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로 손꼽히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2005)은 기억을 지우는 이야기를 다룬다. 한때 열렬히 서로를 사랑했던, 그러나 이제는 지루함만 남은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새출발을 결심하는 것이다. 영화는 잠들어있는 조엘(짐 캐리 분)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된다(엄밀히 말해서, 이 장면은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이 아니다). 곧이어 차 문이 닫히고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리면서 조엘은 잠에서 깬다. 출근하러 나선 그는 자동차가 심각하게 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차된 옆 차의 소행으로 여겨 메모를 남긴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사람들 무리에 섞여 지하철을 기다리던 그는 충동적으로 무단결근을 결심하고 몬톡행 열차에 탑승한다. 그리고 열차에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을 만난다. 두 사람은 마치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리고, 그날 하루도 모자라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사실, 원인 모를 그의 충동적인 선택은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이기 때문이어서도, 그가 기분파이기 때문이어서도 아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관객은 그의 충동적인 선택에는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밸런타인데이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몬톡행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리는, 그리하여 함께 하루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약 17분에 걸쳐 지속된다. 그리고 나서야,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영화는 이미 시작되지 않았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클레멘타인의 집 앞에서 그녀가 칫솔을 가지고 나오길 기다리는 조엘의 모습을 끝으로, 그제야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행복해하던 조엘의 모습과 달리, 눈물을 흘리는 조엘의 모습을 배경으로 말이다. 따라서 관객은 약 17분에 걸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가 오프닝 시퀀스의 일환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관객은 이 장면들이 그와 그녀의 ‘첫’ 만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몬톡행 기차에서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난 뒤의 ‘두’ 번째 ‘첫’ 만남이다.


타이틀을 포함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영화는 밸런타인데이 하루 전날에서 시작된다.(1) 건물 입구에서 만난 이웃은 연인이 있는 조엘의 처지를 부러워하지만, 그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그녀는 이미 그를 떠났고 그는 그녀를 지우기로 결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라쿠나사의 직원들이 잠든 조엘의 집에 들어오고, 지금까지 현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던 영화는 이때부터 조엘의 머릿속으로 무대를 옮겨간다. 클레멘타인에 관련된 기억을 지워감에 따라,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과거의 기억으로 나아가는(떠올려지는) 것이다. 조금 전 이웃과 대화한 기억부터 밸런타인데이 3일 전 클레멘타인의 회사에 찾아간 기억과 친구들에게서 그녀의 기억 삭제에 관하여 듣게 된 기억까지, 이어서 라쿠나사에 방문했던 기억까지 이어지는 식이다.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고 새출발하고 싶어 했다’라는 의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자신도 그녀에 관한 기억을 삭제하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영화는 라쿠나사 직원들이 잠든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있는 현실과, 시술이 진행됨에 따라 과거의 기억들이 역행적으로 펼쳐지는 조엘의 머릿속을 교차하며 전개된다. 영화 속 현실과 조엘의 머릿속은 완전히 단절된 두 세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데, 현실에서 라쿠나사 직원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조엘의 머릿속에서 들리는 식이다. 심지어 현실에서 잠든, 그러나 머릿속에선 깨어있는 조엘은 라쿠나사 직원 중 한 명이 자신의 정보를 훔쳐 클레멘타인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기억 삭제가 진행될수록 그녀와 관련된 핵심적인 기억이 호출되고(떠오르고), 조엘은 점차 시술을 멈추길 바라게 된다: “박사님, 이 기억은 간직하게 해 줘요, 이것만.” 이윽고 ‘얼어붙은 찰스강’에서의 기억에 도달한 순간, 곁에 있던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본 그는 기억 삭제 시술을 거부하며 소리치기에 이른다. “들려요? 이거 하기 싫다고! 취소해 줘요!”, “누구 없어요?”
