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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물질, 시간, 책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물질, 시간, 책임
  • 김현승 | 영화평론가
  • 승인 2025.01.3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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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머니즘적 수행성 이론의 실마리, <솔라리스>를 중심으로
하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크리스

우주 정거장에 도착한 ‘크리스(도나타스 바니오니스 분장)’가 잠에 든다. 꿈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눈을 뜨자 같은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다. 익숙한 듯 낯선 이 여인은 오래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크리스의 아내 ‘하리(나탈리아 본다르추크 분장)’이다.

오래도록 깊은 잠에 빠져서일까. 하리는 사진 속 자기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공포를 느낀 크리스는 부활한 아내를 로켓에 태워 광활한 우주 너머로 보내버린다. 우주 정거장의 다른 선원들도 이 ‘유령적’ 존재의 출몰을 인지하고 있다. 선원들 사이에서 ‘손님’이라 불리는 이들은 “의식 속 어떤 존재의 물질화”이다. 엑스레이 실험 이후 혹성 ‘솔라리스’가 선원들의 기억 일부를 끄집어내 실체화한 결과물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걸작, <솔라리스>(1972)의 한 장면이다. 원자로 구성된 인간과 달리 중성미자로 이루어진 ‘손님’의 신체는 불안정한 구조를 갖는다. 인간 내부를 향하는 독창적인 SF 서사가 감독 특유의 신비로운 색채를 만난 결과, ‘손님’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축이 되었다.

정전에 오른 영화를 다시 도마 위에 올리는 작업은 많은 부담을 수반한다. 거장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때론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재해석을 불허한다. 하지만 모든 영화는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믿음으로, 또 그것이 빛바랜 영화에 새 숨을 불어넣는 의식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은 <솔라리스>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물질 중심의 분석은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을 경유하여 김소영의 ‘영화의 기후’적 관점에 도달한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가용 되지 않았던 개념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재해석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중성미자, 생동하는 물질성

연구원에 따르면 솔라리스 행성은 안개처럼 보이는 끈끈한 물질로 뒤덮여있다. 혹자는 솔라리스가 하나의 독특한 ‘생각하는 물질’이자 ‘두뇌 바다’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SF 상상력이 가미된 안개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 형태의 매개체를 통해 정동(감정이나 정서보다 더 원초적이고 신체적인 반응)을 폭발시키고, 심지어 선형적인 시간선마저 뒤흔드는 물질 작용은 자연과 사회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속성을 부여한다는 브루노 라투르(1947-2022)의 논의를 상기한다.(1) 캐런 바라드(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의 말마따나 “물질과 의미는 분리된 요소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뒤얽혀(entangled) 융합되어 있으며, 어떤 사건도, 그것이 아무리 강력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2)

물질 작용을 중심으로 <솔라리스>를 다시 접할 때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는 단연 ‘손님’이다. ‘손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은 이자벨 스탱거스(Isabelle Stengers, 벨기에의 철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의 논의를 상기한다. 스탱거스는 과학적 실천이 어떻게 다른 실천들과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대해 고찰했다.(3)

그녀에 따르면 과학은 단순히 객관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과학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를 공동체의 가치로 확립하는 정치적인 과정을 거친다. 이때 ‘중성미자’가 그녀의 논의에 중요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중성미자는 규칙성에 기초한 일반 법칙에 따라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중성미자의 본질적인 속성이 상호작용에 민감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가 관찰자(인간)와 긴밀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중성미자와 인간 관찰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중성미자로 이루어진 <솔라리스>의 ‘손님’은 주인공 크리스의 기억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든 관측자의 상황에 따라 변모/변이할 수 있는 열린 경계를 갖는다.

동시에 ‘손님’은 주인공의 “과거 기억이 현실 속에서 물질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치한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언제든 시간성을 초월하여 재출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유령’을 상기한다. 영화 내에서도 겁에 질린 크리스가 하리를 우주 너머로 보내버리지만, 다음 날 거짓말처럼 또 다른 하리가 그를 방문한다.

바라드는 자크 데리다의 ‘이접된 시간’(disjunctive time, 서로 다른 시간이 나뉘어져 있으나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을 토대로 시공간의 ‘연속성’에 도전한다.(4) 물질들이 끊임없이 얽히는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유령학(hauntology)’은 시공간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열린 과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시공간 전체를 포괄하는 연속성의 감각은 허상이다. 모든 사건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회절(diffract)하는 현재성을 갖는다.

이에 조응하듯 인간과 솔라리스 행성의 내부화-작용으로 생성된 ‘손님’의 유령학적 특성은 영화 내 시공간을 뒤흔든다. 심지어 내부화-작용의 역동성은 종국에 인간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경계마저 붕괴시킨다.

 

<솔라리스> 우주 정거장 내부의 모습

 

시간의 가역성

“영화에서 감독이 하는 작업의 본질은 무엇일까? 시간을 조각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평생에 걸쳐 천착해 온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와 시간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영화에 각인하고자 한 시간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또 다른 작품 <거울>(1975)에서 두드러진다.

