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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시민의 각성, 도덕이성과 정의구현에 대한 원망
[이정옥의 문화톡톡] 시민의 각성, 도덕이성과 정의구현에 대한 원망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5.04.2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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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視民)에서 시민(市民)으로, 그 각성을 안겨준 TV드라마

 

TV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인간의 삶에 대한 메타포(metaphor). 특히 한 시대를 풍미한 웰메이드 TV 드라마는 지금-여기에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정서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반영할 뿐 아니라, 대중들이 꿈꾸는 사회 변화에 대한 원망(願望)을 담아낸다. 정서구조가 한 세대 혹은 한 시대가 공유하는 생생한 사회체험이자 실천의지라면, 원망은 정서구조가 투영된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는 대중들의 기대심리이다.

 

한국 TV 드라마는 대중들의 정서구조와 원망을 적극 담아내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사회비판적인 드라마는 한 편의 영화로 담아내기에는 거대한 플롯과 인물을 TV 드라마에 이식하여 밀도감 높은 플롯과 새로운 유형의 인물을 창안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드라마가 연출력 부족과 서사적 결함 등의 한계를 드러냈지만, 비밀의 숲(tvN, 2017.6.10.~7.30.)은 방영 당시부터 “K-드라마의 품격을 높인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극찬을 받았고, 2017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국제 TV 드라마 TOP 10’에 선정됐다.

 

가정이라는 일상적 환경에서 TV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은 소극적인 흘겨보기(glance)’에 머물게 마련이다. 이에 반해 웰메이드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적극적인 응시(gaze)’를 통해 환상적 세계로 안내하는 주인공을 따라 현실의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원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체험을 통해 시청자는 수동적인 시민(視民)에 머물지 않고, 모순적인 현실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각성된 시민(市民)’으로 거듭나게 된다.

 

비밀의 숲이 웰메이드 드라마로 손꼽혔던 핵심은, ‘비밀의 숲처럼 장막에 가려진 채 막강한 권력을 남용해 온 검찰의 실체를 최초로 폭로한 데 있다. 특히 감정이 제거된 냉혹한 검사라는 유례없는 탐정이, 검찰총장을 거쳐 민정수석에 오른 사법농단의 상징적 인물의 비리를 파헤침으로써 시민들의 적극적 응시를 사로잡았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통용되는 검찰 카르텔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표방했던 검사 윤석열은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내세우며 검찰총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불과 0.7% 포인트 차이로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끝내 국기문란과 헌정질서를 파괴한 죄목으로 탄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구속된 윤석열을 석방한 판사와 검사는 어떤 징계나 처벌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판부는 형사재판 과정에서 형사소송법의 규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윤석열에 대한 편의를 봐주고 있다.

 

이처럼 그 어느 때보다 검찰과 정치가 유착되고 민주국가의 헌정질서마저 무시되고 있는 위기상황은, ‘검찰의 자발적인 자정과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환멸적 각성을 안겨준다. 아울러 종식되지 않은 내란 정국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는 시민들은 견제되지 않은 권력은 스스로를 헤칠 뿐 아니라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는 역사적 교훈을 또다시 되새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 카르텔의 폐단을 폭로하는 TV 드라마 비밀의 숲, 하루빨리 사회정의가 바로 세워지기를 기대하는 시민들에게 검찰제도개혁과 정의구현이 실현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원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다.

 

 

2. 감정이 제거된 냉혹한 검사, 부패사회를 해부하는 도덕이성

 

독야청청’, ‘서부지검의 최고 브레인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황시목은, 땔나무를 의미하는 시목(柴木)’이란 이름이 상징하듯, 장막에 가려진 사법 카르텔의 부정의와 폐단을 투명하게 밝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뇌선엽 제거 수술로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황시목은 거대한 부패사회를 해부하는 도덕이성이 체화된 인물이다.

 

다른 한편, 한여진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선한 경찰이자 황시목의 조력자다. 용산경찰서 형사과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범인을 추적하며 범죄현장 수색작업에서 활약상을 펼치고, 황시목과 함께 검경 합동수사를 유능하게 수행하는 사유하는경찰이다.

