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트 로커>로 돌아오기까지 험난했던 여정
<특전 유보트>(1981), <붉은 10월>(1990), <크림슨 타이드>(1995), <U-571>(2000)은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잠수함 소재 작품들이다. 캐서린 비글로우(Kathryn Bigelow)는 과거 명작들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지, 여러 중소 제작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까지 끌어 들여 <K-19 위도우메이커>(2002)를 선보였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한창 냉전 중이던 1961년, 소련 해군 최초로 탄도 미사일을 탑재한 핵잠수함 K-19가 미사일 발사 훈련을 위해 출항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소련의 자부심이었던 K-19는 1959년 진수되었고 이듬해에 취역했지만 잦은 고장과 이로 인한 인명 사고 때문에 원폭이 투하되었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히로시마’ 혹은 영화의 제목처럼 ‘과부제조기(wodowmaker)’로 불렸다.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자마자 원자로에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원자로가 폭발하면,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전 지구적 대재앙이 닥치게 된다. 7명의 승조원들이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하고 수 십 명이 후유증으로 시달린 K-19의 엄청난 비밀은 소련이 해체된 지 30년이 지나 공개되었다. 이런 드라마틱한 소재를 영화화한 <K-19 위도우메이커>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폭풍 속으로>(1991)에서도 그랬듯이 생각과 관점이 다른 두 인물을 동일한 디제시스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잠수함이라는 닫힌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반목하는 상대와 매순간 같이 호흡해야하고 그러면서 갈등은 급속도로 상승한다. 인물의 절대고독을 상징하거나 때로는 숨 막히는 스펙터클로 기능하는 우주선과 잠수함의 황홀한 바깥 풍경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감독들이 선호하는 소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사건과 연관되면서 인물의 갈등이 폭발하는 잠수함의 공간적 특이성은 드라마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성을 획득하기 위해 심하게 플롯을 왜곡할 필요도 없다. 데뷔한지 20년이 지나 지천명에 이르러 비글로우의 솜씨도 이제는 원숙해졌다. 당연히 <K-19 위도우메이커>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도 좋았다.
하지만 비글로우에겐 운이 따르지 않았다. <K-19 위도우메이커>는 9.11이라는 희대의 테러 사건이 벌어진 해에 크랭크인해서 이듬해인 2002년에 개봉했다. 바로 이 개봉시기가 발목을 붙잡았다.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최초의 사태 이후, 자국 우선주의 국제 정책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부 들렸지만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배타적인 애국주의가 팽배해졌다. 그런 시절에 과연 적국 군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더군다나 기대했던 시원한 액션도 부재한 답답한 잠수함 이야기를 찾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1억 달러로 추정되는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북미대륙에서는 3,600만 달러만 회수되었다. 그리고 비글로우는 6년을 야인으로 떠돌았다. 망나니 바이크 족을 그린 데뷔작 <러브리스>(1981)와 평단의 주목을 받은 <죽음의 키스>(1987) 사이에도 6년간의 침묵이 있었지만 <K-19 위도우메이커>와 <허트 로커>(2008) 사이의 침묵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비글로우는 <러브리스>, <죽음의 키스>, <블루 스틸>(1990)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전남편(<폭풍 속으로> 제작을 계기로 결혼)인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도움으로 <폭풍 속으로>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 작품 이후 자신의 강점을 잊은 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며 살았다.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는 인간의 기억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장치를 이용한 SF적인 관음증 그리고 당시 횡횡했던 인종차별과 공권력 남발을 엮은 기발한 작품이었다. 이 역시 제임스 카메론이 시나리오에 참여하면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녀의 기질과 맞지 않아서인지 전체적인 완성도는 미흡했다.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신선하고 매력적인 주제로 어필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갔을 뿐만 아니라 비글로우의 미숙한 마무리 솜씨로 인해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차기작 <웨이트 오브 워터>(2000)는 현재와 19세기를 오가는 독특한 내레이션이 돋보였지만, 메타크리틱은 100점 만점에 45점을 주었고 로튼 토마토는 “이야기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없다”라는 총평으로 그녀를 좌절케 했다. 2년 후 비글로우는 <K-19 위도우메이커>와 함께 테스토스테론 가득한 세계로 야심차게 돌아왔지만 시대와 관객에게 외면당하면서 점차 잊혀져갔다.
