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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유일하게 죽지 않는 방법이었을지도 (2)
[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가 유일하게 죽지 않는 방법이었을지도 (2)
  • 김현승(영화평론가)
  • 승인 2025.03.10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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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을 중심으로

* 저번 글과 이어집니다.

 

좁은 길과 자기-응시

웨스 앤더슨은 무한히 발산하는 영화의 구조를 통해 삶 속에 숨죽인 가능태들의 존재를 밝혀냈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에게서도 삶을 되돌아보는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의 작품에서 개인사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벨>(2006)과 <비우티풀>은 각각 아이들과 아버지에게 영화를 바치는 헌사로 마무리된다. 평론가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버드맨> 속 리건(마이클 키튼)은 인정받고 싶다는 감독 본인의 솔직한 욕망을 투영한다. 예술가, 남편, 멕시코인이라는 세 정체성을 중첩시킨 <바르도>는 노골적으로 현실의 감독을 가리킨다.

<아모레스 페로스>(2000), <21그램>(2003), <바벨>에서 느슨한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들의 교차는 명확한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그 공동체가 현재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망가진 공동체의 범위는 3부작을 거치며 한 지역에서 국가, 마지막에는 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초기작이 붕괴 직전의 세계 자체를 재현하는 것에 주력한다면, 전회 이후의 이냐리투는 비극적인 개인사와 비틀거리는 예술가의 모습에 주목한다. 감독 본인이 투영된 예술가 캐릭터는 삶을 무대에 올리며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이를 살피기 위해선 <버드맨>과 <바르도>의 인물들이 놓인 공간의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버드맨>은 젊은 시절 히어로 무비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가 재기를 꿈꾸며 브로드웨이 연극을 올리는 과정을 그린다. 연극 무대와 현실을 매끄럽게 넘나드는 롱테이크에 인물들은 두 공간의 이음새인 무대 뒤편의 좁은 통로로 이동한다. 영화는 때로 인물보다 한참 앞서 텅 빈 공간을 포착하기도 한다. 무대 장치와 전체적인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길은 연극의 허구성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모든 예술인이 관객 앞에 서기 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세트장이라는 무대와 스태프라는 관객을 가진 영화 촬영장도 마찬가지다.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2023)은 백스테이지에서 터져 나오는 진솔함을 잘 담아냈다. 배우들은 몸이 맞닿을 정도로 좁은 길 안에서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언쟁을 벌이고, 제작사 직원 미도(전여빈)는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배우의 뺨을 날린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 무대를 벗어나도 인물들은 계속해서 좁은 길 위를 이동한다는 사실이다. 극장 밖에 나온 리건은 사람들로 가득 찬 길거리와 술집 계단을 오르내린다. <바르도>는 지하철과 병원, 방송국의 복도, 심지어 집 안마저 비좁게 그려내며 실베리오(다니엘 히메네스 카초)를 협소한 공간 속에 가둔다. 백스테이지의 좁은 통로가 무대를 향하는 길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끊임없이 좁은 길 위를 걷는 인물의 삶은 무대의 연속과 같다. 그렇다면 실베리오가 무대 공포증을 앓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무대가 곧 삶이고 삶이 곧 무대라면, 재기를 꿈꾸는 배우에게 외상적 사건으로 가득한 공간은 버거울 수밖에. 침몰 직전의 예술가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포르트-다’ 놀이를 벌인다. 세상은 원래 거짓된 것이라며 연극 무대를 세우고, 자아와 삶의 간극을 벌려 자신의 과거를 한 편의 이야기로 바라본다. 클라이맥스마다 울려대는 드럼 소리에서 삶을 무대화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은 예술가의 불안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냐리투의 자기 위로는 웨스 앤더슨만큼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반복되는 자기-응시는 삶을 서사화하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뿐이다. 리건은 영화 내내 환청과 대화를 나눈다. 극이 전개됨에 따라 유령적 목소리는 리건 자신이 연기했던 버드맨, 곧 배우가 영원히 벗어던지지 못할 것만 같은 가면으로 밝혀진다. “너 완전 거지꼴이구나.” 버드맨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잠든 리건을 비웃는다. 이는 카메라가 포착한 리건의 모습이 스크린에 재현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시선처럼 느껴지지만, 환영이 또 다른 자아라는 점에서 자기-응시적이다. 버드맨의 정체가 카메라라면, 이냐리투는 주인공의 고뇌를 그리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반영적인 성찰을 거듭한다. 영화 안팎의 두 예술가는 불우한 과거를 픽션으로 포장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깟 거짓에 만족할 예술가가 얼마나 있겠는가?

