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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전설을 찾아
부르고뉴, 전설을 찾아
  • 백은주 | 와인 교육가
  • 승인 2025.03.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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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 꽁띠의 빨간 철문 'RC'라는 문양이 인상적이다
로마네 꽁띠의 빨간 철문 'RC'라는 문양이 인상적이다

부르고뉴 드리밍

중국인 M은 20살이 되던 해인 2007년 부르고뉴에 도착했다. 와인에 대한 열정 하나로 부르고뉴에 정착한 그는 와인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디종 대학에서 포도 재배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19년 마침내 평생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뫼르소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약 3,000병,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며 성공 가도를 달린다. 현재 그는 고가 와인을 생산하는 라이징 스타로 자리 잡았다. 그의 와인은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며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지 고작 6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외국인이다. 이런 드라마틱한 성공담이 가능한 건 부르고뉴라는 무대가 있기에 가능하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대표적인 와인 산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꼬뜨 도르(Côte d'Or)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손꼽힌다. 꼬뜨 도르는 '황금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이름은 수확이 끝난 포도밭이 마치 황금처럼 빛난다는 데서 유래했다. 부르고뉴 와인의 정수로 불리는 이곳은 역사, 지리, 기후, 그리고 독특한 테루아(Terroir)가 어우러져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그 독특한 품질과 섬세한 맛으로 유명하다. 

 

부르고뉴에서 맞닥뜨린 표지판
부르고뉴에서 맞닥뜨린 표지판

앞서 언급한 꼬뜨 도르는 북쪽의 꼬뜨 드 뉘(Côte de Nuits)와 남쪽의 꼬뜨 드 본(Côte de Beaune)으로 나뉜다. 이곳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해마다 급격히 상승하는 와인 가격이다. 그래서 ‘오늘 마신 부르고뉴 와인이 가장 저렴한 와인’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르고뉴 테크'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로 부르고뉴 와인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 속에서 젊은 와인 메이커들이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일도 생겨났다. 가까운 보르도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한때 세계적인 와인의 중심지였던 보르도는 최근 주춤하고 있다. 반면 부르고뉴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국제적인 와인 경매를 보더라도 가격이나 거래량 모두 보르도를 앞지르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탈리아에서는 부르고뉴를 벤치마킹하려는 와인메이커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경험은 와인 강의 때마다 가고 싶은 와인 산지를 물어보곤 한다. 대부분은 부르고뉴를 꼽는다.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그 자리를 보르도가 차지했었다. 이 모든 사례가 부르고뉴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부르고뉴 와인
부르고뉴 와인

피노 누아와 샤도네이의 성지

꼬뜨 드 뉘는 쥬브레 샹베르땅, 샹볼 뮈지니, 본 로마네 등 유명한 마을이 자리하는 곳이다. 주로 피노 누아 품종의 레드 와인을 생산한다. 전설적인 로마네 꽁띠(Romanée-Conti)와인도 바로 이곳에서 나온다. 꼬뜨 드 뉘 피노 누아는 붉은 과일, 꽃, 그리고 흙 내음을 지닌 복합적인 아로마를 제공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고 우아한 풍미를 발현한다. 한편 꼬뜨 드 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모두를 생산하지만, 샤도네이 품종을 사용한 화이트 와인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뫼르소, 샤샤뉴 몽라쉐, 그리고 퓔리니 몽라쉐 마을이 대표적이다. 꼬뜨 드 본 샤도네이는 신선한 과실 향과 미네랄리티, 그리고 오크 숙성을 통해 얻어지는 버터리한 질감과 향신료의 힌트가 조화를 이룬다. 꼬뜨 드 본 말고도 샤블리 마을 또한 미네랄리티가 강한 화이트 와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르고뉴 와인은 이처럼 그 품질과 명성으로 인해 언제나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와인 잔을 기울일 때마다 느껴지는 깊고 풍부한 맛은 그 지역의 풍토와 역사가 빚어낸 예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문앞에 놓인 우체통
'식료품점'이라고 쓰인 건축물

테루아의 의미

노하우가 집약된 오크통
노하우가 집약된 오크통

그렇다면 부르고뉴가 와인의 명산지로서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테루아(Terroir)를 알아야 한다. 일찍이 16세기에 부르고뉴 수도사들은 같은 포도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도 와인 맛이 달라지는 경험하게 된다. 어떤 밭은 평범한 와인이 나오는가 하면 또 어떤 밭은 맛도 훌륭하거니와 오래도록 보관할수록 맛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주목한 건 땅이었다. 유일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단어를 만든다. 땅(Terre)에서 파생된 새로운 단어 테루아(Terroir)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 장인들은 ‘대지의 자연적 본성’을 직감하고 수 세기 동안 좋은 땅과 그렇지 못한 땅을 구별했다. 실제로 16세기에는 포도를 심기 전에 흙을 맛보기도 했다. 그래서 ‘좋은 맛’을 가진 흙은 좋은 와인을 만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처럼 부르고뉴는 테루아라는 천연 재료를 양념 삼아 극강의 와인을 빚어낸다. 서로 겨우 1미터 떨어진 포도밭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땅의 목소리를 담아낸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구상 모든 인구의 DNA가 다르듯이 대체 불가한 DNA를 마치 인장처럼 찍은 포도밭이 있다는 것이다. 와인은 대지가 잉태한 생명인 것이고 테루아는 자연의 대지에서 포도라는 탯줄로 이어준 DNA와도 같은 셈이다. 그래서 부르고뉴는 개성이 뚜렷하고 맛에 따라 생산지를 특정할 수 있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와인이 역사의 숨결을 만나면

