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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은빛살구>가 인물을 존중하는 방법
[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은빛살구>가 인물을 존중하는 방법
  • 송상호(영화평론가)
  • 승인 2025.04.19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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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은빛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위태로운 존재를 끌어안기

<은빛살구>는 분명 한 여자를 따라가는 영화다. 결혼을 앞두고 청약에 당첨된 32세 청년 김정서(나애진) 말이다. 궁금증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세히 보면 <은빛살구>가 정서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은빛살구>의 카메라가 정서에게만 매달리지 않는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은빛살구>는 정서의 삶을 다룬 영화지만,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서 뇌리에 강렬히 새겨진 순간이 정서가 프레임에 담길 때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그럼 그게 과연 어떤 구간인가? 바로 정서의 아빠 김영주(안석환)와 재혼한 엄마 서주희(최정현)가 마사지볼 위에서 혼자 스트레칭을 하다가 우두커니 서서 부엌과 마당을 지그시 바라보는 장면이다.

안타깝게도 주희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정서 아버지 영주와 정서 남자친구 박경현(강봉성)은 예비 장인과 사위라는 역학관계에서 비롯되는 ‘남자’들만의 대화로 한데 엮인다. 정서와 그의 배다른 동생 김정해(김진영)는 ‘자매’라는 연결고리로 묶여 혈육의 친밀감을 서로 만끽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주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떨어지는 얄궂은 마사지볼 위에서 안간힘을 써야만 할 뿐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누가 권하지도 않았지만 주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위태로운 균형잡기에 몰두하며 애써 공허한 속내를 감춰야만 하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서의 어머니 최미영(박현숙)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영주와 이혼한 뒤 홀로 정서를 키워온 그는 극의 초반부와 종반부에만 등장한다. 만약 정서가 당첨된 아파트로 살림살이를 옮기면 미영은 혼자 남아 여생을 보내야 한다. 그런 미영이 딸에게 “너 엄마 버리고 아파트 들어갈 거잖아”라며 냉소를 머금은 일침을 날리는 모습에선 애써 괜찮다고 쓴웃음 지어보이는 어머니상이 아닌, 기댈 곳이 없어 근심에 빠져 버린 가련한 존재의 표상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그는 가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순간에도 차용증과 담보물 없이는 거래 불가라고 엄포를 놓는다. 미영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건 가족 없이 삶을 견뎌낼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의 나약한 면모를 감추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그러니 <은빛살구>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순간들은 마사지볼 외엔 발 붙일 곳 없는 주희의 모습, 겉으로는 멀쩡한 척 하지만 속내는 외롭게 메말라가는 미영의 모습이다. 이들을 곱씹어 보며 영화를 다시 되짚어 보자. 결국 <은빛 살구>는 정서로 대변되는 각박한 청년세대의 고단한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 아니라, 몸담을 곳을 찾아내야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을 끌어안는 영화인 셈이다.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은빛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들은 미래를 꿈꿀 수 있나

주희와 미영의 사연에 집중한 채 논의를 이어가 보자. 영주가 주희와 재혼한 뒤, 주희는 정해를 낳았고 영주의 집에 묶인 채로 횟집 일을 도우면서 남은 여생을 보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주희는 강원 동해시의 벌교횟집을 벗어날 수 있는가?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시간에 건강 관리랍시고 마사지볼 위에서 스트레칭을 반복하는 일뿐이다. 극 중 주희의 말마따나 평상시 바람 쐬러 나들이가는 것 조차도 이들에겐 사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미영은 어떤가. 영주와 이혼한 그는 새로운 횟집에서 일을 하고, 다른 남자와 교제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발 붙일 수 있는 단란한 집에서 하나뿐인 딸 정서와 술잔을 기울이며 하루동안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씹어대는 순간뿐이다. 정서가 독립한다고 해서, 미영도 현재 터전을 내팽개치고 정서를 따라갈 수 있을까? 정서가 배려를 해준다고 해서 미영이 겨우 정착한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희와 미영에 매달려 온 이유는 바로 이런 위태로운 존재들이 삶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즉 다른 현실로의 전이, 새로운 미래로의 전환, 꿈꾸던 공간으로의 이동이 이들에게 가능한 것일까? 내가 찾아낸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영화를 다시 살펴보자. 혹자는 <은빛살구>를 부동산, 혈연관계, 지역 연고 등 한국 특유의 사회학 요소들이 넘실대는 가족 군상극처럼 여길 수 있겠다. 그게 맞다면 이 영화는 다채로운 인간상이 빚어내는 역학 관계가 교차와 발산과 수렴을 반복하는 프리즘과도 같을 테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 영화가 열려 있는 구조가 아니라, 닫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프리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시작과 끝이 정해진 단일 경로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영화 '은빛 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은빛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때가 되면 들려오는 목소리

