리'의 창업자이자 대주주이고, <르몽드>의 공동 소유주이기도 한 자비에르 닐은 "앞으로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신문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재정 후원이 컴퓨터 화면이나 태블릿 판형에 대해서 이뤄지는 것이면, 아마 걱정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태블릿 판형이 컴퓨터 판형을 대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학문과 문화, 오락 등에 대한 정보가 훨씬 빨리 전파된다는 점은 훨씬 좋은 일이다. 게다가 사주의 이윤(이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는 정기 간행물들이 발행을 중지한다고 해서, 민주정치가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기술이 과거와 똑같이 기자들의 일자리나 물적 자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처럼 무보수로 일하지 않는다면, 즉 다른 데서 수입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언론 직업은 최악의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언론 직업은 더 이상 미래가 확실하지 않은 직업이 됐다.

한때는 언론이 열차, 지하철, 카페, 정치집회 같은 장소에서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그런 장소에서 몇 사람이나 '공짜'가 아닌 신문을 펼쳐 보고 있는가? 그런 막연한 인상이 문제가 아니다. 퇴조의 현실은 수치로 그대로 확인된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신문 발행 부수가 지난 5년 동안 17% 감소했다. 신문의 퇴조 현상은 확연해졌다. 대선 열기가 뜨거웠던 프랑스에서는 선거운동 기간에도 거리의 신문가판대를 찾는 독자들의 발길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전체 일간지 판매 부수는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7.6%나 줄었다. 지난 7월과 8월 올림픽 특수기간에는 프랑스 최대 스포츠신문 <레퀴프>의 판매 부수조차 줄었다.

부수 하락을 막기 위해 비정론지들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면서 독자를 유혹하는 기사들을 많이 싣는다. 도발적 만평을 뜬금없이 싣거나, 근본주의자의 과격한 집회 등의 기사를 포함해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기사들을 마구 찍어댄다. 텔레비전의 정보 채널도 이런 소란을 계속해서 증폭시킨다.    3면에 계속 

어느 정도 과장해야 언론의 관심을 끌 것인지 추측해보는 일과, 화난 블로그의 아래쪽 댓글에서 '좋아요' 이상을 독자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정보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일 등은 애들 장난처럼 아주 손쉬운 일이다. 대부분의 언론 사주들이 몇 시간 동안 소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하는, 저속한 기사나 재난을 다룬 기사들이 차지하는 부분이 계속해서 늘어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공짜로, 그것도 아주 풍부하게 찾아볼 수 있는 마당에, 독자들이 돈을 내고 그런 기사를 읽으리라 어떻게 기대하겠는가?

특히 온라인을 한번 살펴보자. 오늘날 매일 신문을 구독하는 프랑스인이 3500만 명이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언론 사이트에 접속하는 인터넷 이용자는 2500만 명이다. 그러나 인터넷 이용자들은 언론 사이트에 공짜로 접속하기 위해 큰돈을 들여 컴퓨터나 스마트폰, 태블릿을 서둘러 구입한다. 하지만 네티즌들은 돈 없이도 사는 사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정보를 취재·편집하고 교열하고 검증하는 언론인들은 온라인 독자에게서 거의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경제적 이득은 한쪽으로 쏠리고, 다른 쪽은 '공짜'(2)로 인한 부담을 전적으로 지게 되는 기생적 경제구조가 점점 고착되고 있다.

열독률 1위 하고도 적자 때문에 기자를 해고해야

예를 들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인터넷 덕분에 영국 내에서 1위, 전세계적으로 3위의 사이트가 됐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디언>은 지난해 570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해 100여 명의 기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늘어나는 사이트 방문에 대응해 더 많은 투자가 요구되지만, 인터넷 사이트 방문자 수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신문가판대의 판매 감소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약 600만 명의 영국인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 건 정도의 <가디언> 기사를 읽지만, 매일 21만1천 명만이 신문을 사본다. 인터넷 공짜 구독이 가능하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는 적은 독자 수도 계속 줄고 있다. 필연적으로, 이런 공짜 여행은 엔진에 기름이 다 떨어지면서 언젠가 멈추게 될 것이다.