 

황시목과 한여진이 부패한 검찰과 한국사회를 해부하기 위해 도덕이성을 실천하는 영웅이라면, 이창준은 권력의 카르텔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폭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로운 스승에 해당한다. 이창준과 황시목이 벌이는 은폐와 탐색의 플롯 역시, 부패사회를 폭로하기 위해 이창준이 은밀하게 기획한 설계도이다.

 

비밀의 숲은 범죄이야기와 탐색이야기라는 추리서사의 이중구조에 설계이야기가 겹쳐지는 중층구조를 이룬다. , 이창준이 폭로하는 검찰의 부패상을 담은 사회파드라마에 황시목과 이창준이 벌이는 탐색과 은폐의 플롯이라는 추리드라마의 외피를 입힌 것이다. 이 중층구조는 비밀의 숲처럼 장막에 가려진 부패한 검찰, 나아가 한국사회의 부패상을 시청자들에게 낱낱이 폭로하겠다는 이창준의 목적이 반영된 서사 장치이다.

 

 

3. 부패사회를 폭로하기 위한 계획된 살인사건

 

황시목과 이창준의 대결구도는 크게 박무성의 살해사건(1, 1-4), 김가영의 상해사건(2, 5-13), 영은수의 살해사건(3, 13-16)3단계로 진행된다. 탐색이야기와 범죄이야기의 이중구조에 설계이야기가 겹친 3막 전체는, 살인을 사주한 범인이 과연 이창준인가(whodunit), 만약 이창준이라면 비밀의 숲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설계한 이유는 무엇인가(whydunit), 또한 이 엄청난 설계를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실행할 수 있었는가(howdunit)에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가 중첩되어 매우 복잡한 구조를 이룬다.

 

이에 따라 매 회마다 여러 등장인물 간의 크고 작은 대결구도를 통해 불안정-안정-불안정의 법칙이 유지되어, 서두에서 황시목과 이창준의 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이창준이 거대한 비밀의 숲의 설계자일 가능성이 제시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서사적 긴장감을 유지하여 시청자의 적극적인 응시를 극대화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1) 검찰 스폰서 박무성 살해사건 : 검찰의 부패상을 폭로하기 위한 설계

 

1박무성의 살해사건살인을 사주한 범인이 과연 이창준인가를 입증하는 whodunit에 초점이 맞춰진다. 황시목은 검사들에게 접대와 뇌물, 성상납 등을 제공하는 대가로 이권을 챙겼던 검찰스폰서 박무성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이창준을 지목하지만, 이창준은 박황시목이 찌르기 전에 먼저 자기 문제를 해결해 달라던 박무성의 청탁을 근거로 역공격한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이창준이 박무성 살해사건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형사 3부장 자리를 주겠다며 회유하나, 황시목은 박무성의 성상납 관련 증거들을 들이대며 물러서지 않는다. 상명하복이 강한 검찰조직에서 수석검사와 평검사 사이의 대결은 상상할 수 없지만,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팩트에 근거하여 범죄사회를 해부하는 황시목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황시목과 이창준이 벌이는 대결은 치명적인 위험이 내재해 있다. 황시목이 승리한다 해도 내부고발자로 머물게 된다. 또한 범죄자인 동시에 법을 수호해야 할 수석검사이창준이 승리한다 해도 검사로서 자기부정을 감내해야 하고, 패배할 경우 검찰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사회적 파장을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황시목과 이창준이 벌이는 위험한 대결은 황시목의 TV 출연을 계기로 더욱 위험한 단계로 치닫게 된다. 황시목은 전 국민을 향해 박무성 살해사건은 부실수사이고, 강기사 자살사건은 검경 합동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과오라 공표하며 ‘2달 내에 진범을 잡지 않으면 검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대국민 약속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박무성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whodunit의 수사에서, ‘왜 이창준은 이 살인사건을 기획했는가를 밝히는 whydunit의 수사로 전환된다.

