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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배우 김민선은 우리들의 대역
  • 정정훈 |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 승인 2009.09.03 17:05
  •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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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양의 우화’ 연상시키는 강자들의 일벌백계 논리
사적 이해를 공적 정의로 확인받는 ‘소송사회’의 자화상

어린 양 한 마리가 시냇물에 목을 축이고 있었다. 갑자기 허기진 늑대가 나타나서 묻는다. “누가 건방지게 내가 마실 물을 흙탕으로 만들라고 널 부추겼지?” 양의 변론이 이어진다. 당신보다 스무 발자국 밑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으므로 물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자 늑대는 말한다. “난 네 녀석이 작년에도 날 비방한 걸 알아.” 다시 양은 “그때는 엄마 젖도 떼지 못했다”고 변호하지만, 늑대는 그래도 너의 형제이거나 부모일 것이라며, “반드시 내 손으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는 말과 함께 그 어린 양을 먹어치운다.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 항상 최선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이 우화의 끝은 “그 밖의 다른 재판은 없었다”는 말로 맺고 있다.

17세기 프랑스 시인 라퐁텐의 ‘늑대와 양의 우화’는 개울가에서 벌어진 재판 형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재판에서 인과관계의 증명(하류에서 상류의 물을 더럽힐 수는 없다)이나 불법 행위의 부재(어려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강자의 논리가 있고, 그 논리에 도구적으로 동원되는 재판 절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늑대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동원하는 양에 대한 단죄의 이유가 ‘건방지게’ 물을 흐린 것이고, 작년의 비방 때문이라는 것이다.

▲ 17세기 초 유럽의 마녀사냥 모습을 그린 삽화.
봉건사회에 대한 이 17세기의 우화는 자본주의의 최첨단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우스꽝스럽게 재현되고 있다.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 지난해 ‘버르장머리’ 없는 말로 시장의 물을 흐린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의 책임을 묻는 이 소송은 ‘촛불’ 이후 우리 사회의 현재를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수의 법률 전문가들이 민사소송에서 최소한의 요건, 즉 손해, 불법 행위, 인과관계가 입증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 소송은 차라리 자본주의 최첨단의 우화인 한 편의 광고(CF)로 보는 것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법정을 세트로 연출되는 광고, 모델 김민선, 연출·기획 에이미트, 메인 콘셉트는 ‘버르장머리 길들이기’, 주요 광고 효과는 반면교사, 일벌백계를 통해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것이지만 부수적인 효과들도 꽤 상당할 것이다.

목동과 양떼가 물러선 후의 희생양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지난해 사건을 문제 삼으며 배우 김민선을 이 의심스러운 소송·광고의 피고·모델로 캐스팅했는지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그 대답은 아마도 이렇다.

우선 왜 지금인가? 촛불이 꺼졌기 때문이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드라.” 영화 <짝패>에서 이범수의 날렵한 대사에 의하면, 오래가서 강한 쪽은 수입 쇠고기의 안전성에 내기를 걸었던 이들이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철수하고, 생활의 이유로 상당수 시민들이 수입 쇠고기를 먹고 있다. ‘시간의 정치’에서 승리함으로써 확인된 힘을, 다시 소송을 통해 법적 정의로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연일 광장에 촛불이 켜지던 당시라면, 이런 소송은 제기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양떼도 양을 지킬 목동도 없는 현재의 상황이 이런 무모한 소송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한때 광장의 주체들이던 우리는 책임과 위험을 나눌 의무가 있다.

‘소비자’라는 촛불 주체의 상징성 봉쇄

공적 관심사나 사회적 중요성이 있는 문제에 관해 정부의 행위나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의사 전달을 이유로 시민단체나 개인을 상대로 제기되는 민사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한다. 이러한 소송의 특징을 명확히 하기 위해, 제소된 상대방을 ‘피고’(defendant)가 아닌 ‘피소자’(target)라고 부른다.

왜 배우 김민선이 촛불 이후 전략적 봉쇄의 타깃으로 선정됐는가?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스타마케팅’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그 과정을 따지고 들어가면, 촛불 주체에 대한 단죄와 봉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배우 김민선이 선택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지점이 있기도 한다.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거대한 법정’이 돼버렸다. 촛불 이후는 ‘법의 지배’가 ‘법을 통한 지배’로 변질된 단죄의 과정이었고, 법을 명분으로 민주주의적 요구를 봉쇄하는 ‘MB식 법치주의’의 과정이었다. 다양한 촛불 주체들이 법의 단죄와 봉쇄 대상이 되었다. 거리의 시민과 단체 활동가에게는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됐고, ‘미네르바’ 같은 네티즌이나 ‘집단 휴교’ 문자를 돌린 학생에게는 전기통신기본법이 과잉 적용돼 결과적으로 무죄판결을 받기도 했다.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이끌던 목적적인 소비자운동에는 업무방해죄의 유죄판결이 선고됐고, 비판적인 언론 보도를 한 <PD수첩>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렇듯 시민·활동가·네티즌·학생·소비자운동·언론·공무원·노조 등 촛불의 상징적 주체들에 대한 단죄와 봉쇄가 시도된 이후, 아직 법적으로 단죄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은 마지막 상징적 주체는 ‘엄마’와 ‘소비자 개인’이다.

