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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문화톡톡] K 역사여행 전시사용설명서 1
[김정희의 문화톡톡] K 역사여행 전시사용설명서 1
  • 김정희(문화평론가)
  • 승인 2024.12.31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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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계태평(太平繼太平): 태평성대로 기억된 18세기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태평성대의 사전적 의미는 ‘어진 임금이 잘 다스리어 태평한 시대’이다. 이번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태평성대를 주제로 조선의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 서울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영조와 정조는 어진 임금이었을까. 그래서 당시 조선의 사람들은 태평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까. 2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삶은 태평한가’라는 질문이 무색하게 어수선한 시국에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성대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영의정이 현재 지문(誌文)을 짓고 있는데 선대왕의 업적은 바로 균역, 탕평, 준천을 시행한 것이다. ”

『정조실록』 즉위년 (1776) 5월 16일

정조실록에 등장하고 있는 영조의 업적은 균역, 탕평, 준천이다. 영조가 즉위한 1724년부터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0년까지 조선은 외부로부터의 직접적인 침략은 없었으나 내부적으로 붕당 간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영조는 아들을 잃으면서까지 탕평책을 실시하였고, 정조대까지 이어지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가 죽고, 정조가 늦게 얻은 아들 순조가 열한 살 밖에 안 된 나이에 왕이 되면서 조선은 세도 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탕평

전시는 탕평비 탑본 (1742)의 글귀로부터 시작된다. 영조가 지은 탕평비문의 내용은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영조는 탕평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짓고, 성균관에 들어가는 입구에 비석을 세웠다.

 

오간수문은 개천의 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성곽 아래에 만든 수문이다. 세종 때 이간수문을 추가로 설치했다. 1760년(영조36)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봄놀이 장소로 유명했다. 수문은 1907년에 헐렸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오간수교가 놓였는데,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지게 되었다.  사진© 김정희
오간수문은 개천의 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동대문과 광희문 사이
성곽 아래에 만든 수문이다. 세종 때 이간수문을 추가로 설치했다.
1760년(영조36)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으며,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봄놀이 장소로 유명했다. 수문은 1907년에 헐렸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오간수교가 놓였는데,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지게 되었다. 사진© 김정희

준천

준천(濬川)은 개천을 파서 쳐내는 것이다. 태종 때인 1411년 청계천 양변에 돌 축대를 쌓고 얕은 곳을 파내며 다리를 건설하였는데, 이 물길을 여는 ‘개천’(開川) 공사가 하천의 이름이 되어 개천으로 불렀다.

개거도감을 설치하고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도록 명하다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 윤12월 14일

세종 1444년 풍수설에 따라 명당수인 개천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 버리는 것을 금지하여 깨끗하게 하자는 상소가 들어왔는데 다른 쪽에서는 개천에 더러운 것을 버릴 수 있게 해야 도성 안이 깨끗해진다고 반박했다. 세종은 풍수서라는 것이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면서도 개천의 용도를 하수도로 정했다.

한양의 인구는 조선 전기 10만 명 정도였다가 임진왜란 직후 급감 후 조선 후기 20만 명 정도로 2배가량 증가했다. 태종 때 준천 공사를 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개천에는 토사가 쌓여 생활 하수가 흘러넘쳤고, 홍수 피해가 상당했다.

“사석이 흘러내려 도랑을 메워 수도(水道)가 막히어, 날씨가 가물고 건조하면 축축한 데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고, 비가 오면 물이 불어 평지에 범람해서 근방의 인가에 미치게 되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 (1710) 9월 5일

“성중(城中)의 개울이 거의 모두 막혀서 매양 여름 장마철을 당하면 개울가에 사는 백성들이 피난 갈 준비를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더러는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니”

『영조실록』 영조 27년(1751) 11월 10일

백성과의 소통 순문(詢問)

준천공사는 꼭 필요했지만, 재정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해서 쉽지 않았다. 영조는 9차례에 걸쳐 백성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묻는 순문을 하였다. 영조는 광통교에 직접 나가 순문을 한 적도 있는데, 준천 문제 외에도 재위 기간 200여 차례나 백성을 만나 순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성들 가운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려하여 이렇게 하문하는 것이다.”

『영조실록』 영조 28년 (1752) 1월 27일

영조는 드디어 준천소(1759년)를 설치하고, 영조 36년(1760) 2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동원하여 ‘경진준천’을 시행하게 된다. 당시 준천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도성 내부 백성, 도성 외부 지원자, 하급 관리, 장교 및 군병, 시전 상인, 공물 납품인, 각종 기술자, 승려, 임금 노동자 등이었다. 영조는 준천 공사의 배경과 준설내용, 준천사의 조직과 활동, 범람을 막기 위한 방법 등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하였고 이 책은 이후 청계천 준천의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지금 나는 ‘어렵다(難)’는 글자 한 자를 이 책 『준천사실(浚川事實)』의 첫머리에 둔다.”

『준천사실(浚川事實)』 영조 36년(1760)

이 한마디로 준천공사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영조는 준천공사후에 발생한 민생문제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개천 주변에 살고 있던 이들 중 거주지를 잃게 된 이들을 위해서는 도성의 빈집 중 일부를 매입하여 제공하도록 하였다. 개천의 양 둑에 준천 때 퍼낸 흙을 쌓아둔 가산이 생겼는데, 일부는 훈련원과 동대문 밖의 땅을 메우는 데 사용했고, 가산 나머지 부분에 빈민과 거지들이 토굴과 토막을 짓고 살게 되었다. 영조는 개천을 중심으로 늘어난 거지들의 동냥으로 불안해질 수 있는 치안을 방지하고, 그들에게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해 뱀을 잡아 팔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하였다.

“개천의 준설은 첫째도 백성을 위함이요, 둘째도 백성을 위함이니....”

『준천사실(浚川事實)』 영조 36년(1760)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세우지, 어찌 임금을 위하여 백성을 냈겠는가?”

영조실록 부록 영조 대왕 행장 영조 36년 (1758) 1월

영조는 백성을 위해 준천공사를 한다는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하늘이 백성을 위해 임금을 세웠고, 임금은 백성을 중심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태평성대의 조건이라 한다면 영조시대는 태평성대가 맞다고 하겠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1760 부산박물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1760 부산박물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영조는 준천후 『준천사실(浚川事實)』 편찬만이 아니라, 한 것이 아니라, 경진준천을 기념하기 위해 『준천첩』을 제작하였는데, ‘어제준천계첩’ ‘어제갱진계첩’ 두 종류가 전해진다.

‘어제준천계첩’은 영조가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준 것을 기념하여 제작하였고, 준천에 참여한 관원들을 위해 작성한 어제 어필, 준천의 과정 중 영조의 행적과 공로자들을 격려하는 내용을 그린 그림 4장, 준천에 동원된 관원의 명단과 인력에 관한 내용, 준천첩의 완성 배경을 설명한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갱진계첩’ 은 영조가 지은 시에 대해 신하들이 화답하여 올린 시를 모아 제작되었는데, 1장의 그림과 여러 편의 화답시가 수록되어 있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영조가 오간수문에 친히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것을 그린 것이다. 준천 당시의 오간수문의 모습과 공사 현장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글·김정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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