2. 허트 로커(Hurt Locker)의 의미
허트 로커(Hurt Locker)를 직역하면 ‘상처 입은(아픈) 보관함’이다. hurt는 ‘상처주다’ 혹은 ‘아프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이거나 ‘다친’, ‘기분이 상한, 마음에 상처를 입은’이라는 형용사로 쓰인다. hurt라는 형용사에 사물함, 보관함을 뜻하는 locker가 붙어서 만들어진 hurt locker란 표현이 유행한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였다. 이때부터 hurt locker는 주로 전장(戰場)에서 쓰였으며, 부상이라는 뜻을 가진 injury와 구분하여 “고의로 혹은 무자비하게 가해진 고통”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커다란 곤경이나 고통’이란 뜻의 ‘a world of hurt’라는 관용구가 처음 등장한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전쟁터였던 베트남은 hurt 관련 문구가 탄생한 온상이었다. 당시 새롭게 등장한 표현 중에 in the hurt locker, in the hurt bag, in the hurt seat이라는 관용구가 있는데 이는 모두 “곤경이나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다. 형편이 아주 나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종군기자 존 휠러(John T. Wheeler)는 1966년 AP 통신에 송고한 글에서 미국 군사 고문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군이 포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늙은 찰리(미군이 '베트콩'을 부르는 별명)는 상처 입은 보관함(hurt locker)에 있게 되지”라고 썼다. 휠러는 이듬해 또다시 이름 모를 상병과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늙은 찰리가 AK 47 소총을 들고 돌진하는데 그때 우리는 정말 ‘상처 입은 보관함’에 들어 있었지”라는 문구를 이용해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전쟁 관련 회고록과 픽션에서 hurt locker라는 문구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이 지아이(G.I.) 슬랭은 1970년대 빠르게 대중 속으로 퍼져나갔다. 밀레니엄 들어서 이 표현이 다시 부각되었는데, 직접적인 계기는 비글로우가 2008년 연출한 동명의 영화였다.
이라크에서 1년간 복무했던 시인 브라이언 터너(Brian Turner)가 발표한 「The Hurt Locker」라는 시를 읽고, 시나리오 작가 마크 (Mark Boal)과 비글로우가 의기투합하여 이를 영화의 제목으로 차용하면서 hurt locker라는 표현은 재차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Nothing but the hurt left here (여기에 상처만 남았습니다)
(중략)
Open the hurt locker (상처 입은 보관함을 열어)
and see what there is of knives and teeth (칼과 이빨이 있는지 보세요)
Open the hurt locker (상처 입은 보관함을 열어)
and learn how rough men come hunting for souls. (거친 사람들이 영혼을 사냥하는 방법을 알아보세요)
감동적인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이 시는 실제로 이라크에서 폭발물 처리반(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으로 근무했던 시나리오 작가 보알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보알은 허트 로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기도 했다. “사제폭탄장치(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가 해체를 시도하는 과정 중에 터지면 hurt locker는 군인으로서 최선의 예우를 받으며 집으로 배송되는 성조기를 두른 하얀 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hurt locker라는 표현은 벗어나기 어려운 심리적이며 실체적인 고통이나 그런 고통에 처한 상황을 의미하지만 극악한 고통으로 인해 사망하여 유골이 된 상태를 은유하기도 한다.