즉 <은빛살구>는 인물들의 미래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교두보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운명을 가늠해볼 시도조차 버거워하는 비극일 뿐이다. 우리는 영화가 선택한 형식에서 이 비극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카메라 운용을 살펴 보자. 극의 초반부에 정서가 입주할 아파트나 벌교횟집에 들어갈 때, 카메라는 절대 정서에 앞서지 않는다. 정서의 뒤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이의 뒷모습을 응시할 뿐, 정서의 시선이 가닿는 자리마다 뒤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다. 이런 카메라가 마침내 정서가 벌교횟집을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정서의 앞에서 공간을 바라보는 이의 앞모습을 담아낸다는 점을 기억하자. 인물의 뒤를 따라 그가 마주하는 공간만에 몰두해오던 관객들이 마침내 그 공간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을 어떤 공간으로 유도하거나, 이끄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저 따라가면서 인물과 가까워지는 과정을 거친 뒤 마침내 때가 되면 관객과 인물을 이어주는 데에만 몰두하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는 것. 즉 영화는 관객과 인물 사이 거리 조정을 위해 억지를 부리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영화가 플래시백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가령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정서의 어린 시절을 비춘다거나, 아빠와 엄마의 젊었을 적 이혼하기 이전 시절의 이야기는 오로지 대사나 간접적인 정보로만 전해질 뿐 관객들은 그 속속들이 묵혀둔 사정을 알 수 없지 않나.

또 영화가 인물의 세계를 함부로 재단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오프닝부터 종종 등장하는 악몽 시퀀스를 떠올려 보자. 내면의 무의식 혹은 마음 속 쌓인 화, 불안한 덩어리들이 발현되는 것일까? 정서가 그리는 웹툰의 내용에서 따온 것인지 혹은 그저 꿈인지 아니면 그의 상상인지 명확히 파악할 방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관객과 인물 사이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 장벽이 바로 인물의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후반부 화가 쌓인 정서가 직장 상사에게 소화기를 쏴댄 뒤, 남자친구의 목을 뱀파이어마냥 물어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신을 떠올린다. 그 선택 이후 정서는 어떻게 됐나. 영화는 그 이후 그의 삶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정서는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말이다. 그러니 반복하자면,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현현하는 정서의 세계를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전달하지 않고, 그저 그가 만끽할 수 있도록 오롯이 지켜주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엔딩 직전 불쑥 끼어드는 보이스 오버도 사실상 영화의 지향점을 뒷받침한다. “그날 잔디에 누워서 단잠을 자고 김치찌개에 밥 두 그릇을 비웠다. 맛있었다.” 정서가 잔디밭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은 뒤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다. 정서의 1인칭 서술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는 사실 자체만 놓고 보면 얼마간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선택이 납득이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관객들이 이제서야 비로소 김정서라는 존재의 내면과 가까워질 채비를 마쳤고, 이젠 정서도 관객들에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게 된 셈이다. 이러나 저러나 <은빛살구>는 씁쓸한 비극이다. 정서를 비롯한 인물들은 각자의 얄궂은 운명을 피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에는 위선이 배제된 순수한 온기가 가득 차 있다. 이 온기는 제법 소중하다.

영화 '은빛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은빛살구' 스틸컷.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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