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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현의 문화톡톡] 인공지능 시대의 그림책, 공공선을 그리다
[한기현의 문화톡톡] 인공지능 시대의 그림책, 공공선을 그리다
  • 한기현(문화평론가)
  • 승인 2025.05.05 0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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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은 인류를 구원할 희망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할 기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인공지능이 지구의 기후 위기를 앞당기고 있으며,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재앙의 서막이라고 말합니다. 인공지능의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매일 희망과 절망을 반복합니다.

 

빛을 등지고 걷는 마지막 인간

바스코는 지구에 남은 마지막 인간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지구를 버리고 ‘달’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달 사람’이 되지 못하고 ‘지구 사람’으로 남겨진 그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바스코는 무의식적으로 빛을 등진 채 텅 빈 도시의 틈바구니로 걸어갈 뿐입니다.

 

새도, 나비도, 생쥐도 사라졌다.

풀과 나뭇잎은 시들어 버렸다.

꽃들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거리와 건물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모두 달로 떠났다.

 

땅속에 혈관처럼 흐르는 가스관은 지뢰처럼 폭발하고, 건물은 이곳 저곳에서 무너져 내립니다. 나무마저도 플라스틱으로 대체된 이 지구에는 더 이상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가 토미 웅게러가 보여주는 재난의 장면들은 어딘가 낯설지 않습니다. 도심 곳곳에서 발생하는 싱크홀, 무분별하고 과도한 플라스틱의 생산과 소비,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화재 그리고 꾸준한 빙하의 감소로 인한 해수면의 상승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이며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할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을 위하여 NON STOP』

『‘아무것도 아닌’을 위하여 NON STOP』(책 읽는 곰, 2022)은 작가 토미 웅게러가 2019년에 세상을 떠나고 석 달이 지난 후, 태어난 그의 마지막 유작입이다. 책의 본문, 첫 페이지에 쓰여진 헌사에는 미래를 맞이할 ‘손주’와 과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신을 그림자처럼 이끌어준 ‘형’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습니다. 짧은 헌사 속에는 과거와 미래, 빛과 그림자 그리고 고마움과 염려가 담겨있어 이 작품을 마주하는 작가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게 합니다.

Ⓒ토미 웅게러, NON STOP
Ⓒ토미 웅게러 『NON STOP』(책 읽는 곰,2022) 한국어판 표지
Ⓒ토미 웅게러, NON STOP
Ⓒ토미 웅게러 『JUSTE A TEMPS』(Diogenes Verlag AG Zurich,2019)프랑스어판 표지

이 그림책은 두 가지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문 제목인 'NON STOP'(멈추지 않고)과 프랑스어 제목인 ‘JUSTE A TEMPS!’(때 마침!)입니다. 외길 위에 주인공 바스코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의 그림자가 벽을 향해 길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림자는 붉은 벽을 타고 넘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착시처럼 붉은 벽을 갈라 뚫고 나아갈 ‘길’을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문 제목 ‘NON STOP’이 멈추지 말아야 할 움직임의 주체인 ‘바스코’를 의미한다면 프랑스어 제목은 때 마침 바스코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그림자’를 강조합니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하나이며 동시에 둘이고, 평생동안 동행하고 동반되는 ‘관계’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Juste à temps

 

ⓒ토미 웅게러, NON STOP
ⓒ토미 웅게러 『NON STOP』(책 읽는 곰,2022)

그림자는 불행과 절망뿐인 세상에서 바스코에게 때 마침(Juste à temps) 위험을 알려주는 수호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폭발의 순간에 몸을 피할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스코를 안전한 곳으로 이끕니다. 그림자가 안내한 곳에서 바스코는 자신처럼 지구에 남겨진 생명체, 외계인의 모습을 한 ‘아무것도 아닌(Nothing/Personne)’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은 사라진 아내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바스코는 얼결에 그의 편지를 받아 들고, 쓰나미와 홍수를 피해 해변으로 떠밀려, 버려진 병원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닌’의 아내와 그들의 아기 ‘포코’를 만납니다.

 

“우리 아기 포코를 데려가 줘. 부탁이야”

 

바스코는 ‘아무것도 아닌 아기’를 데려가 달라는 ‘아무것도 아닌 부탁’을 받게 됩니다. 아마도 이 ‘아무것도 아닌 부탁’을 거절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아기‘는 살아남을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바스코 자신의 생명마저 위험에 빠트리는 최악의 선택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순간 바스코의 ‘선한 선택’이 그를 ‘변화’시킵니다.

바스코에게는 그야말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땅 위에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랬던 바스코가 고개를 들어 ‘포코’의 얼굴을 바라보며 꽁꽁 얼어붙은 빙하 위를, 펄펄 끓는 용암 사이를 제목처럼 ‘멈춤 없이’ 나아갑니다.

