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호 구매하기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존재론으로 본 공동선의 경제학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존재론으로 본 공동선의 경제학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5.05.14 0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화주의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물질과 정신의 측면으로부터 이해한다. 잘 알다시피 이는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구분되는데, 한편으로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가, 다른 한편으로 데카르트와 헤겔이 대략 각각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호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의 초점은 보통 물질에 맞춰져야 하고, 특히 마르크스에 젖줄을 대고 있는 진보 경제학자로서 나는 유물론을 주된 연구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있다. 게다가 물질을 폄훼하는 듯한 그 어떤 멘트라도 날리면, 당장 관념론자로 낙인찍히는 곳이 진보 경제학계이기도 하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나는 물질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나 경제학이 물질세계를 연구대상으로 삼지만, 경제가 단지 물질로 환원되거나 물질만으로 기계 법칙처럼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당장 가장 좁은 의미로 바라본 경제마저도 물질적 재화(goods)는 물론 용역’(service)이라고 부르는 비물질적 서비스로 구성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고, 신고전학파 주류경제학이 맹신하고 있는 시장 메커니즘제도와 같은 상부구조(!) 없이 작동할 수 없다는 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경제에 이런 비물질적 요인, 곧 제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착안한 경제학을 제도주의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문화와 상부구조를 조명하는 베블런 제도경제학

제도에는 형식 제도와 비형식 제도가 있는데, 전자에 주목한 대표적 영국 경제학자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면, 후자 곧 비형식 제도(informal institution)에 역점을 둔 미국 경제학자가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베블런은 문화를 경제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비형식적 제도로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습관, 전통, 종교, 도덕 그리고 가치관 등이 포함된다. 첫머리의 분류 방식으로 치면, ‘정신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블런은 경제학에 관념론을 도입한 대표적 경제학자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베블런은 여타 경제학자와 달리 물질에 대해 관념이 미치는 영향, 그리고 문화와 같은 비물질적 제도가 경제를 제약하거나 촉진하는 현상에 관심을 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물질을 외면했다거나 형식적 제도를 소홀히 취급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경제학자다! 단지 둘을 엄격히 분리하거나 두 영역의 상호작용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블런과 제도주의자들이 토대못지않게 상부구조를 강조했으며, 마르크스와 달리 심지어 상부구조가 토대를 결정하거나 구해내는 측면을 더 부각했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되어야 한다.

 

베블런 경제학의 전통을 잇는 샌델의 정치철학

마이클 샌델은 바로 베블런의 이 제도주의적 전통을 이은 미국의 정치철학자다. 정치철학자이니 물질보다 관념, 그리고 경제보다 제도에 초점을 두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샌델만큼 경제학을 잘 이해하며 거기에 깊이 관심을 두는 정치철학자도 드물다. 실제로 그는 대학원 시절 수리경제학 논문을 쓰기 위해 스페인 남부로 6주 방학 기간 독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강조한다. 그의 대표작 정의란 무엇인가공정하다는 착각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좋은 경제를 구상하는 책들이다. 도덕적 경제를 염원하는 비주류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정치철학자인 셈이다.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마이클 샌델, 안진환·김선욱 옮김, 2016, 와이즈베리)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마이클 샌델, 안진환·김선욱 옮김, 2016, 와이즈베리)

 

정치와 도덕을 말하다(마이클 샌델, 안진환·김선욱 옮김, 2016, 와이즈베리)는 샌델이 시민정신, 곧 베블런의 문화와 마르크스의 상부구조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여기서 시민정신은 두 가지 차원으로부터 조명되는데, 한편으로 <1부 미국의 시민생활: 자치의 길을 찾아서>는 건국 이래 미국에서 정치현장과 시민사회에서 공공생활이 변해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되짚어 본다. 다른 한편 <3부 공동체와 좋은 삶: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는 존 롤스의 두 저작인 정의론(1971)정치적 자유주의(1993)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공동선을 향하는 시민정신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그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다.

1부에서 먼저 샌델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대비한다. 가령, 공화주의는 시민적 덕성을 갖춘 시민이 공동선을 제고할 책무를 지고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를 말하며,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최고목표로 삼고, 선에 대한 독립된 개인의 자율적 선택과 관용을 존중하는 정치철학을 의미한다(28~30).

