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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이 리치 감독론: 숏폼의 시대를 거스르는 영화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이 리치 감독론: 숏폼의 시대를 거스르는 영화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18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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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틸컷.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영화 제공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틸컷.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영화 제공

시선을 사로잡기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의 한 장면으로 시작해 보자. 이 장면에서 인물들은 한 클럽에서 옷을 벗고 스트립 댄스를 추는 여성 앞에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배리, 개리, 루카스다. 이들은 더블 배럴 샷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인용품업으로 뒷골목에서 악명이 높은 사채업자 해리가 하수인 배리를 시켜 고가의 총(더블 배럴 샷건)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배리는 일감을 맡기기 위해 북부 지역 출신 좀도둑 패거리인 개리와 루카스를 찾아냈다. 사실 중요한 건 인물들이 이러쿵저러쿵 어떤 사연에 얽혀 있는지 따져보는 일이 전혀 아니다. 가이 리치가 이 장면을 어떻게 찍고 또 어떻게 편집했는지 살펴본다면,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패거리에게 일을 맡기는 배리를 클로즈업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가이 리치는 피사체인 배리 뒤의 배경으로 춤추는 여성의 나체를 아웃포커싱한 채로 내버려둔다. 이때 관객은 두 개의 피사체(배리, 여성)에 동시에 시선을 뺏긴다. 문제는 배리가 가만히 앉아 말만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뒤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여성의 형상에 눈길이 더 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이건 단순히 남자 관객이 여성의 나체를 볼 때 느끼는 성적인 흥분도나 긴장도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성별에 상관없이 고정된 피사체보다 움직이는 형태 자체에 시선을 뺏기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재밌게도 다음에 이어 붙는 숏에선 두 명의 좀도둑이 함께 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이 춤추는 여성을 바라보는 건지 배리를 쳐다보는 건지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얼핏 보면 이들이 여성의 나체에 정신이 팔려, 배리가 말하는 내용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르게 보면 배리를 쳐다는 보는데,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들이 대화 자체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신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바로 ‘눈길을 끄는 방식’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은 어디에 눈길이 뺏기는가? 또 피고용인들은 어떻게 눈길을 사로잡히는가? 이 질문들의 귀결점은 바로 ‘가이 리치가 시선을 사로잡는 방식’으로 수렴한다. 이게 바로 그의 영화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논리다.

 

'코드명 스파이 포춘' 스틸컷. ㈜레드아이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파이 코드명 포춘' 스틸컷. ㈜레드아이스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영화에서 물건이나 대상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다. 대상에 눈길을 끌도록 확대해 잡아내는 촬영은 매우 단순하지만 확실한 효과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앞뒤가 다르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가이 리치는 프레임 내부에서 교란이나 혼돈을 도모할 생각이 없다. 그냥 투명하게,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시각 이미지를 최대한 동원해, 관객들을 내 영화에 오래 머무르도록 하고픈 욕망만이 있다. 음악에 맞춰 배치된 숏의 연쇄, 그 각각의 숏에 담긴 피사체들은 때때로 서사나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잉여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렇지만 그 음악의 비트나 선율에 어울리거나, 그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다면 배치될 운명인 셈이다.

<스파이 코드명 포춘>(2023)에서도 그는 인공지능(AI)의 위협이라는 트렌드를 반영하는 소재를 가져오긴 했지만, 사실 AI가 쓰이지 않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영화였지 않았나. 그러니 반복하자면 중요한 건 관객들의 이목을 붙들어 두는 방법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렉(휴 그랜트)이 대니(조쉬 하트넷)를 데리고 후반부에 늘어놓는 연설 신은 가이 리치의 영화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표상하는 중요한 구간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다.

 

'더 커버넌트' 스틸컷.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더 커버넌트' 스틸컷.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정답 없는 형식

지탱하는 논리는 알겠는데, 그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즉 바꿔 말하면, 가이 리치에게 편집은 무엇일까. <더 커버넌트>(2024)를 살펴보자. 존 킨리가 깨어났다. 자신을 구한 뒤 오히려 탈레반의 표적이 된 채 숨어지내는 마흐메드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비자 발급뿐이다. 킨리는 공공기관에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지만, 민원 응대는 절차에 따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달이 넘도록 비자발급에 매달린 킨리의 노력은 “8일째(day 8)” 등으로 지시되는 문구와 빠르게 컷되는 장면의 연쇄로만 정말 스치듯 취급될 뿐이다. 대놓고 요약해서 압축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나.

