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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연과 이별 그리고 <패스트 라이브즈>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연과 이별 그리고 <패스트 라이브즈>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30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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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패스트 라이브즈' 포스터

1. 한국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는 탄생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호감을 가진 두 남녀, 그러나 여자가 12살 되던 해 이민을 떠나면서 그들의 인연은 중단된다. 12년 후, 여자가 궁금했던 남자는 문명의 이기를 동원해 힘들게 그녀를 찾는다. 서울과 뉴욕이라는 먼 거리 때문에 당장 만나기 힘들었던 두 사람은 이메일과 스카이프로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서로에게 끌린다. 하지만 여자는 삶의 목표에 더 충실하고 싶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잠시 동안 관계 중단을 요구한다. 그는 서운했지만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아이었기에 마지못해 동의한다. 이후 그들은 각자의 일에 열중하며 가끔 상대방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또 다른 인연과 사랑에 빠진다. 여자는 유태계 미국인 극작가를 만나 하나가 되었지만 남자는 사귀는 연인과 결혼 문제로 사이가 소원해진 상태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36살이 되었다. 남자는 오랫동안 미뤘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여자를 만나러 뉴욕으로 향한다. 그들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며 잠시나마 일상을 공유한다. 그들은 과거에 했던 자신들의 선택을 가정법으로 되돌려보면서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 지금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자의 남편은 사려 깊은 사람인 듯 보인다. 그는 남자에게 뉴욕에 와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는 남편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네 남편이 앞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라고 여자에게 말한다. 짧은 재회 이후 남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쉬움, 약간의 슬픔,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그는 서울로 떠나고 여자는 뉴욕에 남는다.

 

첫 번째 이별

캐나다 국적의 교포 감독,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2023)는 특별할 사건을 찾아보기 힘든 담백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렇다고 해서 관객의 흥미를 끄는 매력적인 플롯이나 반전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영화는 한국 사람이면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인연’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누구나에게 있을법한 첫사랑에 관해 말한다. 나는 <패스트 라이브즈>가 한국에서 기획되었다면 1,2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서 영화화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별다른 반전이나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도 없다. 게다가 인물의 심리나 분위기를 드러내는, 예술영화에서 흔히 차용되는 죽은 시간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관객은 극적 재미를 느끼거나 관람 이후, 사유를 '강제당하는' 시간을 갖기도 힘들다. 주연들의 연기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무난할지 몰라도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비록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수 천편에 달하는 개봉 영화중에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작품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예산은 원화로 계산하면 170억 정도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에서 170억을 투자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 영화제작사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기획안이 영진위의 독립예술영화 지원 사업에 선정된다면 4억 언저리의 예산으로 제작되어, 짧은 기간 동안 취약 시간대에 상영되었을 것이다. 몇몇 비평가가 영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겠지만 제작비를 회수할 만큼 선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감독은 대종상, 청룡상 등의 시상식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처럼 대중들에게 회자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어림짐작은 <패스트 라이브즈>를 폄훼하기 위해서 꾸며낸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탄생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패스트 라이브즈>처럼 삶의 소소한 이야기 그러나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그 동안 얼마나 사장되었는지 헤아려보면서 이 선물과 같은 작품이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들, 특히 서양에서 호평 받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중이다.

 

 

2. 인연을 노래하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보편성

  영화는 전체적으로는 순차적 구성으로 이뤄졌지만 군데군데 과거 장면이 삽입되면서 현재와 오버랩 된다. 셀린 송의 자전적 이야기에 바탕을 둔 <패스트 라이브즈>의 플롯은 위성 사건 없이 핵 사건으로만 이뤄진 보기 드문 구조를 선보인다. 대부분의 로맨스 드라마는 두 인물만으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데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매력적인 조연들을 배치하면서 관객에게 극적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 흔한 신 스틸러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고 주연들을 돋보이게 하는 호일 캐릭터 역시 부재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두 남녀의 교감만으로 러닝 타임을 온전히 채워야 한다. 단조로운 플롯에 그나마 변화를 주는 것은 총 세 차례 등장하는 12년이라는 간극이다. 마치 12지(十二支)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처럼 느껴지는 순환적 반복으로 인해 관객은 두 사람이 겪은 변화를 좀 더 명확하게 체험하면서 불가해한 인연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인연, 순환적 반복을 상징하는 회전목마
인연, 순환적 반복을 상징하는 회전목마