‘유모차 부대’에 대한 아동학대 혐의 적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엄마’라는 상징성은 단죄와 봉쇄의 시도가 부담스럽고, 더욱이 체제에 위협이 되는 주체로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그 기본적 형태가 체제 내적인 것인지 여부를 떠나서, 잠재적으로는 체제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소비자운동이 ‘입장을 바꾼 노동자운동’(가라타니 고진)으로 전화하거나, 유통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 잠재력은 현실적인 힘을 획득할 수도 있다. 많은 평자들은 촛불시위의 한계로서 그 주체가 조직되지 않은 소비자·시민에 제한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촛불 이후 성장하는 불매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주체상의 한계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긍정적 결실을 맺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 성장하는 소비자운동과 ‘소비자 개인’을 분리시킬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지점에서,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제소자의 주관적인 의도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소비·배치된다. 그는 배우라는 대중성 때문에 ‘소비자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일방적으로 과잉 위임받고 선택된 것이다. 말하자면 김민선은, ‘소비자 개인’인 우리를 대신해 법정이라는 무대 위에 세워진 대역이다.

촛불을 진화하는 데 눈부신 활약을 보였던 검찰권력도 법리적 한계와 민주주의적 명분상의 취약함으로 인해 촛불의 최대 주체였던 ‘소비자 개인’에 대한 단죄·봉쇄는 할 수 없었다. 검찰권력이 공백으로 남겨둔 지점을 기업권력이 적극적으로 메운다는 점에서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상징적이다.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 선언에 대한 국가권력의 대응이 형법을 적용한 기소였듯이, 소비자 주권의 선언에는 기업권력에 의한 민법상의 제소가 짝을 이루는 것이다.

배우 김민선의 ‘버르장머리 고치기’는 ‘소비자 길들이기’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우리 모두가 소비자라는 점에서, 이번 소송은 우리 사회 전체를 ‘피소자’로 한 소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표면적인 경고는 발언의 한계를 넘지 말라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비자 주권은 ‘선택의 자유’라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우리의 주권에 대한 한계 설정이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시장 검열(경제적 검열)의 부과다.

공론장에서 법정으로 쫓겨간 정의

데리다의 저작 <법의 힘>은 위 ‘늑대와 양의 우화’를 언급하며, 라퐁텐의 문제의식을 “힘이 법을 만든다”로 요약한다. 영화 <짝패>에서 이범수의 대사를 다시 조금 고쳐 이야기하면, “정의로운 것이 법이 아니라, 힘이 곧 법이고 정의로운 거더라”쯤 될 수 있겠다. 논리적으로 우회할 필요가 없는 힘(조폭·늑대)의 세계는 간명하다. 그 간명함 속에서 진실의 한 단면이 드러난다.

법은 종종 ‘가면 쓴 권력’이라는 조롱을 받아왔지만, 오늘날 우리의 ‘법’은 더 자주 ‘정의’라는 가면을 불편해하며, 권력(힘)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힘이 곧 법”이라는 조폭 논리를 버전 업그레이드하면, “법이 곧 정의”라는 가짜 법치주의의 버전이 나온다. ‘힘=법’인 세상과 ‘법=정의’인 세상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배우 김민선에 대한 소송은 우리 사회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정의를 거추장스러워하는 법과 힘, 법과 정의가 분리됨으로써 오히려 법 자체가 정의가 돼버린 사회, 정의가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전문가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를 ‘소송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검경 각본의 무대 위에 상연되는 인형놀이가 돼가는 것도, 나는 “법이 곧 정의”라고 여기는 가짜 법치주의 버전의 소송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물신화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도 공론장에서 만개해야 할 정의가 법정의 메마른 공간에서 시들어가는 ‘소송사회’적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길들이기’라는 이 광고 같은 소송이 법정 절차를 통해서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정의’로 확인받으려는 것 역시 소송사회의 차가운 얼굴이다. 그리고 ‘소송사회’는 가짜 법치주의의 왜곡된 거울에 비춰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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