뵈프부르기뇽(부르고뉴 쇠고기찜)
뵈프부르기뇽(부르고뉴 쇠고기찜)

부르고뉴를 여행하는 분이라면 가장 먼저 당황하는 두 가지가 있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와 마을 간의 짧은 거리 때문이다. 정말 조용하고 고즈넉한 시골 풍경이 단조롭게 펼쳐진다. 포도밭 주변에는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양조장에서 풍겨오는 발효된 와인의 독특한 냄새만이 코끝을 스친다. 다른 화려한 관광지에 비해 소박하다. 하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 특히 피노 누아나 샤도네이의 열렬한 팬이라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성지순례지’라 할 수 있다. ‘부르고뉴 와인’이라는 신의 계시를 들으러 오는 거다. 그래서 부르고뉴에 왔다는 건 마치 평소 좋아하던 음악가의 연주를 유튜브로만 보다가 실제로 내 앞에서 들려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와인과 역사가 어우러진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

부르고뉴 지역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포도밭 투어와 와인 시음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현지 와인메이커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와인에 대한 지식을 배울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아름다운 자연 경관 속에서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감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부르고뉴 와인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꼭 방문해야 할 장소를 추천한다면 오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과 끌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소는 본 마을의 중심에 자리한 오스피스 드 본이다. 1443년에 설립된 이곳은 원래 자선 병원으로 시작했다.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색유리 창과 정교한 지붕이 특히 유명하다. 현재 이곳은 방문객들에게 중세 유럽의 의료 역사와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매년 11월에 열리는 세계적인 와인 경매는 전 세계의 와인 애호가들을 본으로 끌어들인다. 두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곳은 끌로 드 부조다. 12세기에 시토 수도사들에 의해 설립된 이곳은 약 50헥타르의 포도밭을 돌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중심에는 16세기에 지어진 끌로 드 부조 수도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서는 와인 제조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며, 연중 다양한 와인 시음 행사와 투어가 제공된다. 

 

프로마쥬 전문점
프로마쥬 전문점

음식이 주는 위로 

부르고뉴 관광을 이야기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어느 계절에 가는 것이 좋으냐는 것이다. 물론 부르고뉴는 계절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아름다운 여행지다. 언제 방문하든, 부르고뉴는 그 자체로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내 대답은 겨울이다. 먼저 겨울은 부르고뉴의 관광 비수기이다. 춥고 포도밭에서 포도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르고뉴의 겨울은 여행객에게 조용하면서도 풍성한 경험을 선사한다. 디종과 본의 역사적인 건물과 박물관을 한적하게 둘러보며, 겨울철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우선 겨울은 크리스마스 마켓과 겨울 축제가 열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부르고뉴를 방문하면 어디서든 축제를 경험할 수 있다. 특히 겨울 관광의 꽃은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즐기는 전통적인 프랑스 겨울 음식이다. 부르고뉴를 찾는다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을 맛보며 그 진정한 맛을 경험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시즌 레스토랑과 시장은 여행객들에게 잊지 못할 미식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뱅쇼와 겨울철 소시지를 사서 호호 불어가며 먹어보는 것도 낭만이 있다. 무엇보다 석화굴과 부르고뉴 화이트는 부르고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빠질 수 없는 미식 체험이다. 차가운 위장을 따라 내려가는 화이트와 신선한 생굴을 먹다 보면 어느덧 속이 따뜻해지고 주위가 푸근하게 느껴진다. 축제의 흥겨운 소음이 다정한 자장가처럼 관광객을 위로해 주고 다독여주는 거 같다. 레스토랑에 간다면 퐁듀 부르고뉴(Fondue Bourguignonne)를 주문해야 한다.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절기식이기 때문이다. 이 요리는 뜨거운 기름에 소고기 조각을 직접 익혀 다양한 소스와 함께 먹는 방식으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 나누기에 딱 좋다. 물론 어느 계절이나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뵈프 부르기뇽(Boeuf Bourguignon) 이나 코코뱅(Coq au Vin), 에푸아스(Epoisses) 같은 로컬 치즈 등을 맛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겨울의 부르고뉴는 휴식과 풍성한 만남의 계절이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따뜻한 만남이 어우러져 부르고뉴의 겨울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다.

 

부르고뉴 포도밭 (출처 www.bourgogne-wines.com)
부르고뉴 포도밭 (출처 www.bourgogne-wines.com)

얼마 전 트란 안 홍 감독의 영화 ‘프렌치 수프’를 인상 깊게 봤다. 특히 영화 속 등장하는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식사의 중요한 요소로 그려낸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와인은 식사의 지성을 담당한다(the intellectual side of a meal)”라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정도다. 특이한 건 부르고뉴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끌로드 부조, 퓔리니 몽라쉐, 뫼르소, 샹볼 뮈지니 등등 부르고뉴 와인을 세세하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소개해 준다. 이 영화의 소제목을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연가로 짓고 싶을 정도다. 영화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신은 물을 만들고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영화 속 대사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신은 물을 만들고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으며 부르고뉴는 인간과 와인을 만나게 해주었다.”

 

글·백은주
와인 교육가. 부르고뉴 와인 스페셜리스트. 부르고뉴 대학교에서 와인 양조를 전공하고 경희대학교에서 외식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부르고뉴의 도멘 드 라 부즈레, 루 뒤몽 그리고 샤또 몽투스 등 여러 도멘에서 포도 재배 및 양조 등 여러 경험을 쌓고 귀국하여 현재 와인 교육가 및 와인 전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부르고뉴 와인』이 있으며 역서로 『더 와인 바이블』(공역), 감수 도서로 『와인 테이스팅 노트 따라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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