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대정신과 대중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때, 시대와 대중의 의미는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다. 즉 영화가 다루는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영국 역사학자 E. H. 카의 저 유명한 문장이 떠오른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과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의 인물과 사건은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되며, 그 평가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를 영화감독으로 대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감독에 따라 특정 인물과 사건에 관한 입장과 평가는 제각각이며, 영화감독의 다양한 가치관은 영화에 개성적으로 투영되게 마련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을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현재’ 그리고 ‘역사가’의 개념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을 고려하면, 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점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예외적인 인물이다. 현재까지 제작된 한국영화에서 전두환에 대한 인물 묘사와 평가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의 행적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이 직접 등장하는 작품 목록은 꽤 길다. 10·26부터 12·12 군사 정변, 5·18민주화운동,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마다 전두환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들 영화에서 ‘전두환’은 절대 악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영화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을 다룰 때는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전두환처럼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일치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때에는 전두환 캐릭터를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된다. 예를 들어 옛이야기에서 계모 캐릭터는 고정적이지만, 각 작품이 계모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나쁜 계모’라는 개연성이 아니라 계모가 어떻게, 얼마나 나쁜지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핍진성이 중요하다. ‘신데렐라’의 계모와 ‘콩쥐’의 계모는 같은 캐릭터이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악행은 개별적이어야 한다. ‘계모는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외치기만 해서는 독자와 관객을 설득할 수 없다.
<서울의 봄>(2023)과 <행복의 나라>(2024)에도 전두환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두 영화가 전두환을 소환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두 영화에서 전두환의 역할과 비중은 꽤 다르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이태신 수경사령관과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 쌍두마차이다. 그래서 전두광과 관련한 사건도 많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세하게 묘사된다. <행복의 나라>에서 전상두는 보조적인 역할이다. <행복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정인후 변호사의 성장 영화이며, 전상두는 정인후의 성격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서울의 봄>과 <행복의 나라>에서 ‘전두환’의 역할과 비중은 다르지만, 그가 ‘절대 악’이라는 점은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두 영화가 ‘전두환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현실 세계의 전두환 대통령과 영화라는 디제시스의 ‘전두환’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전두환의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반면 전두환의 이미지를 활용하되 영화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할 수도 있다. 두 방식은 얼핏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디제시스에서 캐릭터를 얼마나 핍진성 있게 구축하느냐는 영화의 완성도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도 결국은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두광의 성격을 묘사한다. 이태신과 전두광 일당이 복도에서 마주친 장면. 육사 출신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광은 갑종 출신 이태신과 좁은 복도에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고 나서 전두광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다. 이로 인해 전두광은 군인정신을 저버린 자, 교활한 자, 무법자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12·12 군사 반란을 마무리한 후에 나오는 화장실 시퀀스는 어떠한가. 텅 빈 화장실에서 혼자서 발작적으로 웃는 모습은 전두광의 정신 분열적이고 악마적인 이미지를 완성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환 캐릭터’가 성공적으로 구축된다.
또 <서울의 봄>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전두광의 이미지를 만든다. 얼굴의 한쪽은 밝고 반대쪽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조명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그의 어둡고 음험한 성격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전두광이 하나회 선후배를 연희동 집으로 불러모아 반란을 모의하는 장면, 반란에 소극적인 노태건과 대립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악당 묘사의 전형적인 연출 방식이지만, 전두환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그 효과가 배가된다.
<행복의 나라>에서 전상두는 처음부터 절대적인 권력자로 등장한다. 그는 고압적인 태도로 처음 만난 정인후 변호사의 이름표를 확인하고, 판사에게 쪽지를 건네 박태주 대령의 재판을 좌지우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전두환이 아닌 다른 악당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나라>만의 ‘전두환 캐릭터’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전두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전두환이 아니어도, 전상두는 과연 ‘절대 악’의 존재일까? 이 지점에서 핍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행복의 나라>가 골프장 시퀀스에서 전상두와 정인후 변호사의 갈등을 묘사하는 방식도 살펴볼 만하다. 이 골프장 시퀀스에서 정인후 변호사는 전상두가 친 골프공을 여러 차례 주워오고, 심지어 한겨울 연못에 들어가 공을 가져오기까지 한다. 또 전상두는 골프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고, 정인후 변호사는 비탈진 언덕을 수시로 오르내리거나 골프장에 누워버린다. 이때 카메라는 정인후 변호사가 전상두를 올려다보거나, 전상두가 정인후 변호사를 내려다보는 장면을 교차로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전상두는 로 앵글로, 정인후 변호사는 하이 앵글이 담아낸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로 앵글은 피사체가 크고 두렵고 거대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때 사용된다. 하이 앵글은 그 반대이다. 레니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1935)에서 히틀러는 줄기차게 로 앵글로 촬영하고, 전당대회 참석자들은 하이 앵글로 촬영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행복의 나라>에서도 전상두와 정인후 변호사의 권력 관계는 수직적이다. 정인후 변호사가 전상두에게 사자후를 토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수직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장면에서 전상두는 분명히 절대 권력자이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와 ‘절대 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골프장 시퀀스는 ‘옳고 그름’의 세계에 진입했던 정인후 변호사가 ‘이기고 짐’이 세계로 퇴행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이때 전두환은 정인후 변호사의 행적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서울의 봄>과 <행복의 나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이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전두환 캐릭터’는 한국사회의 시대정신과 대중의 무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에서 ‘전두환 캐릭터’의 성격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정불변의 이미지를 가진 실존 인물의 성격을 각각의 영화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구축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때 현실 세계의 전두환은 ‘절대 악’ 캐릭터의 모델이자 원형일 뿐이다. <서울의 봄>과 <행복의 나라>는 한국영화가 전두환을 소환하는 방식 그리고 ‘악역이 살아야 영화가 산다’라는 격언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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