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는 지적 균열의 궤도(軌道)에 아름다운 동행 요청

2008년 10월, 한국의 지성계에 조용하지만 뚜렷한 균열이 일어났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정치권력이 사기와 협잡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던 무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르디플로)의 창간은 ‘진실을, 오로지 진실을!’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다르게 사유하는 법’을 제안했고, 그 이후 17년 동안 <르디플로>는 비판 정신이 충만한 사유의 지도를 그려 왔다. 오렌지를 ‘어린쥐’라고 발음해야 한다며 국민들의 언어와 정신을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개조하려던 정치권력의 어설픈 ‘미국 놀이’에 유력 언론들이 박수를 보내던 시절, <르디플로>는 길 들여지길 거부하는 날카로운 논조로 그 허위의 껍질을 벗겨냈다.
일제 침략 이후 일본의 식민지 유산, 해방 이후 미국적 사유와 독재 시절의 순치를 강요당한 우리 사회에 등장한 <르디플로>는 한국 지성계를 세계 지성계의 흐름에 흠뻑 적시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2025년 5월, 마침내 200호라는 이정표 앞에 섰다. 200호는 통권 번호가 아니라 우리가 달려온 지적 균열의 궤도인 셈이다. 강대국들의 대리 전장터인 우크라이나부터 프랑코의 유령이 떠도는 스페인거리, 트위터가 촉발한 이집트 혁명의 광장, 평양의 잿빛 아침, 화려한 시애틀과 도쿄의 노동시장, 테헤란의 담벼락 낙서, 디트로이트의 폐허 위에 남은 꿈까지, <르디플로>는 기사 행간에 세계를 담았고, 그 세계 속 인간의 얼굴을 기록해왔다.
중산층의 붕괴에서부터 기본소득 논쟁, LGBT와 페미니즘의 진단, 북핵 문제와 동아시아 지정학, 시리아와 리비아, 팔레스타인의 고통,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계급, 계층, 세대 갈등이라는 내면적 진단, 거대한 권력과 자본에 맞선 문화 예술계의 꿈틀대는 작가정신까지 <르디플로>는 언제나 타자의 목소리, 덜 말해진 진실의 언어를 끌어 올렸다.
200호, 진보의 가치를 논하다
200호를 맞는 2025년 5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한국어판은 오늘의 세계를 압도하는 침묵과 위선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번 호의 커버 스토리는 묻는다. “진보 없는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득권의 욕망에 의해 비틀린 자유, 그치지 않는 탐욕스러운 전쟁, 그리고 ‘테크’ 엘리트들이 장악한 ‘검열 인터내셔널’의 확장. 이 모든 광경 앞에서, <르디플로>는 끊임없이 제기해온 질문을 다시 던진다. 진보란 무엇인가?
커버스토리 ‘진보의 언어로 민주주의를 말하라’는 오늘날 이기심과 극우로 치닫는 질서의 혼란과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탄생했던 서구는 이제 ‘검열 인터내셔널’로 전락했고, 자유의 상징이던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무기로 변질됐다. 뉴욕의 광장과 서울의 거리에서 터져 나온 분노는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실종된 진보적 가치를 소환하려는 공통된 몸짓이었다.
트럼프가 유린한 미국 민주주의, 윤석열이 허물어뜨린 한국 민주주의의 암담한 현실 앞에서 <르디플로>는 단호히 묻는다.
“민주주의가 진보를 배제할 때, 그것은 과연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검열자들의 시대
프랑스판 발행인 브누아 브레빌의 「민주주의를 해치는 ‘검열자들의 인터내셔널’」은 지금 세계를 뒤덮고 있는 소리 없는 탄압을 드러낸다. 표현의 자유를 기치로 내세웠던 서구는 이제, 불편한 진실에 눈과 귀를 닫고,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인터내셔널’은 더 이상 해방의 지구촌적 연대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야합한 검열의 연대다.
<르디플로>는 이에 “지적 균열의 궤도에 아름다운 동행을 요청”하며, “진정한 저항은 끊임없는 사유와 질문에서 비롯된다”고 선언한다.