3. 너무나 영화적인 <허트 로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첫 번째 방식은 드라마가 아닌 영화적인(cinematic)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허트 로커>는 등장인물의 전사(前事)가 불충분하며 인물 사이의 관계 설정도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131분 동안 진행되지만 실제 우리가 본 장면의 대부분은 말 그대로 폭탄을 해체하는 장면들이다. 따라서 강력한 드라마를 기대한 관객들은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연극이 다르듯, 드라마와 영화적인 것이 작동하는 방식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뒤섞이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이 부재한 현대 예술에서 '영화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루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허트 로커>에는 내러티브 이외에, moving image, motion picture, cinematograph 그리고 silent film이 가지고 있던, 그러나 다른 예술이 가지지 못한 요소들이 들어있다. 이 영화는 초창기 영화처럼 움직임의 템포를 조절하고 때로는 무성영화처럼 소리를 삭제하면서 관객들에게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로서 다가가려 한다. 이를 위해 안정적인 프레임을 포기하고 매 순간마다 거친 숨소리가 들릴 것 숏들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허트 로커>는 2010년 늦겨울에 거행된 제 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6개 부문을 수상했다. 한 세기 가까이 아카데미가 여성에게 감독상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중들은 영화계가 얼마나 보수적인지 여실히 증명됐다고 생각했다. 노벨상도 수많은 여성들이 수상했는데 대중이 그리도 좋아하는 영화는 왜 이렇게 여성에 대한 벽이 높은 것일까? 당시 몇몇 지면에는 비글로우의 업적을 지렛대 삼아 아카데미 위원회의 보수성과 영화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꼬집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비글로우가 대단한 점은 그녀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 작품이 안전한(?)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세트 영화가 아니란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삼았지만 교전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던 관계로 제작은 전적으로 요르단에서 이뤄졌다. 로케이션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비글로우는 야전 텐트를 치고 생활했으며 낯 기온이 50도에 이르는 더위를 버텨냈다. 감정선을 다루는 아름답고 섬세한 영화가 아니라, 미친듯한 전투력으로 돌진한 끝에 마침내 마초의 전장에서 거둔 업적이었기에 비글로우의 승전보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6년 동안 숨죽인 후 마침내 날개를 편 여전사의 성배 쟁취 스토리에 심취해 다른 것에 무신경했다.
<허트 로커>는 감독상, 작품상 이외에 각본상, 사운드 편집상, 사운드 믹싱상, 편집상까지 휩쓸었다. 82회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전장이 따로 없었다. <허트 로커>가 작품상을 가져갔지만,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의 <거친 녀석들>, 코엔(Coen Bros.)의 <시리어스 맨>,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는 역대 세 번째로 작품상 후보에 오른 픽사(Pixar)의 <업>, 무엇보다도 영원한 후원자에서 이제는 경쟁자가 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후보작들과의 경쟁이라서 디데이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비글로우와 카메론의 <허트 로커>와 <아바타>는 똑같이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각각 6개와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비글로우의 감독상 수상은 두 가지 측면, 즉 각본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느냐 혹은 이야기를 전달할 창의적인 내레이션을 구사했는가의 여부를 두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 비글로우의 성과는 창의성보다는 기존의 연출론을 자기 방식대로 잘 소화한 장인(master)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룩한 것이리라. 몇 가지 예를 통해 그녀의 연출론의 살펴보자.
① 주인공, 목숨을 담보로 사제폭발물에 접근 → 다리를 절뚝이는 깡마른 고양이
② 부대원을 사지로 몰아넣은 저격병 명중 → 사막에 부는 회오리바람
③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아비규환의 풍경 → 옥상에서 한가롭게 연을 날리는 청년
이 세 번의 몽타주는 흔하지만 이를 이용해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기는 쉽지 않다. ①은 두 쇼트가 서로의 거울로 기능하는 은유의 전형적인 예시에 해당하고 ②는 적병을 쓰러뜨려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윤리적 죄책감을 형상화한 고차원적인 상징 몽타주이다. ③은 삶 자체의 의미에 관해 말할 때, 의외로 자주 쓰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는 지진으로 마을이 황폐화된 이후에도 청년이 축구 중계를 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이 철부지 사내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답한다. “저도 여동생과 조카 셋을 잃었어요. 그렇지만 어쩝니까?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리고 지진은 40년 마다 찾아오잖아요. 그리고 삶은 계속되죠.” 테러가 발생하고 폭탄이 터져 이웃이 죽어나가도 삶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변함이 없다. 계속되어야 하는 인생. 인간은 이 세계에 던져진 피투(被投)적 존재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세계 내에 위치시키는 기투(企投)적 존재로의 전환이 가능하다. 하이데거가 어려운 철학적 용어로 한참 동안 설명한 것을 키아로스타미는 한 장면으로 응축했다. 새로운 내레이션을 만들 재주는 없지만 비글로우는 선배들에게 배운 것을 좀 더 가다듬어 단 세 개의 쇼트로 이를 표현했다.