 

ⓒ루이스 하인(Lewis Wickes Hine), 펜실베니아 광산에 고용된 석탄 깨기 작업을 하는 소년들, 1911년
ⓒ루이스 윅스 하인(Lewis Wickes Hine), 펜실베니아 광산에 고용된 석탄 깨기 작업을 하는 소년들, 1911년

먹을 바른 것처럼 검은 얼굴의 바스코는 어쩐지 다 자란 ‘성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스코의 푸른 옷차림과 빵모자, 검은 얼굴은 ‘루이스 윅스 하인(Lewis Wickes Hine)'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어린 탄광 노동자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석탄 가루를 까맣게 뒤집어쓴 검은 얼굴의 소년들은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이지만 성인의 절반 값도 안 되는 저렴한 임금을 받으며, 작은 몸집을 접어 더 좁은 탄광로에 들어가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석탄을 캐고, 깨어 부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이민자나 가난한 저층민의 아이들이었고, 아동 노동은 탄광뿐만 아니라 방직 공장과 통조림 공장, 농장과 시장, 바로 집 앞에 신문을 놓고 가는 아이들까지 가깝고 먼 곳에서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아이들을 학교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선생님이었던 '루이스 윅스 하인'은 아동 노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감추고, 하루는 보험 회사의 직원으로, 수리공으로 분장하여 아이들이 일하는 곳에 숨어들어 사진을 찍고,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회에 폭로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1916년, 아동 노동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910~20년 사이 미국의 아동노동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기여합니다. 당시 아이들은 ’산업혁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희생된 ’소외계층‘이었으며 ’약자‘였습니다. 사진 속, 먼지를 뒤집어 쓴 '어린 노동자들'의 잔상이 지구에 홀로 남겨진 ’소외계층', ‘바스코’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이유입니다.

 

NON STOP

달로 가고자 하는 ‘사회의 주류계층’에 합류하지 못하고 지구에 남겨진 ‘소외계층’이자 ‘약자’ 바스코의 품속에는 더욱더 약한 존재, ‘포코’가 안겨있습니다. 포코는 어린 아기이자,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외계인, ‘중첩적 약자’입니다.

그러나 바스코가 포코를 구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러한 ‘편견’은 ‘전복’됩니다.

‘아무것도 아닌(Nothing/Personne)’ 작고 여린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바스코를 무겁게 짓누르던 ‘두려움’과 ‘절망’을 ‘용기’와 ‘희망’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포코는 바스코에게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었고, 그의 전진하는 발걸음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아닌 생명’을 살리는 것을 ‘선택’한 바로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지구에 남겨진 ’패배자‘나 ’소외계층‘, ’약자‘가 아닌 ’인류를 구원할 희망‘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현재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수자'들, '특권층'이 선택한 ’달’이 아닌 이 ‘지구’에 남아 ‘소수자들’로 생존하게 됨으로써 현재의 지구가 갖게 되는 ‘인류의 가능성’이자 동시에 ‘미래’가 됩니다.

 

DON‘T HOPE COPE, 희망하지 말고 대비하라!

우리는 지난 팬데믹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며 직접 소통보다 간접 소통에 익숙해졌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각자의 ’집(계정)‘을 짓고 ’밈(meme)‘을 생성하며 누군가를 팔로우(follow)하여 ’따라가기도 하고,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어 대세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직접적 관계’의 불편함보다 ‘간접적 관계’의 편리함을 추구하며 많은 것들을 ‘대면 관계’에서 ‘비대면 관계’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스마트폰에서 보여지는 화면, 시각에 의존하는 성향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손안에 있는 스마트 폰으로 손쉽게 비대면으로 정치하고, 비대면으로 문화를 소비하며, 비대면으로 장을 보고, 비대면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학습합니다. 직접경험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에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은 그야말로 위협적입니다. 한 장의 이미지뿐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영상을 빠르게 제작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실처럼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비인간’ 그 사이에서 ‘생성’되는 것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스크린을 시작으로 대형 TV, 컴퓨터의 모니터, 태블릿 그리고 작은 스마트 폰까지 화면의 크기가 작아지고 개인화가 되어갈수록, 그 빛 앞에 놓인 인간 역시 점점 더 작아지고, 혼자가 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에게는 그 빛을 등질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스코’처럼 말입니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편리함 뒤에, 가리워진 이면에 무엇이 감추어져있는지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케냐에서 인공지능 모델을 훈련하는 외주 노동자의 고통의 신음 일수도, 딥페이크 영상에 울고 있는 미성년 피해자일 수도, 드론 전쟁의 사망자, 쫓겨나는 이민자, 산불에 터전을 잃은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DON‘T HOPE, COPE“는 작가 토미 웅게러의 좌우명입니다. ‘희망하지 말고 대비하라’는 말은 상황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란의 시대, 생성의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 속에 우리의 그림자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고개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글·한기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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