한국인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 아닌 소설 『인연』을 반사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인연』에도 세 번의 순환적 반복이 등장한다. 『인연』의 화자는 현재 시점에서 막 청년기에 접어든 열일곱 살의 자신과 초등학교 1학년인 아사코와의 첫 번째 만남을 복기한다. ‘나’는 아침에 태어난 아사코(朝子)를 ‘스위트피이’ 같다고 여겼고 아사코는 ‘나’를 잘 따르면서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준다. 떠나던 날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손수건과 작은 반지를 이별 선물로 준다. 십 삼사년이 지나고 ‘나’는 다시 아사코를 만난다. 그녀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된 ‘영양(令孃)’으로 변해 있었고 ‘나’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듯하다. 아사코가 자신이 다니던 성심 여학원을 안내하는 동안 교실에 두고 왔다가 되찾은 연두색 우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영화 <셸부르의 우산>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와 아사코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벼운 악수로 마무리한다. 또 다시 십여 년이 흐른 후에 ’나‘는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혼혈 진주군 장교”와 결혼한 아사코의 시든 백합과도 같은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아파한다. 아사코와‘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진다.

  피천득 선생의 수제자인 석경징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인연』에는 선생의 경험이 녹아있긴 하지만 텍스트에 쓰인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상상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인연』의 한 구절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사는” 경험을 한다. 아마도 피천득 선생은 어긋난 인연 때문에 이번 생에서 함께 하지 못하는 대개의 사연을 이렇듯 수필을 가장한 소설로 집필한 것일 테다. 아마도 선생은 소설의 꾸밈보다 수필의 진솔함에 끌리는 독자를 배려해 자신의 가장 유명한 텍스트를 살아생전, 대놓고 소설이라고 밝히지 못했으리라. 우리가 『인연』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고 두고두고 곱씹는 이유는 ’나‘와 아사코의 이야기가 우리들 각자의 잃어버린 ’인연‘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셀린 송이 관객에게 들려준 이야기 역시, 피천득 선생의 『인연』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희상 시인의 시, 「인연을 살릴 줄 알아야 한다」 중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피천득, 『인연』

특별히 어리석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들’인 우리는 용기가 없어서, 상황이 안 맞아서, 그땐 그 인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서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런 보통 사람들의 ‘인연’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피천득 선생과 신희상 시인의 문장을 떠올리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놓친 모든 인연은 우리를 슬픔에 잠기게 한다.

 

 

3. 두 종류의 이별 이야기

  12살, 나영과 해성은 첫 번째 이별을 경험한다. 풋사랑이 그들 사이에 피어날 때쯤, 마주친 이별은 각자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이 이별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행한 것이 아닌 부모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서 더욱 애달프다. 하굣길의 막바지에 두 사람의 집은 방향을 달리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잘 가라"는 한마디만을 서로에게 남기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는다. 이 첫 번째 이별 의식의 불완전함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먼 훗날의 재회를 부추긴다. 존재의 사라짐에 대처하지 못해 해성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던 멜랑콜리가 피어난 곳은 군대였다. 가장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12년 동안 숙성된 감정은 표피를 뚫고 현실로 개화한다.

  어렵게 연락이 된 두 사람, 그녀는 그 사이에 나영에서 노라가 되어 있었다. 나영(노라)이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 동안에도 해성은 여전히 해성으로 살아왔다. 해성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넘어야 할 산은 12년의 간극뿐이지만 해성은 이 장벽만 아니라 나영 속에 굳건히 자리 잡은 채, 이제는 유년 시절과 현재를 연결 짓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노라를 상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노라는 과거 속의 해성과 대면하면 그만이지만, 해성은 과거의 나영과 현재의 노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 두 번째 이별 역시 세 번째 이별을 위한 복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당한 이별 의식을 치를 용기를 또다시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 순간, 해성은 과거에 남겨지고 그들의 이별 의식은 또 다시 미래로 유기된다. 나영(노라)을 만나러 태평양을 건널 용기도 없고 자신의 삶을 방기할 형편도 되지 못한 해성 역시 그녀의 제안에 동의한다. 어쩌면 해성은 마지못해 인연의 중단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나영 아닌 노라를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이별을 맞이한 해성