<허트 로커>에 등장하는 몽타주의 탁월함을 세 가지 예시로 설명했지만 화약 냄새가 도처에 풍기는 이 작품에는 미학적 장치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록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업>의 오리지널 스코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마르코 벨트라미(Marco Beltrami)와 벅 샌더스(Buck Sanders)가 만든 음악은 엠비언스를 스코어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역작이다. 비글로우가 요구한 ‘스코어와 사운드 사이의 어떤 것’을 훌륭하게 소화한 주인공은 이 두 명의 예술가들이지만 도처에서 들리는 아랍어 음성과 기도 소리를 마치 음악처럼 사용할 것을 주문한 사람은 감독 비글로우였다. 허공 위에 흐르는 가상의 음악으로 디제시스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비글로우의 영감은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이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 '사나이'를 능가하는 용맹함? 그러나 그 이전에 오랜 세월을 침묵하면서 체득한 예술론, 나아가 인생론이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장르의 규칙과 예술 영화의 전범들을 능란하게 엮은 솜씨는 <아바타>로 영화의 신기원을 열어가던 조력자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결과가 우리가 듣고 보았던 아카데미에서의 승전보였다.
4. 비글로우의 드라마투르기와 연출법
침묵이 잦았다 해도 어쨌거나 비글로우는 아웃사이더였던 때보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길었다. 오래전에 명장의 반열에 올라선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그녀의 출세작 <폭풍 속으로>를 탐냈지만 제작자였던 카메론은 스콧을 제치고 비글로우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다. 카메론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작용했겠지만, 전작들에서 그녀가 보여준 장르를 다루는 감각 역시 한 몫 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예술학교(San Francisco art institute)를 다니면서 부업으로 갭 모델을 하던 비글로우의 초기 작업들은 실험 예술에 경도된 이력대로 본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한 결과였다. 몇몇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스릴 넘치는 시각적 스타일’이라며 열광했다. 버라이어티에서는 <죽음의 키스>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 여성이 만든 가장 강렬하고 폭력적인 액션 영화”라는 평했다. 여러 곳에서 비글로우의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호평이 잇따르자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죽음의 키스>를 영화 아카이브 목록에 등재하기도 했다. 점차 영화 이력이 쌓일수록 그녀는 본인에게 대중적인 감각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예술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소일하는 시간도 반복했다. 그녀는 장르와 예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30년을 그렇게 영화계에서 보냈다. 그래서 비글로우에 대한 평가는 작품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편차가 크다. 서사보다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영화에 접근했던 비글로우는 이 같은 방식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상업적인 실패를 거듭하면서 장르 문법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그래서 비글로우는 쇼트 구성, 미장센, 음악은 본인의 의지대로 방향성을 결정하고 이야기와 캐릭터는 장르 문법에 충실히 따르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려 했다. <K-19 위도우메이커>는 그녀의 고군분투를 여실히 증명했지만 시대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황금 같은 6년의 침묵 동안, 날을 바짝 세운 그녀의 캐릭터 구성 방식과 드라마투르기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위엄 있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군인이 있다. 그는 모두가 꺼려하는 사제폭발물을 제거하는 임무 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 한다. 전쟁의 잔혹함을 몸소 깨달은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투철하다. 그러던 그가 사고로 죽고 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이 임무에서 해방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병사가 그를 대신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좋게 표현하면 매버릭이요. 거칠게 말해서 제멋대로인 인간이다. 그의 작업 방식은 자신과 동료의 목숨도 개의치 않는다. 그에겐 폭탄 제거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몇몇 사건이 거듭되면서 그와 부대원 사이에는 불신과 불만이 쌓인다. 그런 와중에 대원들은 이 매버릭의 실체를 깨달을 시간을 갖게 되면서 그의 행동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진정한 동료로 거듭나게 된다.”