<킹 아서: 제왕의 검>(2017)에서 장성한 아서가 악몽에서 깨어나는 순간도 떠올려 보자. 그 전까지 제시됐던 장면들은 모두 아서가 아기 때 벌어졌던 일들이다.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고 아서 역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았다. 이 구간에서 가이 리치는 지난 일이 아서의 꿈인지,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인지 굳이 규명하려 들지 않는다. 과거와 환상이 뒤섞인 모호한 덩어리를 그 자체로 내버려둔다. 이뿐만이 아니다. 보티건을 없애기 위해 전략 회의를 하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이 구간에서는 아서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면서 미래가 곧 현재화된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미래의 시공간에서 발화하는 아서와 베디비어의 모습이 제시되며, 영화는 굳이 이 시공간의 뒤틀림을 보정하지 않은 채 서사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대부분의 영화에선 이처럼 서사의 흐름에 조작을 가하는 외부 개입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사실 <킹 아서: 제왕의 검>은 중세 판타지 시대물이라는 성격이 짙게 밴 작품이 아니었나.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앞서 언급한 구간뿐 아니라 곳곳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아른거리는 상황 자체가 혼돈을 가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이 단순히 기교를 잘 부렸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면, 이 사례들을 콕 집어 언급할 이유 또한 없다. 이 구간은 말 그대로 이상하다. 형식이 곧 서사를 뒷받침하거나 혹은 상호작용하는 사례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다수 관객의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중세 판타지 시대극에 백그라운드 스코어나 삽입곡, 슬로-패스트 모션과 되감기 등을 동원한 교차편집이 쓰여야 될 당위성이 있는 것일까? 곧바로 반문해보겠다. 아서 왕 전설을 다루는 중세 시대극에 어울리는 편집이 따로 있는가? 아니면 이런 편집이 쓰이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가? 결국 이 모든 걸 정리하자면,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식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가이 리치 영화의 독특한 포인트는, 바로 그 서사를 그 형식으로 풀어내도 괜찮은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형식이 돋보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형식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셈이다. 바로 형식에 깃든 의도를 알아차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에 의미 부여가 과해질수록 그 해석이나 비평의 접근이 왜곡되거나 과장될 위험이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킹 아서: 제왕의 검'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킹 아서: 제왕의 검'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바깥을 의식하기

그렇다면 (몇 번째가 될지도 모르는) 편집본으로 변모하기 전 찍힌 여러 촬영본의 조합이 어떤 상태였는지 관객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패스트 슬로 모션과 교차편집 사이 원본이 어땠는지 여러 판본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형태를 고정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걸 바꿔 말하면 어떤 형태로든 완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이렇게 편집하고, 이런 대사를 쓰고, 이런 음악을 썼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어느새 무용해질 때, 고개를 내미는 담론이 있다. 가이 리치의 영화는 형식 자체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바깥 세계 내지는 외화면’을 의식하게 만드는 작품들로 가득하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 스텝. 이 논의 자체가 갖는 효용성에 관해 질문을 이어가 보자.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논의는 바로 작품의 완성도를 관객에게 넘긴다는 점에서 짚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외부를 끊임없이 의식하게 만드는 건, 바꿔 말하면 외부에서 어떤 개입 요소가 내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매 순간 판단하는 작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의 내부와 외부의 위계가 계속해서 뒤바뀌고, 어느 것의 주도권이 명확하지 않은 채로 뒤섞이다가도 그 질서가 명확해질 때도 있고 아니기도 한. 그 혼돈 속에서 이게 최선이었을까 관객들은 상상하게 되는 셈이다. <젠틀맨>(2020) 도입부에서도 외부 화자의 내레이션 대사가 곧바로 내부 화자의 대사로 이어졌던 걸 떠올려 보라. 그러니 애초에 내부 세계를 몰입 가능한 실제처럼 구성하는 작업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젠틀맨' 스틸컷. ㈜다날엔터테인먼트 제공
'젠틀맨' 스틸컷. ㈜다날엔터테인먼트 제공

