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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화산 호수’ 마야인의 잔잔한 파문
‘주홍빛 화산 호수’ 마야인의 잔잔한 파문
  • 김산환|여행전문가
  • 승인 2009.09.0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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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

▲ 마야의 어부가 이른 아침 주홍빛 노을이 호수에 물든 가운데 그물을 걷으러 가고 있다.
마야의 혼이 깃든 과테말라의 화산 호수 아티틀란. 이 고요하고 드넓은 호숫가에 자리한 열두 마을 가운데 하나인 산 페드로에 보름쯤 머문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을 혼자인 채로 여행을 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밀려오는 외로움을 어쩌지 못했다. 누군가 미치도록 그리워 밤늦도록 카페를 지키고, 낯선 골목을 서성거렸다.

그날도 여행자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야 카페를 등졌다. 내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는 마을의 높은 언덕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지나야 했다. 어둠만 내리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마을. 그 마을의 깊은 품으로 걸어갈 때면 샌들에 풀잎 차이는 소리까지도 들릴 정도였다. 나는 애써 발길을 조심스럽게 놀리며 골목에 빠져 다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향기는 초콜릿처럼 달콤했고, 구렁이처럼 느릿느릿 담장을 넘어와서는 내 몸을 칭칭 감았다. 나는 그 구수한 향기에 취해 코를 벌름거렸다. 무슨 냄새일까.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었다. 히피들이었다. 늦은 저녁을 물린 그들이 둘러앉아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다.

과테말라의 아름다운 호수 아티틀란

그 달콤한 냄새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자 마리화나를 피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것을 피우면 헛헛한 가슴을 진정치 못해 불면의 밤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그 연기에 실어 날려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분명히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다. 중남미에서는 단돈 몇 달러면 살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게 마리화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은 죄악이라는 논리가 수학 공식처럼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깊은 심호흡만 몇 번 해보고 게스트하우스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아티틀란. 지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또 있을까. 보름 동안 이 호수와 마주하면서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자부했다. 분화구를 넘어온 해가 주홍빛으로 호수를 물들이는 아침부터 허리춤까지 물이 차는 호수에 들어가서 빨래를 하던 아낙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까지, 온종일 이 호수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했다. 이 호수의 다른 이름은 평화다. 호숫가에는 미워할 일도, 노여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이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지상에 강림한 천국이라 해도 언어도단은 아니다.

그곳에 히피들이 둥지를 튼다. 언제부터 그들이 이 호숫가 마을에 둥지를 틀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히피들조차도 자신이 이 호수에 몸을 맡기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생의 한 시절을 저당 잡힌 채 젊음을 마리화나로 태워 보낸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문명이란 이름의 아주 세련된 사회를 저주하면서 말이다. 푼돈이면 구할 수 있는 마리화나. 히피에게 그것만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명약이 없다. 자신의 영혼이 지금 어디서 떠도는지조차도 모르게 그 연기에 취해서 지내는 것이다. 그렇게 아티틀란 호수에 생을 의지한 채 마리화나의 달콤함에 취하던 이들은 어느 순간, 아주 황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환각에서 깨어난 순간 이미 젊음을 지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자신과 마주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을 구원해주는 따뜻한 손길은 없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자신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마음의 고향이라 믿었던 아티틀란을 등진다. 저주를 퍼붓던 문명을 찾아간다.