언론이 적자를 보게 된 것은 광고와도 관련이 있다. 처음에 온라인 매체의 '공짜' 모델은 상업적 라디오방송의 경제 논리를 모방했다. 나중엔 그날그날 벌어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새벽에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눠주는 무료 신문의 경제 논리를 흉내냈다. 먼저 상업적 라디오방송들(<RTL> <Europe 1> <NRJ> 등)이 어떻게 해왔는지 우리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다. 고막에 고통을 주는 스폿광고 사이사이에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두 번째로, 무료 신문인 <디렉트 마탱>과 <메트로>가 공짜 사회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이는 공짜 사회가 무료 신문에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는 조건에서 가능한 일이다. (<디렉트 마탱>은 프랑스 재벌 볼로레 그룹의 뱅상 볼로레가 소유주이고, <메트로>는 프랑스 이동통신사업자 부이그 텔레콤의 자회사이자 프랑스의 양대 공중파 민영 텔레비전 중 하나인 <TF1>이 발행한다.) 많은 독자와 청취자들을 맞바꿔 광고주들에게 직접 광고비를 받아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온라인 매체의 경우, 이런 계산이 확실하게 빗나갔다. 사이트에 방문자들을 끌어들여 계속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광고 자원에 대한 접근은 찔끔찔끔 이뤄질 뿐이다. 왜냐하면 사이트 수익은 무엇보다 먼저 검색 사이트의 이득으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국일간신문노조(SPQN) 위원장인 마르크 푀이예에 따르면, 검색 사이트는 '몰로크'(어린애를 제물로 바쳐 모신 셈족의 신)처럼 광고 수입의 거의 전부를 빨아가는 거대 광고관리회사가 됐다. "2000~2010년 검색 사이트 광고액은 0에서 14억 유로로 늘었지만, 온라인 언론 사이트의 전체 광고액은 0에서 2억5천만 달러로 늘어나는 데 그쳤다"(3)고 푀이예는 정확한 수치를 예시했다. 구글은 온라인 독자들 각각의 취향과 구독 성향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있고, (페이스북처럼) '타깃광고'로 이용할 수 있는 다량의 개인 정보를 광고주들에게 팔아넘길 능력이 있다. 구글은 아일랜드나 버뮤다 제도에서 '조세 최적화'를 해내는 기술에서도 고수로 통한다. 아주 부자인 이 거대 다국적기업은 세금도 거의 내지 않는다.

언론 경기가 안 좋을 때, 신문사들 대부분은 약간 불순한 지표에 의존해 실상을 은폐한다. 일간지 <에코>나 <리베라시옹> <피가로>는 20% 이상 유료 부수의 일부가 실제로는 열차역이나 식료품점, 고급 호텔, 경영대학, 주차장 등에 공짜로 뿌려진다. 정기구독자라고 주장하는 수도 초저가 할인 판촉 기술이 없다면 형편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유쾌한 표정을 잘 짓는 판매국장은 15유로에 주간지 13권을 구독하는 조건에 립(프랑스의 전통 시계 제조업체)의 컬렉션 시계 한 개를 보너스로 제공하는 판촉활동을 한다. 화려한 색깔의 스카프를 하고 다니는 주간지 <렉스프레스> 사장은 더 심하다. 45유로에 잡지 45권을 구독하는 조건에 빛과 소리로 잠을 깨워주는 자명종 라디오를 보너스로 준다.

웹사이트의 방문자를 부풀리는 데는 또 다른 속임수가 이용된다. 프랑스 무기재벌 세르주 다소가 소유한 일간지 <피가로>가 연예나 기상예보에 특화된 사이트를 매입한 이후, 온라인으로 서커스 좌석을 구매하거나 일광욕을 즐기기 위한 휴가 계획을 문의한 인터넷 이용자는 그 자체만으로 일간지 <피가로> 독자로 곧바로 집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줄어드는 <르 디플로> 판매 부수를 지켜보며

그렇다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지난 1월부터 프랑스판 부수는 7.2% 줄었다. 사람들은 시간도 돈도 없다. 다른 때보다 훨씬 오래갈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위기에 직면해, 자체 해법을 찾을 수도 없기에 의기소침해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경제위기는 정치적 출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사회·경제적 질서에 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수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고 수입이 추가로 줄어든 결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광고 수입에 못마땅해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총매출의 5% 선을 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광고 수입은 총매출의 2%도 안 됐다. 정기구독 가격에 대한 비타협적 정책(<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자체 출판물을 할인 판매하거나 독자들의 주문과 다른 것을 제공하지 않았다)과, 매년 같은 시기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기부를 호소한 캠페인 덕분에 적자 수준을 미미한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적자를 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내년에 이런 흐름이 바뀔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런 상황에 약간의 광명이 비치고 있다. 앞으로 몇 달 안에 전자책 형태의 새로운 판형이 서비스될 것이다. 독자들은 잡지의 페이지와 레이아웃이 그대로 유지된 원래 판형을 모든 컴퓨터의 화면 크기에 맞춰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태블릿과 다른 이북 리더기를 위한 특별 판형도 똑같이 준비되고 있다. 이밖에 과월호 아카이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감안해 최신 DVD도 곧 판매할 것이다. 또 1952년 5월 창간호부터 최신호까지 모든 기사를 검색해볼 수 있는 서비스를 조만간 아주 착한 가격에 제공할 것이다. 끝으로 정기독자나 비정기독자도 일정액만 내면, 며칠 동안 모든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가 곧 이뤄질 것이다. 내년 초로 예상되는 웹사이트의 이 새로운 기능들을 갖추기 위해 그동안 장기적으로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이런 변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권 독립을 보장하는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판매도 똑같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필요가 있다. 이는 우선적으로 사람들이 우리 신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급망이 해체돼 거리나 상점의 신문가판대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보기조차 힘들 것이다. 최근 거리나 상점의 신문가판대 수백 개가 폐업했다(2011년에만 918개 문을 닫았다). 배급망의 마지막에 담당하는 직업의 노예로서 엄격한 시간표에 얽매여 살아야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노동조건 속에 '공짜' 신문들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과 첫 접촉이 이뤄지는 것은 온전히 그들 덕분이다. 탐사보도와 분석보도를 담은 우리 신문을 아직도 정기구독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떤 다른 방법으로 알릴 수 있을까?