전쟁, 그리고 탐욕의 재무장
5월호는 특별히 군산복합체와 권력이 끊임없이 ‘전쟁을 조장하는 재무장의 유혹’을 특집(Dossier)으로 조명한다.엘렌 리샤르, 세바스티앵 고베르, 안세실 로베르, 제프리 삭스 등 <르디플로>의 주요 필진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과장되고,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가 전쟁 속에 질식하며, EU는 미국 없이도 독자적 방위를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제프리 삭스는 미-러 간 '평화의 지정학'을 꿈꾸지만, 현실은 오히려 끝없는 군비경쟁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테크’ 엘리트들의 오만과 사회주의의 소환
필립 S. 골럽은 「중국몽(中國夢)에 쫓기는 미국 소프트파워」를 통해 무너진 미국의 권위주의적 내면을 분석한다. 에브게니 모로조프는 다소 철학적인 관점의 글인 「헤겔을 벤처캐피털로 읽는 테크 엘리트들」에서, 기술 낙관주의 뒤에 숨은 권력욕을 해부한다. 6월초 대선을 앞두고, 우파적 정책을 경쟁하다시피 내놓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 목수정은 「민주당이 오른쪽 날개라면, 왼쪽엔 누가 서는가」를 통해, 실종된 좌파의 복원을 외친다.
<르디플로>가 소환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미 80여 년 전에 쓴 「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글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경고하고,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오늘,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도 그 빈자리를 명료히 의식하는 목소리가 나타난다. 이재명의 말처럼 “민주당이 오른 쪽이라면”, 그 왼쪽의 공백은 과연 누가 채울 것인가. 시장 논리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체제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지금 진보주의가 되찾아야 할 가치라고 목수정은 강조한다.
미국 전역에서 불평등과 기후위기, 그리고 인종차별에 맞서 외치는 이들의 구호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박하게 고발하는 현실에서 한국어판의 성일권 발행인은 아인슈타인의 글에 덧붙여, 「왜 지금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며 좌파 부재의 미국 정치를 진단한다.
지구촌을 가르는 균열
로맹 미귀스는 「페루 찬카이 항에서 전략거점을 노리는 중국」을 통해 경제 지형의 판도가 어떻게 은밀하게, 그러나 급격히 이동하고 있는지 짚어낸다. 클라라 메네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에서 이중 플레이하는 아일랜드」를 통해 작은 국가의 외교술에 숨은 이면을 드러낸다.
라후아리 아디는 「알제리 군부가 '히라크'를 질식시키다」를 통해, 민주화 열망이 군부 권력에 의해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기록한다.
팬데믹 이후 세계의 순응과 침묵
테오 불라키아 외 3인의 연구자는 「팬데믹 봉쇄, 순응에서 침묵까지」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생겨난 통제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대규모 봉쇄는 과연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방역 실패를 넘어, 시민의 자유와 공공성의 재구성을 촉구하는 메시지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으로, 요한 샤푸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착각」을 통해, 좌파를 몰아내기 위해 나치와 협력했던 역사의 비극을 경고한다. 안 주르댕은 「카톨릭 사립학교」를 통해 ‘그들만의 울타리’가 되어버린 프랑스 교육계의 폐쇄성을 고발하고, 프랑수아 베고도는 「상처를 주는 진실」에서, 진심을 가장한 상업적 커뮤니케이션의 위선을 파헤친다. 모리스 르무안은 「칠판 위의 분필은 아직도 인종차별적이다」를 통해 교육 현장의 뿌리 깊은 편견을 고발한다.
문화, 침묵을 넘어 다시 노래하다
이승희는 「오손 웰즈의 영화 <맥베스>가 보여주는 한국 정치의 이면」에서, 고전 비극의 어둠을 오늘의 한국 정치에 투영한다. 권력에의 욕망, 파멸을 부르는 탐욕, 그리고 자멸하는 통치자들... 웰즈의 카메라는 단순한 연극 무대가 아니라, 권력의 본질적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그 비극의 무대가 한국 사회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이승희는 통찰한다.
이지혜의 「말하지 않도록 길들여진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침묵을 탐구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익히게 되는 자기검열, 일상의 언어와 사유가 거세된 사회. “말하지 않도록” 학습된 우리는, 과연 어떤 민주주의를 꿈꿀 수 있을까. 진보의 언어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일상에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 강은영과 강혜영이 연재하는 「샹송이야기(2) - 체리의 계절에 다시 만난 세계」는 무거운 사유 속에 한줄기 숨을 틔운다. 프랑스 샹송에 흐르는 낭만과 저항, 그리고 기억의 힘. 체리의 계절을 노래하는 그 순간, 우리는 잊었던 세계를 다시 만난다. 노래는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견디는 자들의 부드러운 저항이다.
5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다시한번 강조한다.
진보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진보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침묵의 질서를 깨고,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진보 없는 민주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200호 발행을 앞두고,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분칠하는 파시즘의 광기 앞에서 <르디플로>는 다시금 창간 모토를 되새겨본다. ‘진실이라는 무엇인가? 그 답을 위해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사유해야할 것인가?’ <르디플로> 지적 균열 궤도(軌道)가 올해에도, 내년에도, 저 멀리 10년, 20년 후에도 계속되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름다운 동행을 요청한다고 편집진은 강조한다.
글/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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