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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개가 한라봉 앞에서 방방 뛸 때 가능한 맥락
[안치용의 프롬나드] 개가 한라봉 앞에서 방방 뛸 때 가능한 맥락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1.21 18: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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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개가 한라봉 앞에서 방방 뛸 때 가능한 맥락

한라봉을 먹자니 혼자 먹기가 쉽지 않다. 한라봉을 꺼내 볼록 튀어나온 머리 부분 비슷한 걸 꺾어서 껍질을 까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나타난다. 그들이. 걸리버와 스콜이다. 개의 후각이 정말 예민한 게, 그들은 한라봉 껍질의 아주 작은 손상에도 그 틈으로 터져 나온 분자들의 분출을 후각세포로 감지해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온다.

오늘 낮에 대학생 언론인이 참석하는 기자캠프에 가서 특강을 했다. 모두(冒頭)에 ‘키몬과 페로’란 그림 이야기를 꺼냈다. 반라의 늙은 남자가 풍만한 젊은 여인의 가슴에 입을 대고 있는 모습. 요체는 이 그림의 배경 혹은 사전지식을 알아야 그림을 오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게 이해를 위한 핵심 정보이다.

그렇다고 신화를 그린 그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근친상간은 아니다. 로마 시대의 일로 전해지는데, 감옥에 수감돼 음식제공이 금지된 채 굶어 죽어가는 늙은 아버지 키몬을 위해 딸 페로가 기이한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곡기’를 공급하는 이야기다. 아마도 젖먹이 아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페로가 자신의 젖을 아버지에게 물려 아버지를 말 그대로 연명케 하는, 특이한 효행이 이 그림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루벤스 그뢰즈 등 많은 화가들이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의미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맥락을 통해서만 해석된다는, 따라서 의미의 성립은 의미의 부재 속에서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든 사례인데, 강연을 마치고 귀가해 한라봉을 먹으려는 순간 나의 개들로 인해 이 그림을 다른 맥락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나 혼자 한라봉을 먹을 땐 두 놈 모두 예외 없이 내 앞을 간절한 표정으로 지키며 때로 강력한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뛰어오르기까지 한다. 오늘은 한라봉 두 개가 두 명에게 동시에 주어지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나와 아들이 각각 한라봉을 들고 한 사람은 부엌 식탁에서 한 사람은 제 방에서 먹게 되면서 한 마리는 나에게로, 또 한 마리는 아들에게로 가서 집중 마크에 돌입했다. 그러나 음식에 관한 집중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걸리버는 아들에게 감으로써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다행히 스콜은 우연찮게 내 앞을 지켰다.

걸리버는 아들이 한라봉을 먹을 때 번거로워서 결코 개들에게 나눠주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걸리버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선택이 봉쇄된 랜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잘못이었다. 사물 자체에만 집중하면 나의 한라봉이나 내 아들의 한라봉이나 개들에겐 동일하게 타당한 표적이다. 한라봉 같은 과일을 개들에게 나눠주려면 한라봉 조각의 껍질을 벗겨서 치아로 씹어 잘게 만들어 손 위에 올려놓고 먹여야 하기야 다소 귀찮은 일이다. 중학생인 아들이 그런 번잡을 감내할 리가 만무하다는 걸 개들은 모른다.

걸리버에겐 다행스럽게 나는 스콜에게 먹이기 전에 걸리버를 마저 불러서 두 마리 모두에게 한라봉을 나눠 먹였다. 걸리버는 혹은 스콜도, 한라봉이 놓이는 맥락을 원천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한라봉의 껍질이 벗겨지는 걸 기민하게 식별해도 어떤 때는 먹을 수 있고 어떤 때는 못 먹는 상황이 그저 삶의 변덕으로 받아들여질 법하다.

운 좋게 내가 개들에게 맥락을 제공하는 위치여서 나는 가끔 그들을 구제한다. 상상해서 만일 내가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위치에 처한다면 나는 나의 개들과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 또한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어처구니없게도 ‘키몬과 페로’ 같은 그림을 보며 “음란성”을 젠 체 하며 운위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사실 나의 세계인식 가운데 개들과 비슷한 게, 몰라서 그렇지 많을 수 있다. 아니 많다는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다.

인식이 인식으로 끝나면 큰 문제는 없다. 대부분 인식을 관계 속에서 해석으로 전환하여 확산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고 들면 없지는 않다. 단지, 맥락을 모르면 맥락을 피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은 맥락에 얽히어 살기에 또는 얹혀살기에 전면적으로 맥락을 피하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쩐다? 걸리버처럼 맞든 틀리든 일단 그 앞에서 방방 뛰면 누군가 맞는 맥락으로 인도해 주려나.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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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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