각자의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공화주의의 경우 공동체’, ‘공동선’, ‘책무’, ‘자치’, ‘시민적 덕성(시민의식)’이 되며, 자유주의자의 개인’, ‘자유’, ‘권리’, ‘선택’, ‘관용이 각 항목에 대응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신에 따라 타인에 대한 관계도 각각 다르게 설정될 것인데, 공화주의는 협력연대, 자유주의는 경쟁고립을 선호할 것이다.

 

미국의 공화주의자가 써 내려간 진보의 역사

그런 후, 샌델은 미국의 공공철학 역사에서 토머스 제퍼슨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강력했던 공화주의가 퇴조하는 반면, 1930년대 케인지언 뉴딜정책부터 자유주의가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드러내 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국 정치사에는 1933~1945년 무려 4선을 달성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1909년을 재임하면서 강력한 진보적 정책을 실시했다. 예컨대, 그는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노던 시큐리티스와 같은 철도산업의 독점 대기업을 실제로 해체했다. 물론 그가 모든 대기업에 대해 적대적이진 않았다. 그는 나쁜독점기업과 좋은독점기업을 구분해 공익을 해치는 독점기업만 규제한 것이다.

경쟁정책만 진보적이지 않았다. 1902년 미국의 석탄 광부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켰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직접 중재에 나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을 보장했는데, 이는 대통령이 노동자의 편을 들어준 첫 사례로 꼽힌다. 노동정책에서 진보적이기가 쉽지 않은데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통령으로서 당당히 노동자의 손을 들어 주며 그들과 함께 동행한 것이다!

1906년에는 식품·의약품 안전법을 제정해 소비자 보호에도 앞장섰다. 기업들이 유해 식품과 약품을 제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었는데, 이는 미국의 FDA(식품의약국,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창설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 더 추가하자. 1901~1909년 동안 5개의 국립공원, 51개의 야생 보호구역, 150개의 국유림을 지정했고, 천연자원의 남용을 방지하고 지속 가능하게 개발하도록 연방 정부가 규제하였다. 시민의 휴식공간을 마련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것이다. 환경운동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우리에게 시장주의와 기업주의를 정강으로 내세우는 보수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12년에 우드로 윌슨과 한판승부를 벌였다.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창설로 잘 알려진 우드로 윌슨은 민주당 출신이다. 선거에서 윌슨이 이겼다. 그러니 그가 진보적 정책을 내세우는 건 충분히 이해된다. 1914년 클레이튼 반독점법(Clayton Antitrust Act)을 제정해 기업의 독점을 방지하고 노동시간 단축 및 아동노동 금지 법안을 통과시켜 노동자 보호를 강화했다. 여성의 참정권도 보장했다.

그런데 그사이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출신이다. 그런데 공화당이 장사가 잘 안됐던지 그는 공화당을 탈당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는데, 그게 진보당’(Progressive Party)이다! 보수정당의 전직 대통령이 민주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정당의 후보가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독점기업의 약탈과 유한계급의 낭비가 기승을 부리던 도금시대’(Gilded Age)였다. 1880년대에 출현한 독점자본은 각종 담합을 일삼아 사회가 생산한 이윤을 독점하였다. 독점자본의 폐해가 심해지자 1890년에 이를 규제하는 셔먼 반독점법이 발효되었다. 이민자가 급속히 유입되는 과정에서 불평등은 심화되고, 정치는 부패하였다. 국가의 비호를 받아 부를 크게 축적한 대부호들은 대다수 하층민이 가난에 허덕이는 가운데 극단적인 낭비, 퇴폐와 향락을 일삼았다. 실로 황금으로 속을 가린도금의 시대(鍍金 時代)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런 폐해가 지적되고 대안들이 제시되는 건 당연지사다. 민주당 후보 우드로 윌슨은 기업합동을 해체하고 경제권력을 분산시켜 지방의 정치기관에 더 많은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고자 했다. 윌슨에 따르면 단순히 독점권력을 받아들이고 규제를 가하는 것은 일종의 조건부 항복이었다.

반면 (공화당 출신 전직 대통령이자) 진보당 후보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거대기업을 산업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부산물로 여겼고, 19세기의 탈중심적 경제를 소생시키려는 시도 역시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국가적인 수준의 경제권력과 맞서 싸울 방법은 오직 국가의 민주제도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거대기업에 대한 해결책은 거대정부였다.

