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송은 프랑스인의 정서를 가장 섬세하게 담아내는 노래다. 달콤한 선율과 시적인 가사로 사랑을 받아온 샹송은, 때로 불의에 맞서고 현실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담기도 한다. 지난해 본지 ‘르몽드 에스파스’에서 샹송을 소개한 강은영 가수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샹송의 도발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랑스에서 재즈를 공부한 강은영과 연극학을 전공한 강혜영이 함께하는 ‘샹송 이야기’, 그 두 번째 연재는 체리의 계절에 어울리는, 공동체 의식과 연대를 노래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2024년 대통령 탄핵 촉구 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 중의 하나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꼽을 수 있다. 탄핵이 선고되는 순간에도 안국역에서 동십자각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이 노래를 합창했다.
특별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대중가요임에도 <다시 만난 세계>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시위에서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이끌어 내는 상징적인 노래로 거듭났다.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특혜 입학 의혹에 항의하는 점거 집회에서 부르면서부터다.
2016년에는 촛불로, 2024년에는 각양각색의 응원봉으로 물든 광장에서 이 노래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는 가사와 멜로디로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여러 세대를 아울렀다. 대중가요가 광장에 모인 대중에 의해 재해석되어 색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1) 앞으로 우리는 <다시 만난 세계>를 들을 때면 자연스레 촛불 광장이나 탄핵 시위도 떠올리지 않을까.
이처럼 사랑을 노래하는 대중가요가 어떤 시대적 사건과 결부되어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된 대표적인 경우로 샹송 <체리의 계절(Le Temps des cerises)>이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녹음된 노래들 중 하나로 이브 몽탕을 비롯해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체리의 계절>은 짧은 봄 동안의 사랑과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 이별의 추억 등을 담고 있는 사랑 노래다.
체리가 익을 무렵이면 하지만 너무 짧아요, 체리의 계절은 체리의 계절이 오더라도 난 언제까지나 체리의 계절을 사랑할 거예요 |
Quand nous en serons au temps des cerises, Mais il est bien court, le temps des cerises, Quand vous en serez au temps des cerises, J’aimerai toujours le temps des cerises, (<체리의 계절>) |
사랑의 상처와 아픔에도 사랑했던 시간을 기억하겠다는 가사와 잔잔하고 부드러운 멜로디가 <체리의 계절>만의 아름답고 애틋한 감성을 자아낸다. 1866년 발표된 이 노래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감지하기 어렵지만, <체리의 계절>은 세계 최초로 노동자 계급이 주도한 혁명적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의 찬가로 자리매김한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첫 번째 대통령이자 마지막 황제로, 집권 연장을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조카라는 후광을 입고 정치계의 변방에서 갑자기 몇 달 만에 중심으로 부상하여, 1848년 제2공화정 수립 당시 주도권을 쥐고 있던 공화파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내연녀 해리엇 하워드의 역할이 컸다. 과거 매춘부였던 그녀와의 관계는 나폴레옹 3세에게 도덕적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제2공화정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는 집권 연장을 위해 결국 자신의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쿠데타를 단행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군대를 동원해 의사당을 점령하고 정당 지도자들을 체포, 감금하면서 그들이 국가 변란을 꾀했다는 이유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그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독재의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했고, 불과 1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정을 선포해 황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며 그의 권력 장악을 도왔던 내연녀 해리엇 하워드 외에도, 또 한 명의 여자가 나폴레옹 3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바로 황후인 외제니였다.
‘크리놀린(crinoline:치마를 부풀게 하는 종 모양의 틀) 패션’을 유행시키며 19세기 유럽 패션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외제니는 사치로 유명했는데 국가 소유의 재산과 사적인 재산을 혼동하여 훗날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황후는 프로이센과의 갈등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이는 전쟁 발발의 원인 중 하나였다. 또한 그녀가 압박하는 바람에 나폴레옹 3세는 파리로 후퇴하지 못하고 스당 전투에서 패배해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성난 군중이 궁전을 점거하자 외제니는 영국으로 달아났다. 이어 황제 폐위와 제3공화정의 수립이 선포되고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만 급급했고, 무능한 정부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불신과 분노는 점점 커졌다. 파리 시민의 무장 봉기를 우려한 임시 정부는 정부군을 보내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배치된 대포들을 철거하고자 했다. 프로이센군을 막기 위해 시민들이 힘을 합쳐 구입하고 옮겨 놓은 대포였다. 시민들의 국민방위대가 정부군과 대치할 때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여자들이 나섰다. 바싹 다가와 총을 쏘겠느냐고 묻는 여자들을 마주한 군인들은 하나둘 총을 내렸다.(2) 발포를 다그치는 지휘관의 명령을 병사들은 거부했다. 1871년 3월 18일, 임시 정부가 떠난 파리에 코뮌이 선포되었다.