통상적이지만 아주 말이 많은 동종업계의 우호적인 언론 리뷰 보도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경우에만 갑자기 침묵을 지킨다. 우리 수습사원들 가운데 한 명의 시간표에 맞춰 편의상 선택한 2012년 3월19일~4월20일 한 달 동안, <유럽1> <RTL> <프랑스 앵테르>의 라디오방송이 언론 리뷰 보도를 통해 133개 신문이나 잡지를 언급했다. <르피가로>가 124회, <리베라시옹>이 121회 언급됐고, 축구잡지 <프랑스풋볼>이나 아동잡지 <피스쿠 마가진>까지 언급됐다. 하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프랑스 주요 잡지(30가지 언어로 51가지 에디션이 발행)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해주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도 우리의 네트워크는 독자 여러분

그러나 이 점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바로 독자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월간신문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게 하고, 지적 모험과 사회 참여에 대한 우리의 사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모든 '논쟁'에 일일이 대응하거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행동하거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온통 쏘다니는 것 같은 일들이 화급하게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주변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것도 여러분이 할 일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질러 대는 곳을 벗어나 한 달에 한 번쯤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점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것이다.

독립적인 신문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일까? 독자들이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돕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보를 갖고 속이는 세상의 소란 속에서 약간의 질서를 찾게 해주는 일이다. 자신들의 싸움에 대해 침착하게 생각하면서 그 싸움을 불러온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런 자를 세상에 널리 알려주는 일이다. 지도자의 행동이 그가 한 말과 어긋날 때 그 준거가 돼 권력의 자리에 결코 머물 수 없도록 하는 일이다. 서양의 유산, 즉 제2차 아편전쟁(1860)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한 베이징의 원명원 약탈과 방화, 환경의 파괴 같은 죄악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같은 가치 있는 것들, 그리고 알제리 전쟁과 '옷가방 운반자들'(Porteurs de Valises·1954~62년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공산주의자 프랑시스 장송이 이끈 '장송 네트워크'가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요원들에게 돈과 서류 등을 운반해주는 일 등을 해 붙인 이름) 등을 망각한 문명의 충돌과 같은 빗장걸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식민질서를 해체 중인 신흥국가들, 즉 '남(南)의 세계'에도 반동적 세력과 기생적 '엘리트', 그리고 그런 엘리트들에 싸우는 반대운동(예를 들어 대만의 전자 대기업 폭스콘과 중국 선전의 노동자들) 등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다.

인간을 위해 투쟁하는 신문을 위해

독립적인 신문의 진정한 역할은, 뒷걸음질하고 체념하는 이 시대에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생태적 새로운 관계의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4) 끊임없이 사회민주주의의 분발을 촉구하고 야단치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금융거래세(5)와 소득상한제(6) 같은 개념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칼럼에서 처음 시작됐다. 두 개념은 이후 많은 진전이 이뤄졌다. 많은 언론보도가 이뤄지면서, 지난 2월호에 실린 소득상한제에 대한 기사에 영감을 받은 사회당 대선 후보였던 프랑수아 올랑드가 연간 100만 유로 이상의 고소득에 대해 75%의 소득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언론은 지구를 구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꿋꿋하게 싸워온 사람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산업가와 기업의 이익과 항상 한편일 필요가 없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이 점을 상기시켜준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신문의 생존과 발전은 이를 제작하는 소규모 팀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열성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도 독자 여러분에게 똑같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우리 모두 함께 필요로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자.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발행인 

번역•류재훈 <한겨레> 온라인 국제판 에디터.

(1) 데보라 코레주(Déborah Corréges), ‘속도의 폭군’(La tyrannie de la vitesse)’, <Sciences Humaines> 2012년 7월호(239호).
(2) 세르주 알리미, ‘우리의 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 http://www.monde-diplomatique.fr/carnet/2010-10-07-information.
(3) <Correspondance de la presse>, 2012년 9월17일.
(4) 베르나르 프리오, ‘사회적 분담금, 해방의 지렛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2월호. ‘유토피아의 시대’ < Maniére de voir >, 2010년 9~10월호(112호).
(5) 이브라힘 와드(Ibrahim Warde), ‘토빈세 프로젝트, 투기꾼들의 증오의 대상이지만 금융단속관들의 목표’(Le projet de taxe Tobin, bête noire des spéculateurs, cible des censeurs ), 이냐시오 라모네, ‘시장을 무장해제하라’(Désarmer les marchés), 각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7년 12월호.
(6) 샘 피지가티, ‘최고소득 상한을 쟁취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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