그러나 그는 국민민주주의에는 중앙집권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바로 정치의 전국화였다. 정치 공동체를 전국적 규모로 재편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신국민주의”(New Nationalism)는 미국 국민들에게 참되고 영구적인 도덕적 각성”, 즉 새로운 시민의식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86~87).

유한계급들의 사치와 향락과 더불어 강도귀족들의 약탈과 불평등이 만연한 도금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사회는 세계 그 어떤 지역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진보적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미국사는 이 시기(1890년대~1920년대)진보의 시대”(Progressive Era)로 이름 붙인다. 얼마나 진보적이었냐 하면, 민주당 우드로 윌슨이 42.0%을 얻었지만 진보당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무려 27.4%를 얻었다. 공화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태프트는 23.2%에 그쳤다. 실로 진보의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샌델이 보기에 이러한 진보의 시대는 공화주의 정신이 빛을 발한 시대와 일치했다. 진보적 공화주의!

앞에서 본 것처럼, 독점기업의 출현을 목격하면서 우드로 윌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실로 서로 다른 정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양측은 정치 및 경제 제도란 자치에 필요한 도덕적 자질을 장려하거나 또는 훼손시키는 경향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고고 믿었던 점은 같았다. , “그들은 방식이 서로 다를지언정 한결같이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논하고”(38) 있었던 것이다. 진보의 시대에 두 정치적 지도자는 공화주의의 근간이자 버팀목이 되는 시민적 덕성, 좋은 시민정신을 더 높이 샀으며, 덕분에 진보의 시대는 공화주의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것이다. ‘공화주의적 시민정신으로 충만한 정치경제학의 시대였다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케인지언 리버럴 진보의 등장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이 발발하자 진보는 자유주의로 선회하였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케인지언 정부는 시민들의 덕성을 함양하여 공동선을 도모하는 대신, 재분배적 재정정책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소비결정에 대한 자유, 곧 소비자주권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재정정책과 소비자주권은 경제성장을 추동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로써 특정한 선과 시민적 덕성에 대한 선택은 소비자의 자유에 맡겨졌고, 정부는 이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재정정책이 승리하면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성장과 분배정의의 정치경제학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41) 사정이 이렇다면, ‘시민없는 정치경제학은 케인지언 경제학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새로운 (케인지언 소비자주의) 정치경제학의 출현은 공화주의 노선의 소멸과 현대 자유주의의 도래라는 결정적인 흐름을 낳았다. 현대 자유주의에 의하면, 정부는 자신의 목표를 선택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아로서의 개인을 존중하기 위해 좋은 삶이라는 개념에 대해 반드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케인스식 재정정책은 이러한 자유주의를 반영했으며, 또한 그것을 미국인의 공공생활에 깊이 심어 놓았다.”(41) 케인지언 재정정책의 승리와 함께 공화주의 노선이 소멸되고, 자유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이와 함께 공화주의적’ ‘진보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리버럴 진보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리버럴 진보에게 소비욕구는 충만하나 시민정신은 부재하다! 샌델이 미국의 역사를 통해 관찰한 공공철학과 공공정신의 현주소다.

<3부 공동체와 좋은 삶: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는 자유주의의 정치를 넘어 공화주의 정치를 복원할 방법을 강구하는 부분이다. 방법은 존 롤스의 두 책 정의론(1971)정치적 자유주의(1993)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샌델이 보기에 자신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 부르는 리버럴 진보의 정치철학은 롤스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롤스를 비판함으로써 샌델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공동체 성원이 공유하는 좋음, 공동선을 복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롤스주의적 정의론은 옳음에 치중한 나머지 좋음’()에 관한 숙의를 소홀히 취급하며, 개인의 개별성과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공동의 문화적, 도덕적 토대를 경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스에게 좋음과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존재론으로 롤스를 비판하다

공동선을 복원하기 위해 샌델이 취한 전략은 롤스의 철학적 존재론을 문제 삼는 것이다. 정의론에서 롤스는 칸트의 초월적 존재에 버금가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 선 자아를 도입한다. 칸트에 따르면, 이성적 인간은 자신에 내재한 선의지로 인해 정언명령을 욕구한다. 보편적 도덕법칙인 정언명령은 모든 선험적 전제, 자연적 인과율, 경험적 목적으로부터 독립적일 때 수립될 수 있다. 이 법칙의 보편타당성은 주체가 이처럼 모든 외부적 조건과 맥락으로부터 초월해 있기 때문에 부여된다. 다시 말해 정언명령의 정의로움은 목적과 맥락에 대한 주체의 초월적 지위때문이다.