다시 12년이 지나 그들은 36살이 되었다. 1988년생인 셀린 송은 이 영화를 제작할 즈음에 해성, 나영(노라)과 거의 같은 연배가 되었다. 자신이 창조한 겁쟁이 두 캐릭터와 달리 셀린 송은 용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서 길어 올린 두 캐릭터를 지금 현재의 자신과 대면시켰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뉴욕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정면충돌하는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뉴욕은 해성이 나영과 노라라는 분리될 수 없지만 결코 하나가 되기도 힘든 추억의 현재형을 대면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시든 백합이 되어버린 아사코가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혼혈 진주군 장교;와 결혼한데 반해, 노라는 자신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유태계 미국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해성은 ‘나’가 아사코를 바라볼 때 느꼈던 비애감을 느껴선 안 된다. 해성과 나영은 24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이별 의식을 치르면 그만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뉴욕은 오히려 유년 시절 못 다했던 은밀한 의식을 행하기엔 안성맞춤인 도시다. 게다가 그들의 이별 의식에 아주 합당한 입회인도 존재한다. 인연을 떠올리기에 재격인 회전목마를 배경으로 두고 그들은 과거와 현재를 왕복하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가슴 깊이 간직했던 그 동안의 소회를 털어놓으면서 과거의 용기 없음으로 인해 비롯된 지금 현재를 아쉬워하는 그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입회인은 묵묵히 그들의 추도사를 경청한다. 이 가련한 입회인은 외계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정체를 충분히 알아 챌 수 있는 사람이다.

  우버 택시가 도착하고 나서 그들은 침묵으로 이별 의식을 마무리한다. 택시가 떠나고 혼자가 된 두 사람은 각자 두 번째 이별 의식을 치른다. 나영(노라)은 아서가 기다리는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자신의 유년시절과도 작별을 고한다. 입회인이었던 남편은 나영이 아닌 노라를 기다린다. 집까지 걸어가는 데 걸린 10여분 동안 그녀는 36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체감하는 중이다. 연이어 두 번의 이별 의식을 치르느라 심신이 고달픈 아내를 사람 좋은 입회인은 포근하게 감싸준다. 마찬가지로 해성 역시 택시에서 공항으로 가는 동안 나영과 동일한 의식을 치르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과 나영(노라)은 『인연』의 주인공들과 달리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지진 않았다. 『인연』의 ‘나’는 현재로 돌아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며 인연의 어긋남을 슬퍼한다. 하지만 해성과 나영(노라)은 제대로 된 이별 의식을 치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과거가 멜랑콜리가 되어 자신들의 현재를 침범하는 사태는 겪지 않을 것이다.

 

이별 의식의 입회인, 아서
이별 의식의 입회인, 아서

4. 아서의 두 번의 질투

  극중에서 나영은 “우리 잠시 연락을 끊자. 난 이민을 두 번이나 했어. 여기에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데, 나는 맨날 서울행 비행기 표만 알아보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해성에게 잠정적인 이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그녀가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간 장면뿐이다. 어찌된 일인지 나영(노라)은 현재 뉴욕에 머물고 있고 해성과 두 번째 이별했던 당시에는 멘하탄에서 차로 2시간 반 정도 떨어진 롱아일랜드의 몬톡(Montauk)이란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예술가들에게 거주지와 생활비를 보조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선발되어 글을 쓰고 있었고 미래의 배우자가 되는 아서도 프로그램에 합류해 함께 인연을 만들어간다. 아마도 캐나다에 살던 나영(노라)은 극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또다시 이민을 온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벨문학상, 퓰리처상으로 이어진 그녀의 꿈은 이제 연극인들에게 주는 토니상으로 바뀌었다. 극작가인 아서는 나영(노라)과 삶의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이내 서로에게 끌린다. 나영(노라)은 아서에게 동양적 개념인 인연을 '(신의)섭리(providence)’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인연이란 개념이 낯설었던 아서는 나영(노라)에게 “우리가 다른 삶에서 서로 알았다는 거야?”라고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지금 상태가 과거의 인연을 설명한다면서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를 유혹할 때도 인연이란 말을 사용한다”라고 덧붙인다.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면서 나영의 마지막 말을 현실에서 실천한다.

 

아서에게 인연의 의미를 설명하는 나영(노라)
아서에게 인연의 의미를 설명하는 나영(노라)

해성이 아내를 만나러 뉴욕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서는 최대한 평온한 척 한다. 나영(노라)이 해성을 만나고 온 첫날 밤,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아서는 그녀에게 어땠냐고 묻는다. 그러자 나영(노라)은 “네 말이 맞았어. 그는 나를 보러왔어.”라고 답한다. 나영(노라)은 해성이 뉴욕에 일 때문에, 아서는 재회를 위해 왔을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사실을, 관객은 그들의 짧은 대화를 통해 눈치 챌 수 있다. 그녀 역시 해성이 자신을 보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그렇게 의뭉스럽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윽고 두 사람은 아슬아슬한 심리게임을 벌인다.

 

아서: 그 사람 매력적이야?