그러나 현실에서 라쿠나사 직원들은 약과 술에 취해 한바탕 춤추며 즐기고 있는 상황. 결국 조엘은 시술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 클레멘타인의 조언에 따라 ‘그녀와 상관없는 기억’으로 도망치기로 한다. 그리하여 그와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 즉 비 오는 날에 컨테이너로 숨어든 기억과 주방의 식탁 아래 숨어든 기억으로 도망친다. 그들이 도망치는 데 성공하자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시술이 멈추자 당황한 라쿠나사 직원은 하워드 박사(톰 윌킨슨 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고, 한밤중에 달려온 박사의 도움으로 시술이 재개된다. 또다시 클레멘타인의 조언에 따라 조엘은 ‘완전히 묻힐 정도로 깊은 곳’, 즉 ‘창피한 기억’에 숨기 성공하고, 시술은 중지된다. 박사는 다시 그들을 찾아내고, 이내 시술은 재개된다. 눈밭에서 뒹굴던 기억과 코끼리 퍼레이드를 보던 기억을 지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첫인사를 나누고, 한밤의 해변을 걷고, 빈집을 털었던 기억들. 머릿속에서나마 조엘은 그녀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고, 그녀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안녕(bye), 조엘”. 이어서 “몬톡에서 만나(Meet me in Montauk)”라는 그녀의 말을 끝으로, 그녀에 관한 남은 기억은 빠르게 사라진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조엘의 머릿속을 영화의 무대로 활용함으로써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며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 그것은 모든 세부를 갖춘 완벽한 모습으로 떠오르거나 전후 인과관계에 맞추어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파편화되고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것에 가깝다. 이는 영화에서 인물 뒤편의 조명이 순차적으로 꺼지거나 배경이 사라지는 식으로 표현되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거나 돌연 장소가 바뀌어 있는 식으로 연출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어린 시절 기억으로 도망가는 장면의 연출은 특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방에서 비가 내리거나 간이 컨테이너를 형상화한 테이블을 활용하고, 같은 옷차림을 한 성인과 아이의 형상을 교차하는 등 기억을 전환하는(옮겨가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또한,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입 맞춘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장면은 우리가 흔히 기억을 떠올리고자 할 때 겪는 어려움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기억의 본성에 대한 감독의 깊은 관심과 이해는 <이터널 선샤인>의 관객이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클레멘타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면, 시술은 끝이 난다. 라쿠나사의 직원이 장비를 챙겨 나서고, 차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소리와 함께 조엘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 즉,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미 봤던 장면의 반복이다. 조엘은 출근하려다가 차가 긁힌 것을 발견하고, 지하철에서 충동적으로 몬톡행 열차에 올라탄다. 이제 관객은 그의 충동적인 선택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그의 몬톡행은 “몬톡에서 만나”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클레멘타인이 했던 말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길 거부했던 조엘이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의 입을 빌어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즉, 그녀를 붙잡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열망이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심어두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클레멘타인은 어떻게 몬톡행 열차에 타게 되었을까? 그녀는 이미 조엘보다 먼저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애인을 만나지 않았던가? 흥미롭게도, 조엘에게서 클레멘타인의 기억이 삭제됨에 따라 현실의 그녀는 이를 느낀다. 마치 그와 그녀의 무의식이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원인을 모른 채 무서움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애인을 불러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라고 말하며 지금 당장 ‘얼어붙은 찰스강’을 보러 몬톡에 가자고 청한다. 그런데 그녀의 새로운 애인은 바로 라쿠나사의 직원으로, 조엘의 정보를 훔쳐서 그녀에게 접근했던 이이다. 그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조엘이 그녀에게 주려고 골동품점에서 샀던 목걸이를 선물로 건네고, 얼어붙은 찰스강에서는 조엘이 했던 말을 똑같이 읊는다. 결국,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느낀 클레멘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기억은 지워졌어도 그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있음을 암시하듯, 그녀는 누구나 할법한 말 한마디에서도 그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톡행 열차에서 ‘두’ 번째 ‘첫’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서로를 다시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내 라쿠나사의 직원 매리(커스틴 던스트 분)가 보낸 우편물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거기에는 그들이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비롯해 그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상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다시 한번 상처를 받는다. 조엘은 떠난 클레멘타인을 다시 붙잡지만, 그 또한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들의 미래는 이미 본 과거의 반복일 것이 틀림없으며 그들은 모두 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내가) 거슬리게 될 거고, 난 지루하고 답답해하겠죠.” 클레멘타인의 말에 조엘은 “괜찮아요(okay).”라고 답한다. 이윽고 그녀 또한 “알았어요(okay).”라고 답한다. 결국 이들은 헤어져야 할, 다시 이어져선 안 되는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okay’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다시 ‘함께’를 택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것이 단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들에게 우편물을 보낸 매리 역시 한 차례 과거를 지웠던, 그러나 또다시 같은 상대를 향해 같은 마음을 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녀에 관한 물건을 한가득 짊어지고 라쿠나사에 방문했을 때, 매리는 수화기 너머로 한 고객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소벨 부인. 한 달에 세 번이나 시술할 순 없어요.” 소벨 부인은 왜 세 번에 걸쳐서 기억을 삭제해달라 요청한 것일까? 아마도 이미 두 번에 걸쳐서 기억을 삭제했을 그녀 역시 과거를 되풀이하고 말았기 때문일 테다. 이를 통해 <이터널 선샤인>은 우리에게 기억을 만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다. 기억은 단순히 심거나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1) 밸런타인데이 하루 전날이라는 사실은 조엘의 이웃 프랭크와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한국어 자막은 “며칠 안 남았는데?”라고 번역되었으나, 원어로는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의미인 “it’s only a day away.”라고 말하고 있다.
글‧김윤진
시각예술 및 대중문화에 대하여 글을 쓴다. 2024년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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