쪼갤 수도 없고, 완성될 수도 없는 세계

몰입할 수 없는 세계를 축조한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영화의 위기, 영화의 종말이라는 키워드가 밥 먹듯 되풀이 되는 시대에서, 가이 리치의 영화는 여전히 생명력을 얻는 루트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먼저 그의 영화에서 특정 구간을 잘라내 추출하는 건 의미 없는 행위라는 점에서 출발해 보자. 그의 시그니처로 취급되는 클로즈업 숏의 연쇄 같은 기법 역시 역설적으로 그의 영화를 구간구간 쪼갰을 때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지 않나. 즉 그의 영화는 쇼츠와 릴스 환경에 부적합하다. 신과 시퀀스를 쪼개볼수록, 시각 자극을 위한 숏의 연쇄는 가득한데, 도대체 그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어떤 걸 겨냥할 건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그래서인지 가이 리치 영화들은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세로 형태 액정 속 자리 잡은 숏폼으로 편집된 영상을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타란티노만 하더라도 킬빌의 액션 신이나 ‘바스터즈’의 오프닝이나 엔딩, ‘펄프 픽션’의 댄스 신 등이 무수히 양산되는 반면, 가이 리치의 작품들은 어느 하나 찝어내기 어려운 느낌을 주지 않나. 온라인에 ‘젠틀맨 명장면’, ‘록스탁 명장면’, ‘스내치 명장면’ 등으로 (디즈니 IP의 영향으로 압도적인 대중성을 자랑하는 ‘알라딘’은 예외로 두겠다) 검색을 해도 유행하는 1분 미만의 쇼츠는 찾기 힘들고, 일부 신을 편집해 놓은 장면들만 겨우 보이는 수준이다. 데이빗 핀처의 <파이트클럽>이나 <세븐> 역시 쇼츠로 볼 때 많이 보이지만, 가이 리치는 그렇지 않다. 마이클 베이나 잭 스나이더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리치와 동년배거나 동시대에 주목받기 시작한 비주얼리스트들의 작품과 어떤 점이 다르길래 그런 걸까.

맥락을 잘라낸 채 일부 신이나 시퀀스 혹은 숏들을 쇼츠로 만나본다고 해도, 그 작품에 깃든 매력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이 리치의 영화는 모든 구간에서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밀도감 있게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대사와 음악과 앵글과 숏의 길이 등 모든 게 전부 과밀한 경우가 많다. 그 말인즉슨 이 영화는 영화 자체를 감상할 때에야 그 동력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리치의 영화를 2배속으로 볼 수 있는가? 그것도 문제가 있다. 감독 스스로가 러닝타임 내에서 타이밍을 조절하고 편집을 요란하게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금의 숏폼 환경에서 가이리치의 영화는 역설적으로 온라인 플랫폼에 속할 수 없는 속성을 머금는다.

그렇다면 가이 리치의 영화는 어디에서 숨 쉴 수 있는가. 완성될 수도 없고, 정박도 불가능하며 속할 플랫폼도 없다면 이 영화가 지닌 요소들 자체가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어떻게 가닿을 수 있는가의 문제만 남지 않겠나. 우리는 다시 이 지점에서 가이 리치가 어떤 점에 매달려 영화를 만들어 왔는지 떠올려야 한다. 생각보다 간단하다. 시선을 사로잡을 방법에만 몰두하는 것. 그래야 극장이 아니어도, OTT가 아니어도, 그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이 영화는 관심에서 잊히지 않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다.

이것이 21세기 연출가들 가운데 가이리치가 고유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사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점에서 가이 리치를 넘을 수 없고 데이빗 핀처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가이 리치는 스스로가 레퍼런스에 얽매이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의 세상은 명확한 레퍼런스가 작동할 수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세계다. 가이 리치는 복수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늘 언급을 피하는 순간들이 있다. 평상시 영감을 얻는 작품이나 영향받은 감독들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린다. 그러니까 그에게 일관된 논리나 작품 철학 같은 건 없어 보인다.

