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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이 된 미래의 포스트모던 걸들
‘눈사람’이 된 미래의 포스트모던 걸들
  • 김혜영 | 시인
  • 승인 2025.01.31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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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망령을 물리친 ‘키세스’ 전사단

전시도 아닌데 한국의 국민에게 감히 계엄을 선포하는 독재자 대통령이 있다니!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그 권한을 잠시 빌려준 것인데 그는 왕이라도 된 듯이 행동했다. 여전히 그의 버티기에 동조해서 협력하는 정치인들 역시 합리적 이성이 아닌 당리당략을 쫓는 행동을 일삼고 있다.

눈이 내리는 서울 거리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눈사람이 된 사람들이 있다. ‘키세스 시위대’로 불리는 눈사람 같은 청년들이다. 키세스 초콜릿을 포장한 은박지처럼, 추위를 피하려 은박 담요를 두른 채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밤을 새운 시위대를 보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위 현장 사진과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들인 ‘키세스 전사단’, ‘우주 전사’ 등이 SNS에 등장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전 지구를 휩쓴 코로나를 겪은 MZ세대들에게서 개인주의적인 취향이 두드러진다고 했는데 대반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나온 무수한 창의적인 깃발들의 문구, 응원봉, 그리고 케이팝 춤과 율동 역시 아주 인상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청년들의 피는 숭고하리만치 소중하다. 『다정한 사물들』(1) 시집에 수록된 시 「소년의 피로 물든 나무」는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인 <1987>(2017)을 극장에서 보고 난 뒤에 쓴 시이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닌 나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만행을 전시한 사진들이 교내에 전시된 것을 보면서 무척 괴로웠다.

계엄이 선포된 후의 끔찍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한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의 행동에 대한 법적 책임을 확실하게 묻고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정치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윤석열을 정치적 이용 가치를 위해 여당에서 수용한다면, 다음 세대의 권력자 역시 불리한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그러한 행동을 실행할 근거를 제공해 주게 된다. 법을 전공한 대통령이 온갖 삿된 논리로 자신을 변호하고 혼자만 빠져나가 판을 다시 뒤엎겠다는 망상을 저지해야 한다.

 

봄이 왔는데 수선화는 피지 않았다. 1987년은 자살이 어울리는 해였는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소년의 피를 뿌려야만 자라는 나무인가. 군부 독재를 반대하던 박종철은 물고문으로 죽었고, 이한열은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죽었다. 수선화도 죽었다.

여름이 왔는데 신문을 읽지 않았다. 대자보에 실린 광주의 피 흘리는 사진을 보면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데모하는 선배에게 장학금으로 회유하던 유학파 교수 A의 입에서 침이 튀겼다. 그 수업 시간에는 맨 뒷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었다.

코끼리 무덤 같은 강의실에 진리는 보이지 않았다. 한낮의 권태처럼 파란 넥타이를 맨 교수 A의 수업은 지루했다. 1987년은 불구의 시대였다. 서른 번의 겨울이 지나 신세계 영화관에서 개봉한 영화 <1987>을 본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바이러스가 옮겨왔는지 기침이 난다. A형 독감이다.

희랍의 신화를 읽는다. 늙고 병든 왕을 물러나게 하려고 소년의 피를 제물로 바쳤다. 꽃집에서 히아신스, 수선화, 글라디올러스를 산다. 소년의 붉은 피는 꽃보다 아름다운데 소년의 어미가 운다. 가슴을 쥐어짜는 만년의 울음처럼, 온 몸에 신열이 난다.

― 『다정한 사물들』 90-91

 

권력욕에 눈이 먼 ‘늙은 왕’을 거부하려는 청년의 순수한 열정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횃불이 되어왔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숭고한 그리스 소년의 핏속에는 정치의식이 꽃 핀 현대의 소녀들의 피도 공존한다. 한남동 관저 근처에서 추위와 어둠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소녀들의 연대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0년대의 시위를 주도하던 세력들이 외치는 강렬한 구호보다 오히려 시위를 즐기는 듯 가볍게 흥겹게 대처하는 유연함이 놀라웠다.

