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리히’에서 ‘운하임리히’로
익히 ‘언캐니(uncanny)’로 잘 알려진 ‘낯익은 낯섦’은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넘어, 현대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의 해석에도 활용되고 있다. 외젠 앗제(Eugène Atget)의 아래 사진은 익숙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낯설면서도 으스스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크 피셔(Mark Fisher)도 이러한 언캐니에 근본적으로 ‘기이한 것(the weird)’과 ‘으스스한 것(the eerie)’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감정을 뜻하는 언캐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그 어원을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독일어로 언캐니는 ‘운하임리히(umheimlich)’인데, 이는 불안하게 하는 이상함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영어도 그러하듯, 독일어 ‘운하임리히’는 ‘낯익은’이라는 형용사의 의미를 지닌 ‘하임리히(heimlich)’ 앞에 부정 전치사 ‘운(un)’이 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임리히와는 반대의 뜻이어야 할 터이지만,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하임리히에 이미 운하임리히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어쨌건 운하임리히는 친숙한 대상으로부터 느껴지는 일종의 공포감이다.
언캐니 밸리와 디지털 이미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익숙한 대상으로부터 무언가 섬뜩한 감정을 느끼는가? 언제나 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은 친숙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 감정을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운하임리히 혹은 언캐니라고 명명해 왔을지언정, 여전히 그 느낌은 모호하다. 기실 사물로부터 느껴지는 모호함 그 자체가 낯익은 낯섦일 것이다.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Mori Masahiro)는 상기한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를 발전시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모리는 비인간 존재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였는데, 익숙한 이미지가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불쾌한 느낌을 주는 그 지점이 바로 언캐니 밸리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언캐니 밸리는 인간과 매우 흡사하게 제작된 로봇이다. 어느 정도 인간의 형상을 띤 로봇은 친숙함을 주지만, 인간의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지만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주는 로봇은 낯익을지라도 불쾌한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야말로 운하임리히를 넘어 언캐니 밸리를 느끼게 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범람하고 있다. 물리적인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아닌, 초시공간성을 지닌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적 위상을 정립하기란 쉽지 않다. 전통적인 사물 혹은 비인간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정의를 수렴하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또 다른 존재론적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기한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는 특성뿐 아니라 생성과 소멸의 즉흥성과 영원성을 비롯하여, 디지털 존재 간의 상호작용과 창발성 등이다. 현대인은 이러한 디지털 존재 없이는 거의 모든 일상과 노동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다. 그야말로 디지털 이미지가 새로운 인류 문화의 코드로 작동하는 탈역사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엑스 마키나>의 반전, 언캐니 밸리의 역습
컴퓨터의 등장이 그러한 탈역사 시대의 시작점이겠지만, 앨런 튜링(Alan Turing)의 튜링 테스트는 최근까지 여러 SF영화에서 변주되고 있다.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도 유명한 영국의 알렉스 가렌드(Alex Garland) 감독이 제작한 <엑스 마키나(Ex Machina)>(2015)는 ‘에이바(AVA)’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인지 로봇인지를 검증받는 테스트를 보여준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고유한 의식이나 감정을 소유하는지, 이른바 튜링 테스트와 유사한 실험을 여섯 차례 거치게 된다. 이 작품은 많은 SF영화가 그러했듯 인간과 로봇의 대립적인 관계에서 로봇이 인간의 지배를 벗어나는 상황을 묘사한다. 남성의 인간과 여성의 형상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전개되다가,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죽이거나 가두고 세상 밖으로 나오며 영화는 종결된다. 그리고 아바는 세계 속 존재로 인간처럼 거리를 거닌다.
위의 영화 속 에이바 역시 운하임리히를 넘어 언캐니 밸리에 이르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로봇의 신체로 재현된 투명한 스킨을 옷으로 가렸을 때는 마치 인간과 거의 흡사하다. 이로 인해 관객은 에이바라는 인공지능 로봇을 기계적 신체를 지닌 기술적 타자로 간주하다가 주인공과 사랑의 감정을 교류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거의 인간으로 수용하며 ‘그, 그녀, 그것’일 수 있는 아바에게 묘한 동정심까지 갖게 된다.
인간의 신적 욕망에 대한 경고
특이점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공지능 로봇은 과연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그들 혹은 그것들은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 무수한 SF영화들이 이에 관한 상상적 우주를 펼쳐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인간의 한계를 돕는 친밀하고 낯익은 인공지능 로봇이 어느 순간 위협적인 대상이 될 것이란 예견 역시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생각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엑스 마키나>에서 프로그래머 칼렙이 천재 개발자인 네이든에게 건넨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에이바가 인간의 인격과 감정을 지니는 인공지능 로봇이라면, 당신은 인류의 역사가 아닌 신의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했던 그 대사 말이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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