가이 리치가 눈요기로 관객들을 현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란티노처럼 ‘덕후력’을 과시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마이클 베이처럼 시각적으로 장엄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인가? 사실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난감해진다. 가이 리치는 분류하기 참 어려운 필모그래피로 가득하다. 언급한 연출자들은 모두 미학적으로 소신과 방향이 뚜렷하거나, 원하는 지향점이 있다. 하지만 가이 리치는 그저 이목을 끄는 데 집중할 뿐, 뚜렷한 무언가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이자 세계라는 관념 자체를 무언가로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 그의 세계를 보다 깊게 음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제 뻔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끌어오자. “우리는 왜 영화를 봐야 하나?” 때때로 우린 사람들이 영화를 왜 봐왔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다. 지금은 극장에 갈 때 큰맘 먹고 돈을 쓰러 가야 하지만, 한때 영화 소비의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퇴근하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또 지친 일상을 달래기 위해, 또 그냥 재밌으려고 보는 게 아니었나. 즉 가이 리치의 필름은 조각조각 쪼개거나 일부만 관람해서는 그 매력을 끌어안을 수 없기에, 그 밀도 높은 대사들과 시시각각 채워진 음악과 화면 속 디테일을 따라가야만 하기에, 그렇기에 동시대 관객들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는 셈이다. 영화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는 작금의 관객들이 영화와 가까워질 수 있는 하나의 창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의의를 획득하고 또 그의 필모그래피 역시 그런 점에서 동시대성을 획득하는 게 아닐까.

 

'스내치' 촬영 현장. 소니 픽처스 코리아 제공
'스내치' 촬영 현장. 소니 픽처스 코리아 제공

결과보다는 과정을

사실 가이 리치는 셜록 홈즈, 아서 왕처럼 인물이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작품에서조차도 그 인물 자체를 가공하는 방식 대신 인물을 둘러싼 경위와 환경, 경로나 주변 요소를 어떻게 매력적으로 재편할지에 더 큰 관심을 뒀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누가 중심인물이든 간에 대개 군상극의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서사 역시 여러 주체들이 얽히고설켜 난장에 빠지는 범죄판이 될 운명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로를 매만지는 일이지 인물 자체의 서사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알라딘>(2019)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두고 많은 이들이 “가이 리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그 같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조차 리치의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핵심은 오프닝 시퀀스에 있다. 영화는 아이들에게 천일야화를 술술 풀어내듯 매혹하는 보부상의 입에서 출발한다. 물꼬를 튼 이야기는 도시 곳곳을 유영하는 카메라로 넘어간다. 이 롱테이크에서 중요한 건, 바로 시시각각 어떤 요소를 포커싱할지 저울질하면서 관객들의 눈요기를 채우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것. 물론 애니메이션에서도 보부상이 등장해 램프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액자식 구성이 제시되긴 해도, 가이 리치는 대놓고 인간이 된 지니라는 이야기꾼을 내세우지 않았나. 결괏값을 제시하고, 그 과정을 들여다보자고 선언하는 셈이다. 이 같은 구조를 환기하는 이유가 과연 그가 단순 액자식 구성을 선호한다는 데 있는 걸까? 어느 정도는 맞지만, 온전히 그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연출했을까. 그건 바로 가이 리치가 사건의 결과보다 과정을 조명하는 데 더 관심이 있는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를 시퀀스, 신, 숏, 프레임 단위로 끊어내는 순간 묘한 이질감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현상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가이 리치는 쉴 틈 없이 펼쳐지는 ‘과정의 연쇄’가 자아내는 밀도감과 부피감을 정밀하게 재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온전한 덩어리가 쇼츠나 릴스라는 형식으로 재가공된다면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자극과 도파민으로 가득한 틱톡, 쇼츠, 릴스의 홍수에 허우적대는 동시대 대중에게 “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호소하는 가이 리치는 어쩌면 ‘대숏폼 시대’에 영화라는 전통 포맷을 고수하는 사명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눈요깃거리를 화려하게 풀어놓는 데에 집중할 거였다면, 꼭 영화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광고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다 영화판에 뛰어든 가이 리치는 벌써 이 바닥에서 20년이 넘게 구르면서 소처럼 작품을 찍어내고 있지 않나. 그의 영화엔 야망이나 계몽이 없다. 대신 잔뜩 확대된 제이슨 스타뎀의 신체 일부, 휴 그랜트의 맛깔나는 언변과 제스처, 수상하지만 믿음직해 보이는 누군가의 손, 시종 반짝이는 큼지막한 보석, 시선을 사로잡는 묘기와 재간만 어른거린다.

 

'알라딘'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알라딘' 스틸컷.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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