나영(노라): 응…….모르겠어. 그는 내 머릿속에 사는 아이일 뿐이야. 아주 오랫동안 노트북 안의 이미지였다가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이지. 정말 강렬해. 그냥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서울이 그리울 것 같아.

아서: 그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

나영(노라): 12살짜리 울보를 그리워한 거지. 화났어?

아서: 아니. 난 화낼 권리가 없잖아. 난 지금 이게 얼마나 좋은 이야기인지 생각했어.

나영(노라): 해성과 나의 이야기?

아서: 난 경쟁이 안 돼. 우리 이야기는 인연이 아냐.

 

  한국에서 캐나다로, 다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나영(노라)은 몬톡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직업의 아서와 결혼해 시민권을 취득했다. 뉴욕에서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아서는 그녀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을 수도 있다. 나영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아서는 세월의 깊이를 지닌 해성과 나영(노라)을 연결한 인연의 끈이 자신과 그녀의 것보다 훨씬 견고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권리가 없는 줄 알면서도 질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어찌 같은 선상에서 대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투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아서의 또 다른 질투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그의 직업과 연관된다. 아서는 서울과 뉴욕, 36년의 기다림 끝에 실현된 해성과 나영(노라)의 재회 이야기가 레시던시에서 싹튼 자신들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아서의 마지막 대사는 예술가로서의 질투를 표출한 것이다. 질긴 인연과 여기에 동반된 이야기에 질투했던 아서는 아내의 과거를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낙담한다. 그는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아내를 귀엽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다고 말한다. 자신이 모르는 언어로 중얼대는 아내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아서는 켜켜이 쌓인 지층과도 같은 아내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 상대의 언어를 알아듣는다고 해서 아내를, 혹은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언어가 아닌, 인간 존재론에 관한 문제이다.

 

문제의 수미상관
문제의 수미상관

수미상관으로 구성된 뉴욕 어느 바의 대화 장면에서 해성과 나영(노라)이 한국어로 대화하기 때문에 아서에게 공감한 관객은 그가 느낄 박탈감과 고립감을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이 장면을 생각해보자. 이 대화 씬은 해성이 뉴욕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그리고 있다. 아서는 해성과 나영(노라)이 깊은 인연을 통해 만든 이야기에 질투했던 번민의 시간을 잘 버텨냈다. 이제 아서는 이 장면에서 질투라는 감정을 내던지고 이별 의식의 입회인 자격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려 한다. 과거와 완벽하게 결별한 아내가 현재와 동격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란 확신 하에,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마법의 주문처럼 여겼을 것이다. 아서가 할 일은 이별 의식을 끝낸 아내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해성과 나영(노라)은 24년의 기다림, 36년에 걸친 인연을 이 한 번의 만남으로 정리했을까? 마지막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자. 집을 나선 해성과 나영(노라)은 뉴욕 주택가의 밤거리를 아무런 말도 없이 걷는다. 의미 없는 대사("택시 금방 오나?"/"응 2분")를 제외하면 이 장면은 무려 3분 가까이 지속된다. 택시가 오기로 한 장소가 더 멀었다면 그들의 침묵도 더 길어졌을 것이다. 드디어 해성이 입을 연다.

 

짧은 만남, 긴 침묵
짧은 만남, 긴 침묵

 

해성: 나영아.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는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그때 우린 누굴까?

나영: 모르겠어.

해성: 나도……. 그때 보자.

 

  “나도” 이후에 한참을 뜸들이다가 해성이 “그때 보자”라고 말하는 이 대사는 참으로 기묘하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해성이 뉴욕으로 나영(노라)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그녀는 스크린 밖에서 이에 대한 답례로 그에게 서울에서의 만남을 약속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때 보자”라는 말은 “다음 생에 보자”라는 의미로,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대사가 된다. 전자라면 인연은 이어질 테지만, 후자라면 “그때 보자”는 이번 생에서 건네는 마지막 인사다. 나영(노라)은 뚜벅뚜벅 집으로 향한다. 남편이 현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는 남편 품에 안겨서 운다. 아서는 나영이라는 과거를 떠나보내고 온전히 노라가 된 아내를 꼭 안아준다. 그녀는 이제 다시는 해성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그래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성의 마지막 대사 “그때 보자”는 두 번째 의미인 셈이다.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긋난 인연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이며, 인간의 근원을 탐색하는 존재론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비록 서양인들의 사전에는 없지만 삶에서 느끼고 살았던 영화의 감각을, 신의 섭리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동양의 인연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했다. 여기에 셀린 송이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집한 수많은 트로피들의 비밀이 숨어 있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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