문명 저주하는 히피들의 마리화나

15년쯤 전의 일이다. 네팔 제2의 도시이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라는 포카라에 며칠 머문 적이 있다. 물고기 꼬리처럼 매끈한 봉우리를 가진 설산 마차푸차레가 호수에 비친다는 그 도시 말이다. 그 호수에서 한가롭게 뱃놀이를 즐길 때였다. 노를 젓는 뱃사공과 마주 본 채 앳된 백인 청년 하나가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은 절반쯤 풀려 있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아주 느리게 숨을 쉬었다. 그를 태운 조각배가 우리 배를 스쳐 지날 때였다. 초콜릿향이 훅 끼쳤다. 그때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몰랐다. 그 냄새의 정체를 알려준 것은 나를 태운 뱃사공이었다. 영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몸짓으로 백인 청년이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뱃사공이 연기를 내뿜고, 풀린 눈동자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사실을 알아챘다. 백인 청년을 태운 배는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갔다. 그때도 마리화나를 피워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아티틀란으로 돌아가보자. 이 호수의 신상명세를 대충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티틀란은 과테말라 중부의 산악지대에 자리한 화산 호수다. 해발 2천m에 있으며 호수 면적은 백두산 천지의 4배쯤 된다. 고지대 마야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호숫가에는 열두 마을이 있다. 마을과 마을은 배를 타고 오가고, 사내들은 호수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건져낸다. 아이들도 온종일 호숫가에서 논다. 호숫가에서 공을 차고, 호수에서 멱을 감는다. 여인들은 호숫가에서 빨래를 한다. 빨래터는 호수 한복판, 물이 허리춤까지 차는 곳이다. 빨래를 마친 여인들은 빨랫비누로 머리에 비누칠을 한 뒤 오랜 자맥질로 물속에서 머리를 헹군다. 이것이 그들만의 목욕법이다.

▲ 여인들이 호수의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멱도 감는다.
고지대 마야인에게 아티틀란은 성지다. 그들의 먼먼 조상이 이 호수에 기대어 살아왔던 것처럼 그들도 이 호수에 마음을 주고 산다. 그렇다고 아티틀란 호수가 살 만한 터는 아니다. 오히려 삶을 의탁하려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비정한 땅이다. 호수를 감싼 분화구의 벽은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가파르다. 그곳은 밭을 일굴 수도 없다. 마야인이 기대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호숫가뿐이다. 그곳에 손바닥만 한 땅이 있어 감자나 옥수수를 심는다. 그곳에 집을 짓고, 채마밭을 가꾸며 산다. 이른 아침에 걷는, 그물에 걸린 고기는 아티틀란 호수가 베푼 자비다. 그러나 그곳에 기대어 사는 마야인은 순박하다. 각박한 삶과 달리 그들의 심성은 하느님의 마음씨를 닮았다. 몸에 친절이라는 피가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제나 여행자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아름다운 호수와 그 호수만큼 마음씨 착한 사람들. 그들 품에서 보름을 보냈다. 한 번쯤 히피가 되고 싶은 충동도 일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얻은 깨달음은 아티틀란 호수가, 그곳에 사는 마야인이 내게는 마리화나였다. 지금도 사는 게 녹녹지 않을 때면 그곳에서 보낸 며칠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 지독한 아티틀란 중독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여행의 중독인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김산환
여행작가. 일간지 여행기자로 활동했으며, 국내외를 돌며 여행기를 쓰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라틴홀릭> 등 다수가 있다.

라틴의 해방구 ‘안티구아’

과테말라의 수도는 과테말라 시티다. 그러나 여행자에게 이런 행정수도는 의미가 없다. 여행자에게 과테말라의 수도는 안티구아다.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은 이곳에 모여 스페인어를 배우고, 과테말라를 여행한다. 안티구아는 또 여행자들이 편히 쉬고, 배우고, 여행할 수 있도록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티구아는 오래된 식민 도시다. 스페인이 중남미에 마련한 몇 개 거점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많을 때는 인구수가 20만 명이나 됐고, 교회와 성당만도 50여 개를 헤아렸다. 그러나 아구아화산이 폭발하면서 이 도시는 쑥대밭이 됐다. 지금 남아 있는 것들은 화산의 상처를 이겨낸 것이거나 그 후에 지어진 것이다.

안티구아는 그 자체로 볼 것이 많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식민의 유산이 가득하다. 일주일쯤은 이 도시만 돌아다녀도 질리지 않을 정도다. 치안이 불안한 중남미에서는 보기 드물게 완벽한 안전을 제공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다운타운에서 밤늦도록 돌아다녀도 걱정이 없다.

안티구아에는 수십 개의 사설 어학원이 있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석 달씩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운다. 스페인어가 어느 정도 입에 붙으면 본격적으로 라틴을 찾아 떠난다. 안티구아를 ‘라틴 해방구’라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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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환|여행전문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