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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역사가 영화가 되고, 영화가 역사가 될 때-<이니셰린의 밴시>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역사가 영화가 되고, 영화가 역사가 될 때-<이니셰린의 밴시>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4.12.31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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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영화의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인류가 과거 걸어온 길이 오늘로 이어지고 있으며, 내일로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소환해 영화로 다시 다루는 배경도 그러하다. 크나큰 고통의 상흔을 잊지 않고 간직할 때,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끊임없이 영화가 된다.

그런데 그동안 영화가 역사를 그리는 방식은 다른 소재를 다룰 때에 비해 꽤 고정적이었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면서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재현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2023)는 기존의 방식을 뒤집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역사를 관통한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아일랜드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1923년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소재는 내전 자체가 아니다. 가상의 섬 ‘이니셰린’에서 펼쳐지는 두 친구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단 글리슨)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밴시’는 고대 켈트 신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죽음을 암시한다. 가상의 공간과 신화적 요소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미 기존 역사 영화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니셰린 섬에 살고 있는 파우릭과 콜름의 다툼을 그린다. 이들이 내전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격화되는 다툼은 아일랜드 내전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두 인물의 다툼과 함께 본토에서 들려오는 총성 소리가 영화 곳곳에 배치돼 내전을 암시한다.

이들의 싸움은 콜름의 일방적인 절교 통보로 시작된다. 여기엔 그럴싸한 명분이 작용한다. 콜름은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절교 통보에도 자신을 계속 찾아오는 파우릭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기 위해, 바이올린 연주에 가장 중요한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하나씩 자른다. 결국 음악은 콜름이 달성하고자 한 진정한 목표가 아닌, 명분이자 허울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인물로부터 시작된 갈등은 예상치 못한 죽음들을 초래한다. 여기서 밴시라는 신화적 요소가 또 하나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영화에서 밴시라는 존재는 맥코믹 부인(쉴라 플리톤)으로 표상된다. 맥코믹 부인은 영화 초반엔 시오반과 교류하며 파우릭의 집을 자주 드나드는 노부인 정도로만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터 맥코믹 부인은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예언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죽음이 늘 사람들의 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에서 내전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니셰린의 섬을 기준으로 먼 곳에 있는 본토에서 총성이 아득히 울려 퍼지는 소리가 배경처럼 깔리거나, 인물들의 대화 도중 총성에 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는 정도이다. 대신 영화는 그 폭력성을 두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콜름이 자기 손가락을 잇달아 자르고, 이를 파우릭 집 앞에 던져놓는 식이다.

동시에 열린 결말을 통해 비극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다툼을 반복하던 파우릭과 콜름은 서로에게 큰 상처만을 남긴 채 마주하게 된다. 이때 두 사람이 언급하는 것은 본토에서 이뤄지고 있는 내전이다. 콜름은 “본토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은 지 이틀쯤 됐네. 전쟁이 끝나가는 모양이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파우릭은 “머지않아 다시 시작할 걸요. 그게 좋은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이는 파우릭과 콜름의 다툼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겼음에도, 이후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을 보여준다. 즉 내전과 같은 인간들 사이의 갈등은 끝난 것처럼 보여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영화는 역사로 확장되고, 나아가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경각심을 일깨운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글·김희경
인제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상물등급위원회 자체등급분류 사후관리위원,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사무총장, 한국영화학회 대외협력이사, 은평문화재단 이사, 영화평론가, 만화평론가로 활동. 前 한국경제신문 기자, 前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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