이제 맥락 독립적옳음()은 맥락 종속적좋음()과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옳음은 보편성을 얻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옳음은 좋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칸트와 롤스의 생각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롤스에 의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다양해 누구도 합의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롤스는 이런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333)을 감안해 좋음에 대한 판단을 개인의 각자 판단에 맡기고 국가는 이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옳음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데, 정부는 이 옳음, 곧 정의론에 따라 자유와 재화를 분배하는데 주력하면 된다. 이제 옳음이나 원칙은 공적 사안으로 논의되는 반면, 좋음이나 목적은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보수주의자에게 정부가 시장에서 손을 떼야 하듯이, 롤스주의적 리버럴 진보주의자에게 정부는 좋음에 대해서도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롤스에겐 좋음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국가가 바람직한 국가다.

이런 결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이미 지적되었듯이 초월적 존재라는 독특한 자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롤스는 정의론에서 칸트의 초월론적 존재를 경험론적 규준, 원초적 입장으로 개조함으로써 칸트의 도덕과 정치를 보존”(240)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샌델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의 초월적 존재나 롤스의 원초적 자아 모두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에 다름 아니다. , 어떤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도 분리된 채, 다시 말해 공동체는 물론 공동체 구성원과 아무런 연고도 가지지 않고 순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인 것이다. 칸트의 초월적 존재와 자율적 개인, 롤스의 원초적 입장과 무연고적 자아, 그리고 주관적 좋음에 대한 객관적 옮음의 우선성, 좋음에 대한 중립적 국가, 좋음에 대한 국가의 자유방임. 그리하여 공동체 차원의 좋음, 공동선의 부재가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이 연쇄고리의 출발점은 초월적 존재와 무연고적 자아인 것이다. 샌델이 철학적 존재론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무연고적 자아는 허상이다

그러나 샌델에게 이러한 무연고적 자아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일 뿐이다. 우리는 가족과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친구와 신뢰를 나누며, 직장동료와 고락을 같이 하고, 지역공동체의 이웃과 교류하며, 각종 의무를 부담하면서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연고적 자아’(encumbered self)인 동시에, 그 속에서 서로 삶과 역사를 공유하는 서사적(narrative)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무연고적 존재를 상상할 순 있지만 우리 중 어떤 누구도 무연고적 자아로 존재하거나 살아갈 순 없다. 주체성을 지니는 자아임에 틀림없으나, 우리는 공동체 내 자아일 수밖에 없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우리는 동료시민에 대한 충직과 확신, 그리고 애착을 가지고 살아간다.

충직과 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즉 이 가족, 이 공동체, 이 국가, 이 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으로, 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충직과 확신의 도덕적 힘은 어느 정도는 이런 사실에 기인하는데,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볼 수 없다는 의미다.”(248) 충직, 확신, 애착 그리하여 공통의 서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충직은 롤스의 정의 원칙처럼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가치들과는 다르며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자발적 책무나 모든 인간에게 따르는 자연적 의무 이상의 그 무엇이다.” 더욱이 그러한 충직과 확신은 홉스와 로크가 상상했던 사회계약처럼 내가 했던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롤스의 정의가 요구하는 것, 아니 그 정의가 허용하는 것 이상의 빚과 책무를 부과한다.(248) 그리고 그러한 충직, 확신, 애착은 정의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한다, 좋음이 옳음에 선행하며, 급기야 좋음이 옳음을 지도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공동체 내 자아, 곧 연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충직, 확신, 애착이라는 좋음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전유물이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서로를 이어주며, 공동체의 공유자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공동체의 자산에 기대어 서로를 보듬어 주고, 위기와 고난에 함께 대처할 뿐 아니라, 더 나은 삶, 곧 공동선을 기획할 수 있다. 칸트적 초월적 존재와 롤스의 원초적 자아가 누릴 수 없는 이점이자 행복이다. 이게 진실이라면 국가가 좋음을 장려하고, ‘좋은삶’, 에우다이모니아지향적 경제정책을 굳이 외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연고적 자아와 반대로 연고적 자아는 좋음에 대한 국가의 중립적 태도를 거부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적극적 개입에 찬성한다!