실제 영화는 약간의 살이 더 붙겠지만 <허트 로커>의 내러티브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주인공, 제임스(제레미 레너)에게 매력을 느낄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비글로우는 그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안타고니스트이자 호일 캐릭터(foil character)인 샌본(안소니 마키)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심사숙고하는 성격에다 동료를 배려하는 '정상적인' 인간, 샌본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본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다. 지극히 비이성적이면서 인간의 사유로 이해하기 어려운 전쟁이라는 극한의 갈등 상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인물은 아드레날린, 전쟁, 마약과 동의어로 취급되는 제임스이다. 평범한 샌본은 제임스의 반대편에 서서 그와 반목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캐릭터를 더 명확하게 비춘다. 왓슨의 둔감함 때문에 홈즈의 추론이 더 훌륭해 보이듯이, 샌본의 평범함이 제임스로 상징되는 전쟁의 참혹함과 고통을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허트 로커>에서 비글로우는 안타고니스트와 거울의 이중 역할을 수행하는 호일의 조건과 필요성을 아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비정하고 폭탄해체밖에 모르는 제임스를 누그러뜨리는, 베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십대 초반의 아랍계 소년이며 실제 이름이 배컴일리 없는 DVD 판매상이다. 거친 군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주눅 들지 않고 생계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베컴에게 제임스는 슬그머니 마음의 문을 연다. 그러던 어느 날, 베컴은 온몸에 자살 폭탄을 가득 심은 채, 시체로 발견된다. 제임스는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 관객은 이 부분에서 의아함을 느낀다. 자신의 안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강철 심장을 가진 인간이 동료도 아니고 자국민도 아닌 아랍계 소년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 관객은 이 부분을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 역시 장르 문법의 클리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형체도 없이 날려버리는 폭탄도 두려워하지 않는 철혈 인간에게 관객이 공감하게 하려면 그에게 약점(defect)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의 발작 버튼이자 약점인 베컴은 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에 해당한다. 그런데 비글로우는 감정선 조절에는 여전히 미숙해 보인다. 제임스와 베컴의 유대가 이토록 강화되었단 사실은 켜켜이 쌓인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어야 했지만 비글로우의 성긴 드라마투르기는 이 과정을 압축해 버린다.
극의 초반부, 폭발물을 제거하려고 현장에 접근 중인 제임스에게 난데없이 택시처럼 보이는 차 한 대가 돌진한다. 그는 방호복장을 한 채 권총 한 자루 만으로 차를 제지한다. 놀란 대원들은 제임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와 정체불량의 차를 둘러싼다.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지만 제임스가 돌아가라고 설득하자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차를 돌리고 부대원들은 현장에서 그를 체포한다. 이 시퀀스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것은 제임스의 예상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그는 로봇이 해도 될 일을 굳이 자신이 처리하며, 연막탄을 터트려 쓸 데 없는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퀀스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차량 돌진 에피소드는 매버릭, 제임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모든 역량을 제임스의 캐릭터 구축에 집중하느라 정작 테러리스트처럼 보였던 정체불명의 사나이와 그가 벌인 무모한 모험은 훈제 청어(red herring)와 맥거핀(macguffin)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섬세한 드라마는 비글로우에게 여전히 넘기 어려운 산처럼 보인다. 그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이유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하는 것보다 다짜고짜 주먹 날리는 스타일을 선호하며 상대방이 자유를 위해 '폭풍 속으로' 향해가는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는 쿨한 태도로 인물을 연출한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비평가 피터 커프(Peter Keough)는 비글로우를 할리우드의 마초 우먼(Hollywood's Macho Woman)이라고 칭한다. 그녀는 세간의 평가를 인정하면서 “영화 장르는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은 부드러운 로맨스를 연출하고 여성은 잔인한 총격전을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5. 시점의 정치학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시점만으로 이 세계를 살아간다. "객관적으로 볼 때"라는 언어도단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불가능하다. 객관은 내가 대상이 되는 상태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객관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는 한에서 희미한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허다한 선각자들이 거울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지기 힘든 것이 나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나 예술작품이 그 노릇을 해주길 바란다. 