 

이 전환과정에서 한조그룹 회장 이윤범의 비리와 전 법무부 장관 영일재의 뇌물죄가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이윤범이 검사사위 이창준을 앞세워 막강한 부를 축적한 탐욕스러운 재벌총수라면, 영일재는 검찰 내 최강 학벌세력인 서울법대 교수이자 청렴결백한 법관으로 3년 전 ‘8억 뇌물사건에 휘말린 후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리는 인물이다.

 

황시목의 대국민 선언의 폭발력을 염려한 이윤범이 사위 이창준을 배후 조종하여 황시목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영일재와 이윤범 사이의 뇌물사건이 폭로된 것이다.

 

2) 성상납 여성 김가영 상해사건: 재벌의 비리와 법무부 장관의 뇌물수수 폭로

 

김가영의 잔혹하게 훼손된 신체 역시 이창준의 숨겨진 의도를 폭로하는 단서의 저장소로, 박무성의 죽음과 관련이 있으며 성상납의 결정적 증인임을 암시하는 위협성 경고를 함축한다. 이창준의 경고 메시지는, 자신의 결백을 표방하는 동시에 뇌물과 성상납으로 얼룩진 검찰 내 비리를 뿌리 뽑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암시한다. 이로써 황시목의 수사 방향은 검찰 내의 비리를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와 관련된 howdunit으로 전환된다.

 

이 경고의 의미를 파악한 황시목은 이창준은 과연 범인인가? 아니라면 이창준을 앞세워 연쇄적으로 살인사건과 상해사건을 벌이는 자는 누구인가, 왜 그런 일을 벌이는가에 대해 처음부터 재수사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김가영이 미성년자라는 점, 박무성이 매달 김가영에게 400~500만원을 송금한 증거, 이윤범은 검사사위 이창준의 지위를 활용하여 돈과 권력을 탐한 악의 근원이라는 영일재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윤범을 범인으로 최종 지목한다.

 

이처럼 황시목은 이창준을 의심하고, 영일재는 이윤범을 지목하고, 이창준은 서동재와 윤세형 과장, 영은수 등을 이용하여 황시목에게 반격을 가하는 등 서로서로 의심하는 에피소드가 겹치며 크고 작은 미스터리가 가중된다. 이에 따라 모든 등장인물이 거대한 비밀의 숲에서 일어나는 중대범죄와 밀접한 관련자라는 의심을 갖게 만든다.

 

다른 한편, 이창준과 황시목의 대결구도는 특별검사팀 구성을 계기로 전면전으로 전환되는데, 두 사건을 계기로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이창준이 검찰 내 비리에 대한 내사를 지시하고 특검팀을 결성한 것이다. 특검팀의 수장이 된 황시목은 한여진을 비롯한 팀원들과 함께 박무성 살인사건을 재조사하고, 이윤범의 축적과정과 재산상속에서 빚어진 각종 비리, 영일재의 뇌물사건의 진상, 서부지검 검사들의 뇌물수수와 정치인들과의 검은 거래, 용산경찰서장의 성상납 비리 등 성역 없는 수사를 벌여 한국사회의 부패상을 낱낱이 밝혀낸다.

 

이 과정에서 한조그룹 총수 이윤범의 주식조작과 분식회계의 비리가 드러나고, 이에 관한 증거를 확보한 영일재를 제거하기 위해 ‘8억 뇌물수수 혐의를 씌워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만든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다.

 

3) 영은수 살해사건 : 검찰총장이자 민정수석의 자기희생

 

3막은 이창준과 황시목이 벌인 위험한 대결구도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황시목은 한조그룹 회장 이윤범의 사주를 받은 우병준 실장과 김가영 상해사건의 범인으로 새롭게 부상한 수사부 윤세원 과장을 공범으로 지목한다.

