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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연극을 동경한 영화, <소프루>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연극을 동경한 영화, <소프루>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4.11.2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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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소프루>의 포스터

“나는 1978년 2월 24일부터 줄곧 극장에서 일했지만, 무대 위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했습니다. … 나의 시커먼 옷은 어둠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복장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도록 옷을 입습니다. 나는 보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무대 위 조명이 비치는 곳에 서 있습니다.”

 

프롬프터(임다경 扮)의 긴 독백으로 막을 올린 <소프루>는 지금껏 무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인물을 빛의 영역으로 건져 올린다. 그녀의 역할은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대사를 속삭이며 정지된 극을 되살리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극이 구현한 환상세계는 정작 그 세계에 일조한 예술인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린다. 영화관 뒤편 영사실에 갇힌 <라스트 필름 쇼> 파잘의 말처럼, “관객들은 빛 속에 얼마나 많은 어둠이 있는가를 보지 못한다.” 무대 뒤편의 스태프를 인지하지 못하는 관객 덕분에 ‘만들어진 세계’는 온전히 스크린/무대에 구현된다.

가시영역 바깥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예술감독(김신애 扮)의 기획은 무대에 펼쳐진 세계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곧 연극에 내재한 어둠을 들추는 일이다. 서서히 존재를 잃어가는 인물이 폐허가 된 극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상. 예술감독은 연극의 최후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끝이 오기도 전에 우리가 정말로 끝을 이야기해야 하나요? 어떤 것이 존재하는 동안만큼이라도 그냥 좋아하면 안 되나요?” 자연의 숨결이 폐허의 빈자리를 채우며 낭만주의의 기운이 흐른다. 하지만 프롬프터에게 극장이 문을 닫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과 같다.

폐허가 된 극장을 상상하고 이를 통해 삶을 관조하려는 예술감독. 그녀의 예술론은 존재자의 절대적 타자, 죽음을 선취하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연상시킨다. 이별, 죽음, 종료로 점철된 <소프루>의 극중극이 이 ‘끝으로부터의 사유’를 돕는다. 영화계 거장들이 저물어가는 필름의 석양을 자꾸만 되돌아보듯, 연극이 멈춘 가상의 세계는 자연스러운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노스텔지어에 머무를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극의 말미에서 프롬프터는 몇 번이고 커튼콜을 유예한다. 배우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이야기 속에서 기도문처럼 “죽지 않기”를 간절히 다짐한다. “연극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미소를 보고 싶다는 예술감독의 소망은 어디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라스트 필름 쇼>의 스틸 컷

현실의 점근선

“당신은 평생 프롬프터로 일했고, 당신이 프롬프터 박스에서 봤던 첫 번째 공연을 관객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술감독이 구상한 극을 완성하기 위해 프롬프터는 자신의 삶을 연기한다. 이는 비전문 배우가 현실과 중첩된 배역을 맡는다는 점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을 상기시킨다(특히 보광극장에서 상연된 <소프루>의 경우,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배우들이 주를 이뤘다). 현실과 허구의 관계는 언제나 키아로스타미의 주된 관심사였다. 로케이션 장소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극영화의 내부로 포섭한다. 지그재그 3부작이 형성한 복잡한 영화들의 관계에서도 <소프루>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장태순 교수의 정리를 그대로 인용한다.

 

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순수한 허구이다.

②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허구를 만든 영화감독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영화 속 영화이다.

③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촬영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영화 속 영화이며,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영화 속 영화 속의 영화이다.

④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자신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그런데 그는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이지 이 영화의 진짜 감독인 키아로스타미 본인은 아니므로, <올리브 나무 사이로> 속의 세계는 우리의 현실 세계가 아닌 허구의 세계이다.

 

장태순 교수는 세 편의 영화가 현실과 허구를 4개의 세계로 나눈다고 지적한다. 4개의 세계는 현실,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세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의 세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세계이다. 또한 “세 편의 영화는 나중에 만들어진 것일수록 우리의 현실 세계에 가깝다.” 그러나 이렇게 재구성된 현실과의 거리는 관객이 영화에서 느끼는 현실감과는 무관하다. 재구성된 층위대로라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가장 현실에서 먼 영화로 느껴져야 한다. 이때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넘어가는 키아로스타미의 독특한 제작 방식 덕분에 각각의 영화는 온전한 현실감을 유지한다.

 

<소프루>의 주연 배우들

다시 <소프루> 무대의 한쪽 구석. 막이 내릴 때까지 단 한 번도 조명이 비추지 않는 이곳에서 우리는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성을 발견한다. 프롬프터를 비롯한 모든 배우의 대사를 속삭이는 그녀는 <소프루> 극 전체의 프롬프터 역할을 수행한다. 극중극의 배우, 극 내부의 프롬프터, 이 모든 것을 조망하는 외부의 프롬프터가 일직선상에 놓인 무대 위 배치는 지그재그 3부작이 형성한 메타 구도를 닮아있다.