인간이 주관적 시점으로만 세계를 바라볼 때, 발생하는 한계와 폐단을 장 미트리는 영화가 넘어설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미트리는 영화(카메라)의 성격을 ‘반(半)주관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영화(카메라)는 ‘반(半)객관적’이기도 한 희한한 장치인 셈이다. 영화 카메라는 시점의 주인이 바라보는 것을 대상화하기도 하지만 시점의 주인을 대상화하기도 한다. 대상을 촬영한 쇼트가 객관적이라면, 시선의 주인으로 돌아온 리버스 쇼트는 주관적이다. 쇼트와 리버스 쇼트가 끊임없이 교환되는 영화라는 장치는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반주관적이며, 반객관적이다. 따라서 신의 시점을 훔친 전지전능한 이 기계를 카메라를 든 자는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허트 로커>를 보면서 나는 영화가 악마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나는 제임스를 비롯한 미군 폭발물 처리반의 시선으로 디제시스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모든 아랍인을 적으로 간주했다. 히잡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쇼트가 스치듯 지나가면, 그녀의 눈빛에서 적의를 느꼈고 저 멀리 비디오카메라로 미군들을 촬영하는 쇼트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시당하는 것처럼 불쾌감을 느꼈다. 미군과 이라크 반군이 서로를 저격하는 장면에서는 대놓고 반군이 쓰러지기를 바랐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자 안도와 함께 작은 희열감도 느꼈다. 제임스, 샌본, 앨드리치 심지어 초반부에 사망한 톰슨 하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나지만, 이라크인들은 대부분 롱 쇼트의 일부분으로 표현되거나 아주 짧게 편집되어 지나가기 때문에 기억나는 인물은 베컴을 제외하곤 전무했다. 이는 할리우드가 아주 오래전부터 전쟁 영화에서 적국의 군인과 시민들을 묘사하는 전술 아니었던가?
<디어 헌터>에서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은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져 결국은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자멸한다. 그래서 나는 한 동안, 사슴도 쏘지 못하는 주인공의 심성 변화를 전쟁의 참혹함에서 찾았다. 그런가하면 <플래툰>은 전쟁의 원인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적은 내부에 있다.”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제를 던져 주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눈가림의 원인은 시점에 있었다. 카메라가 누구의 시선을 경유하여 누구를 대상으로 겨누는가에 따라 상반된 드라마가 발생한다. 미트리가 영화의 권능이라고 여겼던 반주관(반객관)적 장치는 깨어있으려는 모든 시도를 무화시킨 채, 봉합과 감동의 결과물로 나를 옭아맨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가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이유를 철저히 그의 입장에서 공감하게 되었다. 미국이 이라크에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이 전쟁의 추악한 이면에는 다양한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길 바랐다. 과연 영화의 시점이 정반대여도 나는 지금처럼 느꼈을까? 같은 상황을 우리의 역사에 적용시켜보면 어떨까?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도 일본인 나카무라가 저렇게 해체하길 바랄까? 이 또한 시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카메라를 든 자는 자신만의 윤리관을 함양해야 한다.
6. 전쟁은 마약이다.
“The rush of battle is often a potent and lethal addiction, for war is a drug(전투의 격렬함은 때론 강력하며 치명적인 중독이다. 왜냐면 전쟁은 마약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미국이 참전한 다양한 전쟁의 종군 기자로 활약했던 성직자겸 작가인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리고 비글로우는 왜 헤지스가 쓴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허트 로커>의 서두를 장식했을까? 이 질문은 답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주인공 제임스는 무려 873번이나 폭탄을 해체한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873이란 숫자는 달리 말하면 873번이나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다. 대령은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폭탄 제거에 열성인 이 매버릭을 대단한 녀석(wild man)이라고 추켜세우면서 그 비결을 묻는다. 제임스는 “죽지 않으면 된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 질문이 향했다면 경험, 지식, 조심성을 섞은 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는 죽지 않은 결과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임무 중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873개의 폭탄을 해체했다는 그의 대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제임스는 부대원들과 사뭇 다른 태도로 폭발물을 대한다. 그들은 모두 두려운 감정으로 폭탄에 다가가지만 제임스만은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를 산화시킬 폭탄이 두렵지 않다. 그래서 대원들은 오히려 제임스가 두렵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두려움을 모르는 저 제임스로 인해서 자신들이 사지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샌본이 조심스레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샌본: 제가 방호복 입고 폭탄해체 할까요?