하나의 거대한 콜라주로 구성된 <거울>은 다큐멘터리 필름과 고전음악, 감독의 아버지가 남긴 시의 구절을 일관성 없이 뒤섞으며 의도적으로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흐린다. 무엇보다 <거울>의 플롯을 난삽하게 헝클어뜨리는 주된 요소는 시간과 끊임없이 얽혀 있는 인물들의(혹은 감독 본인의) 기억이다.

그런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뒤섞이는 것은 시간의 여러 물결만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미지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솔라리스>에서 행성을 뒤덮은 가상의 안개는 현실의 구름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현실과 픽션의 혼용은 ‘키아로스타미적’(Abbas Kiarostami, 1940~2016, 이란의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크리스 마커(1921~2012, 프랑스의 실험영화 감독)의 방식을 닮아있다. 가상의 3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방파제>(1962)의 ‘디제시스(diegesis)’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제 폐허의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것과 흡사하다.

영화가 지닌 모호한 장소의 존재론은 현실, 영화 내 지구, 솔라리스 전체를 아우른다.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쇼트에 폭발적인 로켓 엔진의 소음이 결합하며 우주선 발사 장면을 대체한다. 실제 도로의 모습에 뿌리를 둔 이미지는 과감한 연출과 맞물리며 SF 세계에 균열을 내는 틈새로 작용한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달리 타르코프스키는 SF 장르에서마저 완전한 가상의 공간을 제시하지 않는다.

‘디제시스’는 언제나 영화 바깥의 현실과 손을 맞잡는다. 우주 정거장에서 바라본 솔라리스의 모습마저 장렬히 타오르는 노을과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의 이미지가 합성된 것이다. 이 독특한 장면 구성 원리는 영화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타르코프스키의 주장과 직결된다.

<거울>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꿈과 현실, 배우의 신체와 배역의 유령이 한데 포개지며 서사를 흐트러트린다. 기억은 시간의 주요한 매개체지만, 끝내 불분명한 이미지로 이어질 뿐이다. 이때 영화의 제목이 내포하는 자기반영성은 작품의 총체성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남긴다. 거울을 닮은 영화는 기껏해야 능숙한 재현에 그칠 수밖에 없는 픽션의 한계를 체감한다.

하지만 불가피한 왜곡에도 영화는 시작과 끝에 두 개의 거울을 배치하여 그 사이의 무한한 반사를 통해 현실로 나아갈 가능성을 회복한다. 결국 디제시스와 현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이미지와 비선형적인 시간선을 통해 영화는 격동의 시대와 그 속의 개인사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의미를 형성한다. 영화 장치(apparatus) 또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표현대로라면 “사실의 형태를 띠는”, 경계-만들기(boundary-making) 실천인 셈이다.

 

현실과 비현실,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모호한 <거울>의 스틸컷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은 시간을 내부화-작용의 역동성에 의해 재구성되는 현상으로 바라본다. “매 순간은 세계의 생성을 위한 여러 가능성으로 살아 있으며, 책임과 책무의 문제들은 각 가능성과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바라드는 “윤리성이 세계의 기본 구조의 일부이며, 응답하고 책임져야 하는 윤리적 요청이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고 강조한다.(5) 이와 유사한 주장을 타르코프스키의 책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윤리적 의미에서 시간의 가역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간은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범주일 뿐이므로 우리의 물질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 원인과 결과는 직선적인 동시에 가역적인 관계 속에 상호 작용한다. … 어떤 결과를 두고 우리는 그 원천으로, 그 원인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간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양심을 통해 시간을 되돌린다. 원인과 결과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가역적인 관계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럴 때 인간은 과거로 되돌아간다.”(6)

타르코프스키의 사유는 시간을 거스르는 주체가 인간 존재, 그중에서도 예술가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바라드와 차이점을 보인다. 하지만 비가역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간을 재구성하여 윤리적 의무를 끌어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비록 신비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타르코프스키는 항상 자신의 영화에서 “자연이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자연을 하나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그의 말속에서 우리는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형태의 행위소’(non-human actant,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에서 나온 개념) 전체를 포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적 수행성 이론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1) 김소영, 「영화의 기후」, 『introducing Korean Popular Culture』 chapter 8, Routledge, 2023, p95
(2) 캐런 바라드, 『Meeting the Universe in Halfway』, 듀크대, 2007
(3) 이자벨 스탱거스, 『Cosmopolitics I』, 미네소타대, 2010
(4) 캐런 바라드, 「Quantum Entanglements and Hauntological Relations of inheritance     : Dis/continuities, SpaceTime Enfoldings, and Justice-to-come」, <데리다 투데이(Derrida Today)>, 2010
(5) 캐런 바라드, 『Meeting the Universe in Halfway』, 듀크대, 2007, p179~182
(6)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시간의 각인』(곰출판, 2021), 제3장: 시간의 각인 중,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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