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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짐에 저항하기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짐에 저항하기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 정우성(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0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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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이후 <낸 골딘>)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사진작가 낸 골딘의 전기 영화이자 그녀가 속한 ‘페인(PAIN)’ (Prescription Addiction Intervention Now) 그룹이 제약 회사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담은 기록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클러 가문의 퍼듀 파마와 싸우는 현재와 퀴어 여성으로서 소수자로 사회와 불화하고 투쟁하고 살아남았던 예술가 낸 골딘의 과거를 오가는 감독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오프닝에서 낸 골딘이 “당신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죠. 하지만 그보다 어려운 건 실제 기억을 견디는 것이에요”라고 하는 말에 감독이 무슨 뜻인지 물었을 때 “이야기와 실제 기억의 차이죠. 현실은 냄새나고 더럽죠. 그리고 단순한 결말로 끝나지도 않아요. 지금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실제 기억이죠. 보고 싶지 않은 게 나타날 수 있어요.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요.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영향은 남아 있어요. 당신 몸속에요.”라고 답한 것을 떠올린다면, <낸 골딘>이 단순히 정치적 실천을 촉구하거나 행동하는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재산을 빼돌리기는 했지만, 퍼듀 파마가 파산하고 박물관, 미술관, 대학들이 새클러의 후원을 거부하며 끝을 맺는 영화 속 승리는 낸 골딘이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단순한 결말처럼 느껴진다. 그 때문에 <낸 골딘>을 보고 난 후 느끼게 되는 것은 승리의 카타르시스이기보다 슬픔과 무력감에 가까운 감정이다. 화상 재판에서 새클러 가문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족이 사망한 경위를 말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부당하게 사망한 이들의 가족이 겪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낸 골딘의 말을 인용하면, 현실은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사실과 고통이 점점 희미해져 갈 미래에도 기억은 남아 있다.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영향은 남아 있다. 우리의 몸속에 말이다.

현실의 더러움, 죽음과 사라짐에 저항하는 것이 어렵고 불가능한 일임을 <낸 골딘>은 하나의 단순하고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두 이야기, 두 세계를 오가며 둘의 공통점과 차이를 통해 드러낸다. 낸 골딘이 페인 그룹을 만들어 제약 회사와 싸우는 현재를 보편적인 다큐의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과 그녀가 경험했고 기억하는 것들이 과거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들 혹은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사진과 영상과 기록물들을 오가는 구성이 그것이다. 현재와 기억으로 구분되는 두 세계의 차이는 명확하다. 상대적으로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새클러 가문과의 싸움과 비교하면 낸 골딘의 사진들과 그녀의 주변인들이 만들고 출연한 영화와 뉴스 릴들의 모습은 정지된 사진 이미지, 열화된 영상물이 주는, 과거의 것들을 보는 아련함을 넘어, 유령을 보는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이러한 두 세계의 차이는 단순히 지속하고 있는 현재와 과거가 되어버린 기억의 문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경계의 문제로 스며든다. 영화는 거대 기업과 싸우는 시민단체의 이야기와 낸 골딘이 어린 시절 겪었던 언니 바버라의 자살을 아무런 연관성 없이 툭 붙여놓으며 시작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공론화된 부당한 죽음과 사적인 영역에서 잊힌 한 개인의 죽음을 연관시키며 처음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세계가 낸 골딘이 회상하는 자기 삶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적인 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과거 몇몇 사람들의 말이 이제는 우습게 느껴지는 것처럼, 낸 골딘이 촬영했던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 성생활과 같은 내밀한 사적 영역의 모습들, 소수자들의 모습들은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일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이 정치적일 수 있음을 그녀의 삶과 예술을 통해 증명해낸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가 이렇게 불분명한 것처럼 영화는 사실적으로 보이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기록한 현장감 있는 다큐멘터리 이미지와 사진, 뉴스 릴, 기록물들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비사실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정지되고 열화된 이미지의 경계 또한 흩트려 놓는다. 전자와 후자는 시청각적 형식의 차이 때문에 분명 다르게 느껴지지만 그러한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전자 또한 후자와 같은 기록된 과거 이미지임을 상기시킬 때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음이 더 분명하게 다가오게 된다. 즉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지속하고 있는 현재가 과거가 되고 기억이 됨을, 사실적인 현장감 있는 다큐 이미지와 상대적으로 덜 사실적이며 유령과 같은 기록물의 연쇄가 근본적으로, 과거가 되어버린 이미지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도 결국 과거가 되고 기록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출처: 네이버 영화

그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사적인 영역의 문제라 치부되어 잊히고 망각되는 것을 낸 골딘이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라는 도구로 기록한 것은 그녀가 에이즈 감염자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명명했던 전시회 제목인 ‘사라짐에 저항하기’처럼 정치적인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재와 예술의 관계를 지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이다. 페인 그룹이 시위했던 공간들인 박물관과 미술관이 먼 과거에 인간들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증거품들이 모여 있는 공간인 것처럼 말이다. 예술은 그렇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계의 법칙에 저항하는 필멸자의 미약한 제스처이다. 미약한만큼 인간은 세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록하는 것뿐이다. 무력감과 슬픔 안에서도 우리가 존재했음을 알리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있음을 알리는 것밖에 없다. 영화는 그러한 사실을 사진작가인 ‘기록하는 인간’ 낸 골딘의 모습을 ‘기록’하고 과거 ‘기록’되었던 것들을 재배치하고 뒤섞음으로써 다큐멘터리라는 틀 안에 복합적이고 탁월하게 담아낸다. 낸 골딘에 관한 사적이면서 공적인 이야기인만큼, 정치적인 다큐멘터리이면서 예술에 관한 예술, 카메라에 관한 영화로서 자기반영적인 비정치적 다큐멘터리로도 성립한다.

<낸 골딘>의 마지막에 바버라의 유품에 있었던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한 구절을 읽는 장면은 이러한 영화의 시선을 함축하고 있다. “인생이란 우스운 것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한 것. 그나마 자신을 알게 되어도 너무 늦어서 꺼지지 않는 회한만 남지” 바버라의 마음, 노인이 되어 자신 때문에 죽은 딸의 유품을 보는 부모의 마음, 낸 골딘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 문구는 그들의 사적인 기억을 넘어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에게로 스며든다. 콘래드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난 것처럼 제국주의시기의 착취와 학살은 아주 먼 과거가 되었고, 그 사실은 <암흑의 핵심>을 통해 망각되지 않지만, 식민주의와 인간 사회의 부조리는 현재에도 다른 이름과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퍼듀 파마는 파산했지만 여전히 약물 과용 피해가 지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암흑의 핵심>처럼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공적인 기록이 되는 참혹하지만 아름다운 예술 또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버라가 병원에서 보았다던 미래와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그렇게 냄새나고 더럽지만 아름답기도 한 우리 삶, 예술의 양면성과 끝없이 반복되는 세계의 심원함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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