연극 무대가 외연을 확장해 나가며 내부의 극을 전복하는 연출은 낭만주의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작가가 예술적 환상을 증가시키다가 다시 환상을 깨뜨리는” 기법을 ‘낭만적 아이러니’라 칭한다. 자기파괴와 재창조가 끊임없이 연쇄하는 루드비히 티크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대표적이다. 만들고 부수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이 역동적인 과정은 단지 영원히 생성될 뿐이며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예술의 근원적 본질을 확인시켜 준다.

지그재그 3부작, 낭만주의극, <소프루>의 확장은 이론적으로 무한히 계속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 점점 다가간다는 사실이 극 너머의 현실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 구석에 자리 잡은 프롬프터는 극 전체를 바라볼 수 있지만, 관객에게 그녀는 여전히 극 내부에 위치하는 배우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찰자를 등장시켜 보아도 결국 또 다른 겹의 픽션 층위를 형성할 뿐이다. 이처럼 무한퇴행을 아무리 반복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현실의 층위를 장태순 교수는 ‘점근선’으로 표현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프롬프터는 “배우가 없다면 프롬프터에 관한 극을 쓸 수 없다”며 절망한다. 자신의 삶을 말할 때조차 필연적으로 거짓을 경유해야 하는 예술가의 입은 늘 쓰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스틸 컷

경계를 넘나드는 유령들

“연극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네가 연극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프롬프터가 처음으로 연극을 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무 의미도 없이 내뱉어진 언어는 배우의 입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무대를 활활 불태울 수 있다. 무대 위가 모든 대사의 의미 형성을 독점하는 셈이다. 하지만 프롬프터는 자신의 유약한 목소리에 안타까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말마따나 프롬프터는 “극장에서 박수를 받으면 실패하는 직업”이다. 그저 “삶이 허구의 둑을 범람해” 극이 정지하지 않도록 막는 것. 이것이 그녀의 숙명이자 주어진 임무의 전부이다. 조금도 초과하거나 미달해서는 안 된다. 무대에 오르지 못한 예술가는 부드럽게 흐르는 극의 물결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그런데, 극이 현실의 틈입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균열의 발원지에는 대사를 숙지하지 못한 배우 베르쉬닌(박가진 扮)이 있다. 프롬프터는 미숙한 배우를 위해 대사를 속삭이지만, 즉흥적인 대사가 튀어나오며 현실과 극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끝내 배우가 대사를 읊고 프롬프터가 몸짓을 수행하는 주객전도가 일어날 때, 대사의 의미가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른다.

극과 극중극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프롬프터의 독특한 존재 방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녀는 “현실과 극의 경계에서, 현실의 둑과 허구의 둑을 잇는 다리에서” 살아간다. 자크 데리다는 자신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 기반한 기존 형이상학과 달리 그는 ‘햄릿’을 인용하며 ‘유령적’ 존재의 ‘경계 위의 삶(sur-vie)’에 주목한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배우들 곁에 달라붙어 영향을 미치는 유령적 현존에 주목한다면, 현실과 극 그리고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소프루>의 구조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스틸 컷

“나는 배우의 실명이 아닌 배역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나는 연극을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본다.”

 

극에 현실이 개입하는 만큼, 현실에도 허구가 틈입하기 시작한다. 현실과 픽션의 상호 침투가 본격화되며 프롬프터는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묵묵히 입을 다문다. 울컥거리는 욕망은 끝내 주어진 대사를 바꾸는 부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새 대본에서 눈을 떼고 말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거죠. … 나는 그녀를 바라봤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내게는 완벽하고 진실한 침묵 같았어요.” 마지막 장에 이르러 금기를 어기는 행위는 프롬프터에게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한다. 이제 그녀는 현실과 극 사이를 가로막던 견고한 벽의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연극에서 현실과 허구는 서로 다른 둑에 머무르지 않는다. 극중극의 배우는 두 차원을 과감히 뛰어넘어 현실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극 안팎의 프롬프터와 배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객은 극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하나의 숨을 들이마신다. 그렇게 영화는 현실에 직접 가닿을 수 있는 연극을 동경한다.

 

참고 자료

• 논문

- 김창래, [철학의 욕망, 끝으로부터 철학하기],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 연구』 제41집, 2010. 11.

- 장태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재그 3부작’의 서사 구조], 영화연구 제81호, 2019

- 김원한, [뿌쉬낀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나타난 낭만적 아이러니], 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2001

• 단행본

- 자크 데리다, 진태원 역,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린비, 2014

- 루드비히 티크, 장제형 역, 『장화 신은 고양이』, 마르코폴로, 2022

• 연극

- 티아구 호드리게스, 허윤영 연출•각색, <소프루>

• 영화

- 판 나린, <라스트 필름 쇼>(2023)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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