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평론 36호』(2024)에 실린 「왜 ‘지금’ 오컬트인가? -전승된 기억, 그리고 가족을 중심으로」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정 및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 이 글은 1편과 2편으로 나누어 5월 26일(월)과 6월 23일(월)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신작 <에딩턴>이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기대와 달리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팬데믹이라는 비교적 가깝고도 구체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삼아 공동체의 분열에 대해서 다루는 이 영화는(1), 그가 장편 데뷔작 <유전>에서부터 줄곧 다뤄왔던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의 집단적 광기의 이면을 다루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전작들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관객이라면,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가 개봉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다. 판단은 영화를 보고 난 뒤로 미뤄도 될 것이다. 곧 개봉할 영화를 기다리면서, 감독이 이전의 작품을 통해서 공동체의 분열에 대해서 다뤄온 방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유전>, ‘가족’의 구조적 모순에 대하여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은 그 제목에서부터 암시하듯 세대 간에 대물림되는 유전병으로 인해 한 가족이 무너져 내리는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공포를 자아내는 지점에 있다. 영화에서 주된 공포는 가족의 무너짐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이라는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찾은 모임에서 애니(토니 콜렛 분)는 가족 안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부채감에 대하여 토로한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따라서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 되어 버리는 집단에 다름 아니다. 이윽고 딸까지 잃게 된 애니는 사고를 낸 아들에게 분노를 퍼붓지만, 아들은 되려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애니의 잘못이 없지는 않은데, 몽유병을 앓고 있는 그녀가 과거에 딸과 아들을 불태워 죽이려 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전>에서 가족은 서로의 고통에 대한 원인이자 결과다. 이들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죄책감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야말로 관객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아닐까?

이는 재난 영화에서 흔히 가족이 함께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실체로 기능하는 것과 완벽하게 대조적인 지점이다. <유전>에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바로 가족으로, 외부의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라 바로 그 내부가 모든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라는 점은 우리가 설 곳을 잃게 만든다. 내부는 사실 외부나 다름없고, 외부는 당연히 내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유전병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에 두 자녀를 갖게 된 애니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운명을 이어가듯 말이다. 여기서 무력과 공포는 한데 뒤섞이고, 긴장감은 극에 치닫는다. 결국 애니의 가족은 서로에 의해 죽임당한다. 오빠는 여동생을 죽이고, 아내는 남편을 죽인다. 엄마는 겁에 질린 아들을 쫓고, 아들은 할머니의 바람대로 이단 종교의 숙주가 된다.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의 중심에 파이몬 교라는 이단 종교를 향한 맹신이 자리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진짜 가족을 뛰어넘는 것으로써 이단 종교의 유사 가족적 정체성에 대한 감독의 관심은 다음 작품에서 전면화되어 드러난다.
<미드소마>, ‘함께(共)-하나의(同)-몸(體)’을 공유하려는 공동체의 광기

<미드소마>는 스웨덴의 한 마을 공동체의 하지 축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도 내부는 사실 외부였음이, 외부는 내부일 수 없음이 드러난다. 영화에서 가족은 부재하고─정확하게는, 시작과 동시에 사라지거나(동생의 자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무심한 애인)─,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가족의 이름을 내세우는 유사 가족으로서의 마을 공동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 가족의 중심에서 그것을 이루는 핵심은 바로 뒤틀린, 그리고 과잉된 신념에 다름 아니다.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얼굴을 한 마을 사람들은 지나친 친절과 환대로 대니(플로렌스 퓨 분)와 그 일행을 맞이한다. 가족을 잃은 대니를 향한 환영은 특히 노골적인데, 마을 공동체 일원인 펠레(빌헬름 브롬그렌 분)는 남자 친구를 대신해 그녀의 생일을 챙겨주는가 하면 마을 장로는 그녀에게 유별나게 친절하게 군다. 펠레는 가족의 부재라는 공감대를 내세우며 그녀에게 다가가고, 누구에게나 가족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가족이 되어준 마을 공동체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그의 권유에 따라 경연에 참여한 대니는 결국 5월의 여왕이 되고, 펠레는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영화가 공포를 자아내는 지점은 바로 마을 공동체의 집단적 광기가 드러나는 장면을 통해서이다. 친절과 환대로 포장된 얼굴 이면에 자리한 광기와 폭력은 영화를 ‘목가적인 공포 영화’(2)라는 모순의 극단에 위치시킨다. 사실 대니 일행은 유사 가족을 이어가려는 마을의 필요에 따라 초대된 것으로, 그들은 대를 잇기 위해서, 무엇보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 초대된 것이다. 또한, 오랜 애인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분노를, 가장 사적이어야 할 성관계 현장의 신음을, 심지어 불에 타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조차 함께 하려 하는 모습에서 관객은 이들의 ‘공동’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을 마주하게 된다. 즉, 이들이 내세우는 ‘공동체(共同體)’의 실체를, 문자 그대로 ‘함께(共)-하나의(同)-몸(體)’을 공유하려 하는 비정상적인 열망을 목격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모든 사건의 원인에 바로 그들이 있다는 사실은 기괴함과 공포감을 가중한다. 이는 곧 가족에게도 적용되는바,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면서도 그로 인한 슬픔을 함께 나눠 갖는 가족이라는 구조에 내재한 본질을, 그 역설과 모순을 전면에 가시화함으로써 영화는 오컬트적 공포를 자아내기에 성공한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1)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Brian Tallerico, “[Reviews] Eddington”, rogerebert.com, 2025년 5월 17일, https://www.rogerebert.com/reviews/eddington-movie-review-2025.
(2) 장영엽, 「<미드소마> 백주의 공포극으로 귀환하다, 아리 애스터」, 『씨네21』, 2019년 7월 18일,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459.
글‧김윤진
시각예술 및 대중문화에 대하여 글을 쓴다. 2024년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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