파리 코뮌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다양한 개혁을 단행했다. 평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시민들의 찬반에 따라 직을 유지하거나 잃었다. 고위 공무원들의 높은 봉급을 노동자의 평균 임금 수준으로 제한하고 기득권과 판공비를 없앴다.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장려했다.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지원했다. 제빵공의 야간작업을 폐지하고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단축했다. 아동의 노동을 금지했고 무상 교육을 실시했으며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물과 교리, 기도 등을 추방했다.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정교를 분리했다. 폐쇄된 작업장을 노동자들이 직접 맡아 운영하도록 했다. 임차인과 영세 상인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최초의 사례로 대중에게 사회 변혁에 대한 희망을 안겼다. 급진적인 정책만큼이나 놀라운 점은 고립된 도시가 지극히 평화롭고 안전했다는 것이다. 파리가 가진 자원은 매우 부족했지만 아무도 굶주리거나 거리로 내쫓기지 않았다. 범죄도 사라졌다. 경찰이 없는데도 그랬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되어 있었음에도 독일 노동자가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두 달여 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피의 일주일(la Semaine sanglante)’이라 불린 1871년 5월 21일부터 5월 28일까지 코뮌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전쟁터가 된 파리에서 여성과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학살되었다. 수만 명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진압 후에는 코뮌의 연루자로 10만여 명이 체포되어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었고 7천5백여 명이 추방당했다.

샹송 <체리의 계절>은 파리 코뮌 당시에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작사자인 장-바티스트 클레망(Jean-Baptiste Clément)이 피의 일주일 당시에 보았던 한 젊은 여성에게 노래를 헌정하면서 파리 코뮌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그 자신이 코뮌의 참가자였던 클레망은 1871년 5월 28일 코뮌의 마지막 보루였던 퐁텐-오-루아 거리의 바리케이드에서 구급대원으로 봉사했던 루이즈에게 <체리의 계절>을 바친 것이다. 지금도 파리의 퐁텐-오-루아 거리에는 “삶을 바꾸려 한 파리 민중과 총살형을 당한 3만 명의 ‘체리의 계절’을 기리며”라고 적힌 코뮌의 기념 현판이 붙어 있다.
<체리의 계절>이 파리 코뮌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의 일주일’이 있었던 5월 말의 시기가 공교롭게도 체리가 열리는 시기와 겹쳤기 때문이다. 또한 가사 중 “벌어진 상처(plaie ouverte)”나 “핏방울처럼(en gouttes de sang)” 등의 표현이 사랑의 괴로움을 묘사하는 동시에 실패한 혁명을 암시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뿐 아니라 파리 코뮌의 찬가로서 저항 정신을 드러내는 <체리의 계절>은 이후 시위대의 행진에 사용되기도 했는데 68년 혁명 당시 소르본에서 <라 마르세예즈>와 더불어 많이 불렸다고 한다.
5월의 파리 코뮌은 한국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게도 한다. 군대에 포위되어 고립된 도시 속에서도 부족한 자원으로 평화와 안전을 지켜낸 파리 코뮌의 모습은 공수 부대의 위협 속에서도 시민들이 서로 나누고 도왔던 5·18 광주의 대동 세상과 겹쳐 보인다.
클레망이 파리 코뮌의 한 시민에게 <체리의 계절>을 바쳤듯이 한국에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며 만들어진 노래가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5·18 당시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과 광주에서 들불야학 노동운동을 했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백기완의 시를 차용해 황석영이 가사를 쓰고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이 노래는 곧 전국으로 퍼져 나가 다양한 사회 운동과 집회에서 불리며 연대와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외국에도 알려져 세계 곳곳의 노동 운동 현장에서 현지어로 번안되어 불리기도 한다. 비장하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결의로 맺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2024년 탄핵 시위에서도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대표곡으로서 셀 수 없이 많이 불렸다.
중년 이상의 세대가 <다시 만난 세계>를 함께 불렀듯 젊은 세대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다. 광장에 모인 다양한 시민들 사이를 더욱 강한 연대감으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 ‘노래’였다.
5월이다. 길었던 겨울, 광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봄을 기다렸던, 아니 저마다 봄이었던 모두에게 체리의 계절이 다가왔다. 이 계절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글·강은영
프랑스에서 재즈보컬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가수로 활동 중이다.
강혜영
프랑스에서 연극학을 전공했고, 작가로 활동중이다.
(1) 나도원, <음악 그 겨울, 광장의 바람>, 황해문화, 2017, 03.
(2) 노서경, <빈곤한 여성들의 코뮌(1871): 루이즈 미셀과 앙드레 레오의 대변>, 한국서양사연구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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