아마도 세계사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위 가운데 한국의 시위 문화가 던진 가장 신선한 충격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박근혜 탄핵 때의 비폭력 촛불 시위에 이어 키세스 시위대가 견지하는 환한 응원봉의 불빛 축제는 한국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

 

종교와 정치적 권력과 결탁하는 기이한 현상

한편 키세스 시위대와 반대로 윤석열 탄핵을 저지하려는 태극기 부대를 보면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특히 그들을 선동하려는 대통령의 메시지는 자신만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위장 전술 같아 불편하다. 범죄자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부 국민에게 깊이 뿌리박힌 ‘반공’이란 개념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진정한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 중의 하나인 북한을 추종할 사람이 남한에 얼마나 될 것인가?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중국마저 자본주의에 기대고 있는 형편인데 참으로 허황된 논리에 종속된 일부 국민이 안타깝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던 시기에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를 타려다 마주친 태극기 부대를 보면서 쓴 시가 「A. I. 소녀와 히아신스 소년의 대화」이다. 미래를 향해 A.I. 세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마치 왕정 시대로 복귀한 것 같은 태극기 부대들의 시위와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한 시이다. 특히 종교와 정치적 권력과 결탁할 때 빚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우려스러웠다.

 

집으로 가기 싫은 엄마는
서울역으로 간다

예수를 믿으라는 확성기 소리에 
가로수는 귀를 닫고
태극기를 휘젓는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꽃들은 창문을 닫고 
기차는 떠난다

절대 왕정이 무너진 시대에
환생한 영혼이어서 행운이라 생각해 

초라한 왕녀를 위해
쥐꼬리만큼의 용돈벌이에 나선
노인의 얼굴은 불안해  
 
A. I. 변호사는 판례를 검토하고
A. I. 의사는 빨간 반점이 번진 위를 분석하고
A. I. 택시 기사는 윙크를 한다

손님, 미래로 떠나실 거죠

―  『다정한 사물들』 59-61

 

한국 사회를 이끌 새로운 여성 정치지도자는 언제 도래할까? 고 박정희 대통령의 딸로서 공주처럼 군림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일부 국민의 애정과 연민은 지역 위기 주의와 결합해서 이상한 효과를 불렀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라서 절대 왕정 시대의 사유가 필요 없는데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분들도 있다. 국민이 왕이며 국민이 주권을 소유한 주체로서 대통령은 잠시 선거를 통해 그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인데, 무조건 대통령을 경호하고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과거의 유령에 잡힌 듯하다.

한편 서울대학교 법대라는 최고의 지성을 상징하는 곳을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사유 구조가 이토록 얕고 형편없었다는 것에 실망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어느 시인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 “정치 9단의 처사”라고 찬양하는 글을 보니 참담했다. 그분 역시 상당한 지성을 갖춘 분이었는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난 연말의 문학 모임에 갔더니 그분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던 시인들이 그 시인을 페이스북에서 친구 삭제를 했다는 말을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견해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나의 견해만 옳을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에 대해서는 국민이 아주 엄격하게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협조적인 야당 의원들을 겁주기 위한 계엄령이라는 궁색한 변명이 들어설 여지를 차단해야 한다. 계엄령이 실패했기 망정이지 만약 그 계엄령이 성공했다면 한국 사회는 어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아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어디론가 잡혀갈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정치 주체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사회에 유리 천장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역동적인 흐름이 있다. 한국 정치사를 이끌 새로운 여성 지도자의 도래를 꿈꾸어 본다. 사실 나는 지난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아닌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해리스를 지지했었다.