 

결국 김가영의 증언에 따라 영은수의 살해범으로 우실장을 확정지음으로써, 영은수가 살해된 이유를 밝히는 whydunit에 초점이 맞춰진다. 영은수의 죽음은 이미 영일재가 가지고 있는 이윤범의 불법적인 재산증여과정을 입증할 파일을 빼돌리기 위한 술책이자 응징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은수의 살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윤과장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남에 따라, 이창준의 거대한 설계가 어떻게, 왜 실행했는지 전면화되면서 whydunithowdunit이 겹쳐진다.

 

유치원생 아이를 잃은 교통사고의 원인이 자동차부품회사의 부실을 눈감아 준 검사의 비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윤과장의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이용하여, 이창준은 박무성의 살해사건과 김가영의 상해사건을 사주했고 이를 통해 한조그룹 총수 이윤범의 실체를 폭로할 기획을 설계한 것이다. 황시목은 이창준의 복잡한 기획 의도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윤과장의 증언과 이윤범과 이창준 사이를 오가며 서동재가 물어다준 정보와 결정적으로 공항에서 윤과장의 수상한 동선에 관한 CCTV 등을 증거 삼아, 최종적으로 이창준을 설계자로 지목한다.

 

이로써 황시목과 이창준의 기나긴 대결의 플롯은 끝났지만, 황시목의 승리와 이창준의 패배는 곧바로 사회질서의 회복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이창준의 자살은 이창준이 치른 비극적 희생의 가치를 계승해야 할 무거운 과제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윤범이 검찰에 소환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식들은 건재할 뿐 아니라, 반성모드를 취했던 서동재 검사 역시 처세의 달인이자 비리 검사로 회귀하는 등 부패사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비밀의 숲은 황시목과 이창준이 벌이는 게임의 플롯에 머물지 않고, 부패한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도덕적 법질서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거시적인 플롯으로 확장된다.

 

4. 정치적 사유에 의한 정의구현이라는 환상

 

비밀의 숲을 조응하는 이창준과 황시목, 한여진은 시청자들의 원망(願望)을 충족시켜 주는 영웅적 인물이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시대가 만든 괴물이다. , 거대한 규모의 범죄가 짓누르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의 시대를 탈피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사유하는 저항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순응하며 사적인 이익에 함몰되어 오직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재벌총수 이윤범이나 서부지검의 검사들과 달리, 자신을 타인의 입장에서 사유함으로써 공동체에 드리워진 어둠을 제거하는 실천이성의 소유자이자 도덕적 입법자들이다.

 

특히 이창준은 권력의 카르텔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어두운 민낯을 폭로하기 위해 비밀리에 거대한 기획을 수립한 설계자이자, 자신이 세운 설계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비극적 인물이다. 재벌 사위라는 자격조건은 검사장에서 민정수석에 이르는 출세가도를 보장하지만, 이창준은 재벌에 충실한 앞잡이 정치검사로 살아가는 모순을 넘어 어둠의 시대를 극복하고 정의구현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친 비극적 영웅이다.

 

이창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세상에 폭로한 의인’, ‘부정부패를 함께 도모한 배신자라는 비난에 대비해 녹취파일과 증거물을 남기고 떠난 비겁한 범죄자’, ‘검찰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내부고발자등으로 크게 엇갈린다. 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황시목과의 대결구도가 진행되는 내내 이창준이 보여준 씁쓸하고 공허한 표정은, 그가 부패사회를 환멸적으로 조응하는 고발자이자 어두운 시대에 저항하는 정치적 사유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사회가 해체의 단계다. -중략- 부정부패가 해악을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기본이 수십 수백 개의 목숨이다. 처음부터 칼을 뺏어야 했다. -중략-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중략-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 수많은 사람의 피. 피의 제물은 현재진행형이다. -중략- 이제 입을 벌려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장막을 치워 비밀을 드러내야 한다.

 

이 비장한 유서에는 이창준의 비밀의 숲이라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건네는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다. , ‘부정부패로 인해 해체일로 있는 대한민국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시대정신, ‘부정부패가 해악을 넘어 사회 전체가 수많은 사람의 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절박한 역사의식, ‘파괴된 시스템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함께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정의구현을 실현해야 한다는 공동체의식을 엄중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창준이 참회한 바대로 법조인들은 정권마다 던져주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말 몇 마디로 수천억 원을 빨아들이는 재벌과 정치권의 부정을 비호해주며 부정부패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국제투명성기구가 한국사회의 부패 및 불신의 원인으로 사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사법부의 뇌물수수를 지적했던 것처럼, 법과 원칙을 온전하게 지키려는 검찰의 자정능력은 이미 상실된 지 오래다.