제임스 : (제임스가 웃는 얼굴이지만 단호하게 답한다.) 오 그건 절대 안 되지.
제임스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사람. 위험한 일에 언제나 앞장서는 멋진 사나이다. 그래서 그는 샌본의 제안을 거절한다. 물론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에 중독된 이 사나이는 목숨을 담보로 얻게 될 아드레날린의 쾌감을 도저히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트 로커>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전쟁이 주는 무자비한 고통에 중독된 사내가 언젠가 성조기를 두른 하얀 상자 안에 자신의 영혼이 봉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다. 전쟁이라는 폭탄에 사로잡힌 가련한 영혼 제임스. 그는 전쟁에서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모든 병사들을 상징하며 전쟁이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명한다.”
그런데 이 결론은 어디에서 많이 본 듯하지 않는가? <허트 로커>는 <디어 헌터>와 <플래툰>의 주제를 반복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또다시 시점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며 할리우드의 극작술에 포로가 된 것이다. 관객인 나는 시점과 드라마에 갇혀 영원히 사태를 올바르게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 만큼 이것들의 힘은 강하다.
미국 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는 1823년 연두교서를 통해 불간섭주의와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발표했다. 후에 먼로 독트린으로 불리는 이 정책은 2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근간이 유지되고 있다. 먼로 독트린의 핵심은 “유럽 강대국들이 획책하려는 아메리카에 대한 어떠한 개입도 미국을 향한 비우호적 입장이라 여길 수밖에 없다.”로 요약된다. 이 말은 “아메리카의 독립성은 미국의 독립성과 같은 선상에 있으므로 이를 위협하는 어떤 요구나 개입도 용납할 수 없다.”라고 환원된다. 먼로 독트린은 만약 그러한 경우가 발생한다면 자위권을 발동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먼로 독트린은 대외적으로 고립주의를 표방하지만 여하한 경우에는 이 수동적 고립주의가 능동적 팽창주의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저의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약간 과장한다면 미국은 18세기 영국을 상대로 치룬 독립 전쟁 이후, 단 하루도 전쟁을 끊지 않은 전 세계 유일한 국가이며 이를 통해 무수한 전쟁기술을 습득한 전쟁 기계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대권을 이어받아 Pax Britanica에 이은 Pax Americana 시기로 돌입했다. 미국이 전 세계 유일한 야경국가로 군림한지도 어언 한 세기가 지나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허트 로커>를 다시 생각해보자. 영화의 후반부는 제임스의 아드레날린 중독을 인류애를 실천하려는 몸부림 도중에 얻게 된 상처쯤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야경(夜警), 즉 경찰의 존재 이유는 악을 소멸하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듯이 경찰인 미국은 세계 도처에 만연한 범죄를 소탕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악을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은 악이 존재하는 전쟁을 찾아다니면서 악을 제거하는데 골몰한다. 국지적인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그때는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정치적 밀약의 산물이자 경제적 이득을 꿈꾸며 벌인 이라크 전쟁은 이런 회로 속에서 발발한 전쟁의 대표격이다. 따라서 제임스는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갈등 속에서 정신이 피폐해진 인간을 환유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당사자는 제임스가 아니라 미국이다.
미국 국방부는 처음부터 <허트 로커>에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가 어느 순간 발을 빼면서 미군의 정책에 위반되는 점이 시나리오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을까? 아니면 심각한 위반 사항이 정말 시나리오에 존재했던 것일까? 만약 전자라면, 비글로우가 제시한 873이라는 숫자는 제임스가 해체한 폭탄의 수가 아니라 미국이 전 세계에서 야경 국가 행세를 하면서 벌인 국지전의 횟수일수도 있다. 만약 이 추론이 맞는다면, 캐서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는 할리우드의 통렬한 자기반성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국의 변형된 먼로주의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아카데미는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글로우와 <허트 로커>에게 상을 주었을까?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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