 

<바르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실베리오의 삶을 무대화한다. 슬픔으로 가득한 그가 머무는 집은 연극 무대로 대치되고, 유골이 산처럼 쌓인 살풍경은 곧 영화 촬영장으로 밝혀진다. 익살스러운 트럼펫 소리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거짓 액션에 주인공은 그의 삶 속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백미러와 거울, 스크린에 의존하는 이미지들은 애초부터 거짓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가리킨다. 이후 영화는 <비우티풀>에서 시작된 유체이탈 모티브를 이어받는다. 유체이탈을 통한 자기 분열적 시선은 이번에도 예술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킨다. 혼수상태에 빠진 실베리오의 유령적 신체가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자기-응시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올바른 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언뜻 희망적으로 보이는 <버드맨>의 엔딩은 끝내 날아오른 리건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다. 실베리오는 죽음 이후에야 연극 무대의 구속을 벗어나 드넓은 대지를 마음껏 뛰어다닌다. 영화와 카메라가 삶이 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낀 예술가는 신의 시선을 선망한다.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리건은 <비우티풀>의 욱스발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를 바라보았다. 거추장스러운 인간 신체를 벗어던진 실베리오는 초인과 같은 점프 실력을 선보이며 세계를 내려다본다. <버드맨>이 우주 공간에서 쇄도하는 운석의 이미지로 막을 올리고 내린 이유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비좁은 길에 갇힌 두 작품과 달리 광활한 자연을 담은 <레버넌트>(2015)의 세계는 한없이 넓고 무한하다. 인간이 자연을 바라볼 때, 한 점 거짓 없는 신 또한 인간을 바라본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담긴 강물과 눈 덮인 산맥이 뿜어내는 웅장함, 모든 인간사를 티끌처럼 보이게 만드는 자연에서 인간은 신의 시선을 감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결코 무한한 신의 권위에 닿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지만, <레버넌트>의 모든 인물이 그러하듯 인간은 편의에 따라 절대자의 뜻을 곡해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 주겠다던 카메라의 약속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이냐리투의 자기-응시에는 삶의 굴곡에 무릎 꿇고 진실에 가닿지 못하는 처연한 인간의 상이 맺힌다.

 

친애하는 거짓말쟁이들에게

웨스 앤더슨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두 감독은 연극을 경유해서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무대에 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약간의 거짓’을 재담으로 넘길 수 있는 웨스 앤더슨과 달리, 이냐리투는 끝내 거짓말에 멈춰 섰다는 수치심을 감추지 못한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의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이창동식의 아이러니. 반복되는 ‘진실’ 키워드는 부끄러움을 넘어 한 예술가가 직면한 공포를 반영한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예술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렇게 거짓말을 일삼는 어린아이의 놀이는 끝이 난다.

하지만 거짓 놀음을 즐기는 것은 예술가만이 아니다. <판타스틱 Mr. 폭스>(2009)의 Mr. 폭스가 뒤돌아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실제와 상상적 이미지의 경계에 위치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연극 무대 뒤편의 좁은 길처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양가적인 공간이다. 심지어 웨스 앤더슨은 영화의 서두에 보란 듯이 동명의 책, 시나리오 표지를 제시한다. 육면체 무대에서 한 편의 이야기를 상연하겠다는 선언에 관객은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이 허구라는 것을 자각한다. 자신의 존재를 도도하게 드러내는 이냐리투의 카메라는 어떤가. 카메라의 존재로 밝혀진 ‘영화 상황’은 잠든 관객을 일깨운다. 쉼 없이 세계를 포착하며 강력한 몰입감을 쌓아 올린 뒤 도로 무너뜨리는 셈이다. 다큐멘터리조차 결코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는 실베리오의 절규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귀에 닿는다.

 

관객은 왜 예술의 허구성을 인지하고도 그것을 즐기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삼체>(2024)의 에피소드에서 삼체인은 인간들의 ‘빨간 망토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그들은 인간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외계생명체는 두려움을 느끼고 맹공을 퍼붓는다. 삼체인들에게 미안하지만, 예술은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거짓말을 할 뿐이다. 모든 픽션은 허구이지만, 진실과 거짓은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리고 진실의 이복형제 격인 픽션은 때론 수렁에 빠진 인간을 구원한다. 한 인간이 새겨낸 처절하고 아름다운 삶의 기록은 관객 각각의 삶이 개입할 여백을 남긴다. 부모를 여읜 아이, 유산을 경험한 부부, 별이 된 강아지를 그리워하는 소년 소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뜨거운 위로를 받는다.

이 모든 노력에도 그들의 이야기가 거짓부렁이로 느껴진다면, 이 글을 친애하는 거짓말쟁이들에게 바친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는 이 땅의 모든 가여운 이들에게.

 

사진 출처 : IMDB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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