 

무연고적 자아가 방치한 공공영역의 현장

국가가 좋음의 정책을 포기했을 때 오는 해악은 실로 크다. 그럴 경우,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대신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시민의식과 공동체, 그리고 공동의 공공생활에 대한 도덕적 전제조건을 노골적으로 거론한다. 보수주의자들이 가진 공동체에 대한 개념은 종종 편협하고 인색함에도,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이를 설득력 있게 반박할 도덕적 자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284).

이러한 우려는 롤스의 후속 저술인 정치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도 표명된다. “민주정치는 대법원 의견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도덕적 목적으로부터 초연한 상태로, 추상적이고 점잖은 공공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 도덕성과 종교 등 좋음에 관한 논의를 너무나 완벽하게 무시하는 정치는 곧 그 자체의 환멸을 초래한다. 정치 담론에서 도덕적 공명이 부족한 경우, 더 큰 의미의 공공생활에 대한 갈망은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법을 찾아낸다. 도덕적 다수파와 같은 단체들은 무방비의 공공광장을 편협하고 옹색한 도덕주의로 표현하려고 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발을 들여놓기 두려워하는 영역에 뛰어든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조, 곧 도덕을 배제하고 정치로 제한된 공적 이성의 이상이 우리의 공공생활을 도덕적 진공상태로 방치함으로써, 보수주의의 편협하고 옹색한 도덕주의로 점령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공공 문제의 도덕적 차원을 다루는 정치적 아젠다가 부족한 상황에서 대중의 관심은 공직자들의 개인적인 비리에 집중한다. “공공 담론은 점점 더 타블로이드와 토크쇼, 결국엔 주류 언론까지 합세하여 공급해 주는 스캔들과 물의, 고백에 사로잡히게 된다.” 리버럴 진보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공공생활이 이러한 경향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말하는 공적 이성의 미래상은 너무 인색하여 생명력 넘치는 민주생활의 도덕적 에너지를 담아낼 수가 없다. 그 결과 편협하고 천박하고 잘못 길을 든 도덕주의에 길을 열어주는 도덕적 진공상태가 형성된다.”(351~352) 여기에 공동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저 냉소, 비아냥, 비난, 그리하여 자조와 환멸이 그 공백을 메워줄 뿐이다. 이 역시 칸트의 초월적 자아, 롤스의 원초적 자아, 그리하여 공동체와 유리된 무연고적 자아와 자유주의적 자아, 궁극적으로 현재 미국의 리버럴 진보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샌델의 생각으론 리버럴 진보가 도널드 트럼프와 마가(MAGA)주의적도덕(!)을 키웠다고 하면 좀 지나칠지 모르나,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적어도 그 질병을 방치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질병이 깊어가는 와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우드로 윌슨이 주도했던 진보적 공화주의는 급속히 퇴조하고 있다. 경제학에 조예가 깊은 정치철학자 샌델의 눈에는 토대중심적 케인지언 소비자주의 경제경책의 책임도 작지 않다.

 

MAGA(Make Again Great America)!
MAGA(Make Again Great America)!

 

한국 진보의 메말라가는 시민정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수야 원래 그렇다고 하지만 자칭 진보마저 공동체 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고, 이재명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등장하면서 그러한 추세가 급격히 강화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칸트의 초월적 존재도, 롤스의 원초적 자아도, 그리하여 무연고적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연고적 자아이자 반만년 역사를 공유하는 서사적 자아인데도 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자유와 권리 못지않게 동료시민의 고난에 눈을 돌리면서 공동선에 기여하고자 분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진보집권경제학』(한성안, 2020, 생각의 길, p.440)
『진보집권경제학』(한성안, 2020, 생각의 길, p.440)

자본과 노동의 양극화는 물론 노동시장이 분단된 현실, ‘3분의 2 사회에서 존재론을 다시 곱씹어 보자. 우리는 초월적 존재나 원초적 자아, 무연고적 존재가 아니다. 호모사피엔스는 공동체 내 존재며 연고적이고 서사적 자아일 수밖에 밖에 없다. 이를 우리는 종종 사회적 존재라고 일컫는다. 나는 이런 존재론에 서 있는 마이클 샌델의 시민정신의 정치경제학을 매우 지지한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