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관계에 대한 우화 그리고 ‘시선’

영화 <아노라>에는 두 가지 권력관계가 도드라진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관계와 시선의 권력관계다. 전자의 권력관계는 칸이 편애하는 주제다. 예컨대, <아노라>와 <기생충>은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자본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권력관계에 대한 우화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아노라>의 션 베이커 감독은 인터뷰(https://youtu.be/Undngrsv-gQ?si=IUaOwIre_d1smsJv)를 통해 그가 “가장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권력관계”(0:32~0:40)라고 밝힌다. 그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관계를 탐구해 오는 것에 경의를 보낸다. 그러나, 시선의 권력관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미흡하다.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시선에서 독립하지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독립영화 감독으로 뼈가 굵은 션 베이커 감독이 지향하는 곳에 항상 아웃사이더(중국인 이민자(<테이크아웃>), 포르노 배우(<스타렛>), 트랜스젠더(<탠저린>), 홈리스(<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리고 스트립 댄서(<아노라>)가 포착되고, 션 베이커 감독이 특별히 그러한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와 세계관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걸었던 기대와 실망의 진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아노라>에는 남성 편향 시선이라는 권력이 방치되어있다.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적 성향을 반추해 본다면 영화의 매체 속성에 ‘관음증’이 포함되어있다는 영화적 자의식과 영화 매체가 저질러 온 여성 배우에 대한 관음적 착취를 의도적으로 배재했어야 마땅할 듯 해서 말이다. 2015년 선댄스 영화제의 대표작이었던 <탠저린>의 경우 그는 <아노라>에 비해 (트랜스 젠더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웠고 그들을 관음적으로 착취하지 않았다. <탠저린>이 트랜스 젠더의 노출 장면 없이 그들의 고뇌와 사랑, 그리고 우정을 담는 데 성공했던 것에 비하면 <아노라>의 전반 첫 번째 장은 초지일관 관음적 시선으로 클럽 스트립 댄서들의 성‘노동’에 대해, 시간과 시선을 확장하는 과잉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아노라’, 호명하기 : 변형되고 지속되는 타자의 시선과 욕망
영화 타이틀부터 관객은 슬로우 모션과 트래킹 쇼트에 도열된 섹시 댄스를 쫓아가다가 그 최고 절정의 순간에 강렬한 조명과 렌즈가 도달한 곳에서 주인공 애니/아노라(마이키 매디슨)를 발견한다. 매력적인(혹은 과도하게 관음적으로 촬영된) 애니는 러시아 억만장자의 버릇없고 미숙한 아들 바냐(마크 아이델슈타인)를 위해 옷을 벗으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극대화하기 위해 좋은 거래를 협상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그녀는 몸으로 돈을 벌고, 몸으로 매혹을 표현하며, 몸과 자신을 나누어 보지 않는다. 엠지(MZ)세대 스트립 댄서답게 당당하고 프로페셔널하다.
그녀는 구원받는 ‘신데렐라’나 ‘프리티 우먼’이 아니다. 그들에 비해 독립적으로 보인다. 그녀는 성‘노동’을 매우 열심히 해 내고 있고, 적절한 보상도 받아낼 줄 안다. 충동적인 결혼도 바냐의 간절한 청혼 끝에 마지못해 수락한다. 그런데도, 결국 애니는 복권에 당첨된 것. 그러나, 바냐의 부모가 이들의 혼인을 무효로 하기 위해 보낸 삼인방 중 가장 과묵한 근육질의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는 바냐 부모의 강압적인 혼인 무효 과정을 지켜보다가 러시아 재벌의 강권에 맞서는 당찬 애니의 잔혹한 현실에 공감하며 점차 애니를 부드럽고 미묘하게 배려하게 되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비로소 ‘대화’를 한다. 이고르는 애니에게 본명인 ‘아노라 Anora’가 더 좋다며 호감을 표현하며, 그 의미가 ‘빛’이라는 뜻도 알게 된다. 이고르가 호명하는 아노라는 이제 성 노동자인 애니의 다른 면, ‘빛’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를 불러주는 사람, 이고르라는 타자가 개입한다. 그녀는 자본 권력 시스템에서 부르는 이름, 애니처럼 이번에는 이고르라는 재배치된 타자가 불러주는 이름, ‘아노라’라는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는 뜻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아노라가되어 당당하게 발화하는 언어는 두 번째 장에서 세 남자에 둘러싸인 채 외쳐대는 욕지거리가 불꽃처럼 터져 나올 때 뿐이다.