 

우리가 목도한 바대로 뿌리 깊은 사법농단과 검찰비리는 결코 단시간에 척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황시목은 검찰조직의 부패와 비리를 파헤칠 수 있는 최적임자이다. 또한 이창준이 황시목을 끌어들여 입을 벌려 검찰의 부패를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기기 위해 목숨을 건 위험한 게임을 벌였고, 마침내 비밀에 가려진 검찰의 장막을 거둬내는 데 성공했던 근원은 바로 그가 지닌 도덕이성의 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부패와 비리로 오염되어 대다수 보통사람들이 안전할 거라 믿는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도덕이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황시목 검사 역시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요청한 괴물이자, 어두운 시대의 법에 저항하는 정치적 사유자이다.

 

우리 검찰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은 사정기관으로서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부와 권력에 맞춰서 적용했습니다. -중략- 헌법이 있는 한 우리는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검찰, 더 이상 부정한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다시 한 번 싸우겠습니다. 기소권을 더 적확한 곳에만 쓰겠습니다. 검찰의 진정한 임명권자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헌신하겠습니다. -중략- 더욱 공정할 것이며 더욱 정직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이런 괴물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 검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는 황시목이 이창준의 사후에 특별기획-이창준 게이트가 드러낸 정경유착의 현실이라는 TV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검찰의 과오와 비리를 인정하고 국민을 향해 사과한 내용이다. ‘과오에 대한 솔직한 인정, 진심 어린 사과, 약속의 엄중한 이행은 지금-여기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국민 대다수가 부패사회를 만든 권력자들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 하는 희망의 언설이다.

 

절망적인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은 비록 드라마 상에서나마 죽음을 감수하며 정경유착과 검찰비리를 폭로한 이창준, 검찰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통해 국민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황시목과 같은 환상적 인물에 공감하게 된다. 환상은 현실에서 부재하고 억압당한 경험을 들춰내 현실에서 통용되는 속박으로부터 야기된 결핍을 보상해준다는 점을 환기하면, 이창준이나 황시목이라는 시대가 만든 괴물들이 조응하는 환상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어두운 시대에서 정의구현이 어렵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체득한 시청자들에게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수 있다는 일말의 위안과 희망을 안겨준다.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나 이창준과 황시목과 같은 영웅적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되면, 진정한 사법개혁도 정경유착의 고리도 끊어내기 어려운 비밀의 숲은 여전히 건재하다. 황시목과 한여진은 되니까 하는 거다. 눈감아주고 침묵하니까 부정을 저지르는 거다. 누구 하나 제대로 눈 부릅뜨고 짖어대면 바꿀 수 있다고 외치며 어두운 시대를 함께 헤쳐 나가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자고 요청한다.

 

비밀의 숲이 안겨준 여운은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하여 정의로운 국가로 바로 세우기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질문으로 전환된다. 비록 어두운 현실로 돌아오면 환상이 희미하게 점멸할지라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역사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이창준과 같은 괴물이 앞장서서 손을 들어 가리키며 장막을 치워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황시목과 한여진 등이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며 입을 벌려 말한다면, 또한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난다면, 언젠가 이런 환상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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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검찰연구모임 리셋, 검사의 탄생: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필요한 검찰 공부, 월북, 2024.

레이먼드 윌리엄스, 이념과 문학, 이일환 역, 문학과지성사, 1988.

박노현, 드라마 시학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9.

이정옥, 부패사회를 해부하는 도덕이성과 정치적 사유에 의한 정의구현이라는 환상 TV 드라마 비밀의 숲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243, 2018. 8.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

※ 사진 출처 : 네이버
 
 
 
글·이정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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