 

‘모던 걸’의 정신을 계승한 한국의 키세스 시위대 

아쉽게도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의 재선으로 끝났지만, 여성 정치지도자가 개척할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모던 걸」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도했던 서프러제트(suffragette)를 소재로 쓴 시이다. 서프러제트(suffragette)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가 참정권 운동을 위해 1903년에 결성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을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경멸조로 표현한 말이었다. 팽크허스트는 초기 합법적인 운동을 택했지만 좀 더 급진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경멸조의 서프러제트라는 표현을 만들어낼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1913년 교사 출신 서프러제트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은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참관하는 경마 대회에서 가로대 밑으로 빠져나가 달려오는 국왕의 말에 몸을 던져 순교했다. 경찰은 신문지로 그녀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막았지만, 데이비슨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외투 안에서 ‘WSPU’라고 쓰인 깃발 두 개가 발견되었다. (<중앙일보> 2018년 2월8일. 런던  김성탁 특파원)

 

1.
시간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소녀는 
먼 미래에서 온 전사처럼

유리 절벽의 끝에 선다

유리가 부서져 내리고 
맨 밑바닥에 널린 유리 조각들을 치우러
소녀는 무선 청소기를 가져 온다 

청소기를 휘저을 때
처녀자리를 떠돌던 별들은 멀어져가고
무소의 뿔이 이마에 돋아난 소녀는 
추락하는 순간에도 웃는다

2.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급진적 서프러제트였던 에밀리 데이비슨은 
국왕 조지 5세가 참석하는 경마 대회에서 
갑자기,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질주하는 말들 사이에 쓰러진 에밀리
빅토리아풍의 우아한 드레스는 
경마장 바닥에 피를 묻힌 채 누워 있고
군중은 그녀를 보러 우루루 몰려갔지 

모던 걸, 
급진적이어서 돌을 맞거나 
추방당하곤 했지

―『다정한 사물들』 46-49
 
영국의 급진적 서프러제트였던 에밀리 데이비슨과 한국의 선구적인 화가인 나혜석을 비롯한 ‘모던 걸’들은 당시의 사회 문화적 지형에서 지나칠 정도로 도드라져 보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온몸으로 체현시킨 ‘모던 걸’의 정신을 현대의 키세스 시위대가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당의 강성 여성 지지자들을 ‘개딸들’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개혁의 딸들’을 줄인 말이라는데, 나는 그 용어가 신문 지상에 떠오를 때마다 불편하다. ‘개딸’이란 어휘 속에는 인간의 격이 아닌 동물의 차원으로 비하하려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지 때문이다. 사사건건 시끄럽게 왕왕거리는 개처럼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간주하려는 무의식이 투영된 어휘 같다. 즉, 개혁을 지지하면서 정치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에 대해 보수적인 언론 집단에서 폄하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는 듯하다.

언어로서 명명하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현장이다. 젊은 여성들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상한 대통령을 체포하고 탄핵을 시키려 차가운 거리에서 온몸으로 투쟁할 때, 그를 엄호하겠다고 한남동에 나타난 여당 국회의원 가운데 흰 파카를 두껍게 껴입은 여성 정치인과 많은 대비가 된다. 왜 우리에게 합리적인 보수 집단은 숨게 되고 왜곡된 보수의 이미지만 크게 부각되는지 모르겠다. 태극기 부대를 부추기는 전광훈 목사의 신도 중에서 흰 모자를 쓴 그 무시무시한 백골단을 국회에 소개한 여성 정치인은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성이 난 대중들은 그녀가 국회에서 조는 모습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시위하는 키세스 시위대의 소녀들과 국회 안에서 권력을 좇는 여성 정치인 가운데 누가 승리할까? 이 와중에 국론을 분열시키며, 교묘하게 양비론을 펼치면서 대중을 선동하는 유명 인사들의 가벼운 처신도 혼란을 가중시킨다. 하루빨리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완결지어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윤석열 역시 본인의 비겁한 행동을 깊이 성찰하고 한국의 법적 질서를 수호하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모던 걸,
포스트모던 걸의 도래를 기다리는 모던 걸,
소녀들은 죽지 않는 천사처럼
지붕 위의 첨탑으로 날아오른다.

(다정한 사물들』 48)

 

모던 걸들의 새롭고 혁신적인 가치는 새로운 세대인 포스트모던 걸들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차가운 겨울, 아스팔트 위에서 눈사람처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키세스 시위대의 숭고한 열정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글·김혜영
1997년 <현대시>로 등단해 시집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 등을 냈으며,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 『아나키스트의 애인』, 『영미시의 매혹』 등을 출간했다. 제8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1) 김혜영. 『다정한 사물들』. 서울: 여우난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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