애니/아노라의 전투력과 그녀의 찰진 욕: 자아의 발현
애니가 아노라가 되는 성장 드라마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애니/아노라는 세 번의 단락을 통해 시련을 겪고 성장한다. 애니/아노라가 욕지거리를 실컷 뿜어댄 후 도망친 바냐를 찾기 위해 나서는 짧은 여행은 이 성장드라마의 통과제의에 해당한다. 러시아 마피아가 연상되는 거칠어 보이는 세 남자와 거침없는 당찬 소녀가 블랙 코미디의 세계로 들어선 것. 바냐를 찾아가는 여정은 션 베이커 감독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저예산 포맷의 다큐멘터리 기법이고, 자칭 뉴요커다운 뉴욕 ‘거리 영화 Street Movie’에 대한 오마주다. 혹은 감독 자신의 영화 <탠저린>에서 트렌스 젠더 매춘부인 신디가 감옥에서 갓 출소한 후 역시 트렌스 젠더 매춘부인 알렉산드라와 함께 바람피운 포주 남친을 찾으러 엘에이의 여러 곳을 뒤지며 다니며 분주한 짧은 로드 무비와 흡사하다. 이들은 혈안이 되어 누군가를 찾으러 다니고, 이들의 분주한 동선을 따라가는 모험을 통해 감독은 다큐멘터리처럼 거리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쫓는 자들은 서로 점차 연대하게 된다.
<아노라>에서 애니가 이들 세 명의 외강내유한 남성들과 함께 있을 때, 돌연 유쾌한 블랙 코미디가 된다. 덩치 큰 남성들이 맹수로 돌변한 소녀한테 맞고, 쌍코피 터지며 속수무책, 톰과 제리처럼 당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폭소를 자아낸다. 러시아 정교의 사제이자 바냐의 대부인 토로스(캐런 캐러굴리안)는 존재 자체가 다중적이고 블랙코미디다. 유아 세례를 하다가 황급히 사제복을 벗고 길을 나선 그는 거리를 폭주하고 견인차를 부숴버리며, 욕지거리는 애니와 쌍벽을 이룬다. 애니/아노라는 바냐 집안의 값비싼 전시품과 집기를 때려 부수고, 러시아 남성 세 명의 기선을 제압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들 세 남성은 애니와의 참혹한 격투 끝에 일단 바냐를 찾기로 하고 휴전한다. 이들의 모험은 어둡고 우스꽝스럽지만, 더 비틀린 코믹 요소는 이 중 가장 폭력적인 애니만이 제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그녀가 욕과 격투기를 통해 제 목소리(?)를 터뜨리는 2막은 자아를 찾기 위한 악다구니로 보일 수 있었고, 나름 통쾌하기도 하지만, 실은 무척 공허한 ‘욕’일 뿐이다. 그녀는 이미 감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3막의 기습적인 결말이 설득력이 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막의 화려한 조명과 관음적 시선 아래 놓였던 애니, 2막에서 신데렐라를 꿈꾸던 애니는 3막에서 이고르라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호명된 ‘아노라’로 새 장을 연다. 세상은 온통 하얀 눈이 내리고, 이고르는 토로스가 회수했던 애니의 결혼 다이아몬드 반지를 돌려준다. 할머니라는 고향 같은 존재감을 덧칠한 낡은 차, 삐걱거리는 와이퍼 소리만 고즈넉한 가운데서 화장기 없는 섹스와 키스, 그리고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아노라(이쯤에서는 더 이상 애니가 아니다.)를 다독거리는 이고르. 감독이 밝힌 것처럼 반쪽 오프닝 엔딩이지만 관객의 마음은 이미 눈처럼 하얗고 할머니 차처럼 소박하며 낡은 와이퍼 끽끽거리는 소리처럼 소소한 일상을 나눌 이들을 상상하게 된다. 다시 성노동자로 돌아온 추락한 신데렐라의 옆에 이고르라는 타자의 시선이 가로 놓여 남성 시선 판타지의 다른 버전으로 변형, 지속되긴 하지만, 션 베이커 감독이 자본 권력관계의 모순을 드러낸 만큼, 영화 <아노라>에는 최소한 프리티 우먼 판타지에서는 벗어나 있는 ‘아노라’가 존재 할 수 있었다.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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